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서예가 인중 이정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연서 대필한 그 작가

글·사진 : 서경리 기자

사극을 볼 때마다 궁금했다. 연인을 향한 절절한 연서나 멀리 있어 만나지 못하는 오랜 벗에게 보내는 우정 편지, 왕에게 분노에 차서 써 올리는 상소문의 그림 같은 서체는 누가 쓰는 것일까. 요리 장면마다 요리사가 대신해 현란한 칼질을 뽐내듯 고운 저 붓글씨도 배우가 아닌 누군가 대신하고 있지 않을까. 청년 서예가 인중 이정화는 우리나라 사극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의 서신을 대신하는 대필 작가다.
“보고십엇소.”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여주인공 ‘고애신’으로 분한 김태리가 공책에 살포시 적어 ‘유진 초이’에게 건넨 이 짧은 문장을 기억하는지. 서예가이자 대필 작가인 인중 이정화의 서체다. 그는 아직도 붓을 들었던 그 순간의 감정을 기억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꽃 같아지고 싶은 여인의 마음을 담아 얇고 부드럽게 썼어요. 단번에 오케이 컷이 났죠. 이때는 정말 애신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표현하기 힘든 희열을 느꼈어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말 못하는 소이가 글로써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전할 때도, 〈신입사관 구해령〉에서 왕의 말을 받아 적는 사관이 상소문을 올릴 때도, 그는 배우와 같은 마음으로 붓을 들었다. 인물이 화가 날 때는 더욱 격렬하게 붓을 휘갈겼고, 슬플 땐 뚝뚝, 눈물방울과 함께 붓을 떨구었다. 붓을 든 손으로 글씨에 심정을 담았다. 그것이 서예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연기였다.


몸에 흐르는 진한 묵의 피


이정화 작가는 서예가인 아버지를 따라 일곱 살에 처음 붓을 잡았다. 또래 친구들이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그림 그릴 때 그는 아버지의 서실에서 벼루에 먹을 붓고, 붓에 먹을 적셔 화첩에 글자를 썼다.

“다섯 살 때 심장 수술을 했는데, 서예가이던 아버지 친구들이 수혈해주셨다고 해요. 지금도 그분들이 저를 보면서 ‘네 몸속에 서예가의 피, 묵색의 피가 흐른다’고 말씀하시죠. 하하.”

인중 이정화의 청춘 첫 페이지는 서예로 각인된다. 그의 호 ‘인중’은 경기대 서예문자예술학과 재학 시절 스승이 지어준 호다. 호를 지을 때 인품을 담거나 부족한 면을 채워주기 위해 짓기도 하는데, 스승은 그에게 “넌 참으로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며 어질 인(仁) 자와 가운데 중(中) 자를 붙여 ‘인중’이라 지어줬다. 인은 ‘사랑’이라는 뜻도 품고 있다.

“인(仁)은 사람 인(人) 변에 작대기 두 개(二)가 붙어요.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같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죠. ‘너보다 내가 더 소중해, 나만 최고야’가 아니라 서로 대등하게 평행선에서 사랑하는 게 진짜 사랑이라는 거예요. 남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나를 살필 줄 아는 ‘인(仁)’ 자를 마음에 새기라는, 그런 마음을 담아 지어준 이름이 아닐까 해요.”


붓은 나의 작은 스승


그를 서예가의 길로, 또 대필 작가의 세계로 이끈 이는 아버지 송민 이주형 선생이다. 한문 행·초서의 대가로 불리는 그는 〈추노〉 〈별순검〉 등 드라마 포스터에 등장하는 붓글씨의 주인공이다. 또 각종 사극에서 왕의 글씨를 쓰며 우리나라 서예 대역의 원조로 불린다. 이 작가는 “아버지는 나의 정신적인 스승이면서 서예 기술을 알려주신 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처음 붓을 든 그에게 ‘자외구서(字外求書)’의 정신을 일러줬다. ‘글자 밖에서 글씨를 구하라’라는 말로, ‘글자 안에 갇힌 마음을 꺼내 더 깊고 멀리 내다봐라’는 뜻이다.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고 세상이 좀 더 따뜻한 곳이 될 수 있도록 자연의 선을 보여주는 일. 점 하나도 신중하게 마음을 담아 찍는 서예가의 기본 도리다.

