이정은이 가진 경이로운 힘

글 : 서경리 기자  / 사진제공 : 위너브라더스 코리아 

배우의 존재감은 놀랍다. 연출가나 작가가 정해준 캐릭터를 ‘연기’할 뿐인데, 그 인물을 실존한 누군가로 대중의 기억에 각인시킬 때가 있다. 마치 어제까지 내 옆에 살아 존재했던 인물처럼. 극이 끝나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신기루로 사라지지만, 배우의 연기가 농익을수록 잔상은 더욱 짙어진다. 이정은이 그렇다. 드라마는 끝이 났지만, 어느 골목 양복점에서 그가 묵묵히 미싱을 돌리고 있거나(〈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동네 사랑방에서 아줌마들 파마를 해주고 있을 것만 같다(〈눈이 부시게〉). 내년이면 연기 인생 30년을 맞는 배우 이정은이 가진 존재감이다.
태풍이 몰아치던 밤, 섬 절벽 끝에서 유서 한 장만을 남긴 채 소녀(노정의 분)가 사라진다. 형사 현수(김혜수 분)는 사건을 추적하기 위해 섬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이정은 분)을 만난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의 시놉시스다. 영화는 범죄 사건의 주요 증인으로 채택돼 섬마을에서 보호를 받던 소녀 세진이 사라진 이후의 상황을 그린다.

영화는 내내 을씨년스러운 섬, 혹은 삶의 곳곳을 비춘다. 소녀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섬마을 주민 순천댁은 극을 한층 더 기묘하게 이끈다. 이정은이 연기한 순천댁은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인물. 사건의 키를 잡고 있지만 좀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관객 입장에서야 답답할 법도 한데,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바닥으로 떨구는 눈빛 하나, 내뱉는 한숨, 삐뚤빼뚤한 손글씨 하나에도 숨죽여 집중하게 된다.

“순천댁은 불행의 불행을 안고 힘겹게 살아갔을 거예요.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누군가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었죠. 그런 인물을 몸에 장착하기가 어려운데, 뮤지컬 〈빨래〉에서 장애인을 돌보는 할머니 역할을 오래 한 게 도움이 됐어요. 당시 노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찾아봤어요. 그들은 자기 몸 하나도 못 가누면서 정성스럽게 식물을 키워내요. 그들이 삶을 지탱해가는 힘은 어쩌면 지금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보살핌이 아닐까 생각했죠.”


연극·영화·드라마를 넘나드는 30년 배우 인생

이정은이 본격적으로 영상 매체에 얼굴을 내민 건 8년이 채 안 된다. 영화는 2001년, 드라마는 한참 후인 2013년에야 데뷔했다. 첫 영화 촬영에서 NG를 내고 카메라 울렁증이 생겨 한참을 카메라 앞에 서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연극 무대 조연출로 사회에 발을 들인 이정은은 1991년 연극 〈한여름 밤의 꿈〉으로 데뷔, 연극·뮤지컬·드라마·영화를 오가며 내공을 다져왔다. 2008년 창작 뮤지컬 〈빨래〉는 배우 이정은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무대다. 거의 4년간 주인할머니와 여직원의 역할을 소화해내며 제1회 젊은 연극인상을 받았고, 이 작품을 본 봉준호 감독의 눈에 띄어 〈마더〉 〈옥자〉 〈기생충〉까지 연을 이어왔다. 지난해에는 〈기생충〉으로 제40회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주로 정 넘치고 푸근한 중년 여성 캐릭터를 맡아온 이정은은 어떤 역할이든 제 옷처럼 소화해내는 ‘신스틸러’로 불린다. 〈쌈, 마이웨이〉의 금복, 〈아는 와이프〉의 치매 걸린 엄마, 〈미스터 션샤인〉의 함안댁, 〈기생충〉의 가정부 문광, 〈타인은 지옥이다〉의 엄복순, 〈동백꽃 필 무렵〉의 정숙 등 그가 소화한 캐릭터들은 주연이 아니더라도 그 이상의 존재감으로 강렬한 잔상을 남겼다.

이번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도 마찬가지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 소송 중인 형사와 아버지의 범죄를 목격한 증인으로 섬에 온 소녀. 그 사이에서 순천댁은 생(生)과 분투하며 묵직하게 존재를 드러낸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쇳소리로 내뱉은 말, “니가 남았다. 니가 너를 구해야지”는 극 중 명대사로 꼽힌다.

“죽을 것 같은 고민 속에서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인생에서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순간이었죠. 절망감에 빠져도 회복의 길은 분명 있어요. 다만 지름길이 없을 뿐이죠. 어쨌든 괴롭고 아픈 시간을 보내야 해요. 내가 없으면 우주도 없어요. 아침에 눈뜨고 숨을 쉬는 지금의 평범한 순간도, 아프다 느끼는 순간에도 나는 살아 있는 거니까. 나이 들어 그런가, 존재한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고 있어요.”

사라진 소녀, 세진을 연기한 배우 노정의는 이정은이 극 중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을 때 실제 큰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안아준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눈물이 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순천댁의 옷을 입은 이정은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먹먹한 위로가 담겨 있다.



잘 듣고 기다려주는 어른

이정은은 올해 나이 쉰을 넘겼다. 그는 “다음 세대가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떤 세상을 만들어줄까를 고민하는 나이가 됐다”고 했다. 그가 그리는 참어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순천댁은 자기의 불행을 딛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에요. 내가 그런 어른이 되어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순천댁과 제가 닮은 점이 있다면 잘 듣는다는 점이에요. 누구에게나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있는데, 그것을 발견하려면 소리를 죽이고 잘 들어야 해요. 작품을 하면서 배우 인생에서도 듣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듣는 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어야 인간적인 역할들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른의 모습도 그래요. 저는 잘 듣고 기다려주는 어른이고 싶어요. 아이들이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타이밍이 맞으면 기꺼이 도움을 주는 게 어른 역할 아닐까요. 어른이라고 아무 때나 숟가락 들고 밥을 밀어넣을 수도 없잖아요. 어른도 아이도 함께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영화에서 순천댁과 현수가 섬 선착장에서 마주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우리가 한 일’을 서로 알고 진실을 대면하며 비밀의 연대를 느끼는 순간이다. 현수 역의 김혜수는 “멀리서 이정은이 리어카를 끌고 오는데 순천댁의 모습이 보여 눈물이 났다”고 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도 똑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배역에 폭 빠져든 두 배우가, 연기가 아닌 서로의 진심으로 연대한 순간이리라. 둘은 한동안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물론 실제 영화에서는 이 장면을 볼 수 없다. 감독은 “덤덤하게 가자”며 눈물을 빼고 담백하게 영화를 끝냈다.

배우 김혜수는 이정은을 두고 “경이로운 정은 씨”라 부른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왜 그런 말을 했을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말없이 묵묵한 손짓, 눈빛 하나로, 그 존재만으로도 따뜻한 위로를 주는, 배우 이정은에게는 경이로운 힘이 있다.
  •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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