“아버지는 저에게 고목의 나뭇가지에서 서예의 장엄한 획을 찾고, 흐르는 물의 움직임을 보면서 유려한 선을 찾아 리듬에 몸을 맡기듯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붓이 자연스럽게 춤을 추게 하라고 하셨어요. 인간이 만들어낸 선을 고집스럽게 보지 말고, 자연이 오랜 시간 동안 지켜낸 획을 사랑하라고, 아주 천천히 그렇게 자연을 닮아가길 바란다고요.”


서예 국가대표로 세계 유랑


손톱 밑에 먹 때가 잔뜩 낀 이십 대. 방송에 소개되고 명성을 얻으며 이정화 작가의 인생에 새 길이 열렸다. 대학 3학년, 같은 대학 선배의 제안으로 ‘문화사절단’ 활동을 하게 된 것. 국악과 판소리, 서예 등 우리 전통문화를 공부하는 청년 다섯 명과 함께 ‘아리랑유랑단’을 꾸리고 열다섯 개 나라를 다니며 ‘아리랑’과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렸다.

“‘나는 서예 국가대표다. 모든 시선을 서예와 예술에 빗대어 바라보자’는 마음으로 떠난 유랑이에요. 각국 대사관, 영사관, 대학교의 한국어과, 세종학당 등에서 아리랑을 알리고 서예를 가르쳤죠. 길거리에서 서예 퍼포먼스도 하고요.”

당시 아리랑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며 아리랑유랑단의 활동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 활동에 힘입어 젊은 서예가로 이름을 알리며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출연하고, 기업과 학교 등에서 강연자로 초청받기도 했다.


이 작가는 “서예는 단순하게 책에 있는 글귀를 옮겨 적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글자 안에 깃든 마음을 담아 예술로 승화하는 작업이다”라고 말한다. 말에는 씨앗이 있다. 또한 말을 옮겨 적은 글에도 씨앗이 있다. 그러니 붓으로 찍는 점 하나에도 생명이 있다. 이 작가는 자신의 손을 타고 종이에 심어진 글 속의 씨앗이 세상을 밝히기를 바란다.

“말씀 언(言) 자는 입에서(口) 말이 하나둘씩 나오는 모습을 표현한 상형문자예요. 내 입을 떠나 어느 허공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이미 아주 깊게 새겨지고 있는 말들이 많죠. ‘내 손을 타고 종이에 심어진 저 글 속의 씨앗이 세상을 밝히는 아름다운 글씨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에요. 써내려간 글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요.”

붓이 남긴 점 하나에도 탄생의 이유가 있다. 휙 그은 선 하나에도 세계관이 담긴다.

“이 세상에 무제로 태어나는 생은 없어요. 하나의 점을 찍고 획을 그을 때도 아무 이유 없이 휘둘러선 안 되죠. 점이 획이 되고, 획이 빛이 되어 작품이 됩니다.”


일희일비해도 괜찮아


우리나라 나이로 갓 서른을 넘긴 서예가 이정화. 그는 최근 붓과 함께해온 20여 년의 시간을 에세이 《일희일비하는 그대에게》로 엮었다. 책은 글 쓰는 방법을 일러주기보다 진심을 담은 글쓰기를 하고 싶도록 이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내면의 우물로 빠져들어가 고요히 묵을 갈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제 또래 친구들은 ‘철없이 살면 안 돼, 어른이 돼야 해’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어른이 되더라도 한쪽 구석에는 평생 아이 같은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슬퍼하고 기뻐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살았으면 하죠. 제 책은 저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해요. ‘괜찮다, 괜찮다, 일희일비해도 괜찮다’고요.”
  • 202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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