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백〉 배우 신혜선

시청률 보증 수표의 스크린 도전기

글 : 선수현 기자  / 사진제공 : 키다리이엔티 

신혜선은 인사 후 명함부터 내밀었다. ‘법무법인 담, 변호사 안정인’.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소재 주소부터 이메일, 전화번호, 팩스번호까지 세부사항이 빼곡하게 기재돼 흡사 진짜 명함 같았다.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특별 제작한 가짜 명함이지만 그의 굳은 각오가 묻어났다. 브라운관에서 시청률 고공 행진의 주인공인 신혜선이 영화 첫 주연작으로 출사표를 던진 〈결백〉이 더욱 궁금해진다.
어느 시골 농가 장례식장. 넋이 나간 고인의 아내와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들을 제외하곤 특별할 것 없는 장례식 풍경이 펼쳐진다. 이때 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쓰러지며 상황은 급변한다. 농약을 탄 막걸리를 마신 것. 끔찍한 참극의 용의자로 지목된 이는 급성 치매에 걸린 고인의 아내, 화자(배종옥)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막걸리 농약 사건이 권력의 추악함과 가족을 향한 희생을 버무린 무죄 입증 추적극 〈결백〉으로 탄생했다. 고요한 시골을 배경으로 냉소적이고 비릿한 인물들의 등장은 묘한 불편함을 준다. 또 고단한 세월을 짐작케 하는 엄마의 모습과 대형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로 활동하는 딸이 대조를 이뤄 마음을 짓누른다.

신혜선은 가족과 인연을 끊고 살다가 엄마(배종옥)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사건에 뛰어드는 변호사 안정인 역을 맡았다. 범행을 확신하고 회유하는 검사를 향해 정인은 고한다. “두고 보세요. 내가 결백을 증명할게”라고. 영화 속 정인이 엄마의 결백을 증명해가는 동안 신혜선은 자신을 증명했다. 관록이 뚝뚝 묻어나는 배종옥과 허준호의 묵직한 열연 속에서 결코 밀리지 않는 존재감으로 이야기의 큰 줄기를 이끌어갔다.

“배종옥, 허준호 선배님은 어려서부터 우러러본 분들이라 굉장히 긴장했어요. 부담되는 게 사실이지만 현장에서는 동등한 배우로 대해주셔서 대선배들과 함께한다는 부담보다 장면을 잘 완수해야 한다는 부담이 더 컸죠. 선배님들에게 기대어 갈 수는 없으니까요.”


대사 전달력 좋은 ‘딕션 요정’


영화 속 신혜선의 존재감이 돋보인 건 단연 모녀의 접견 장면이다. 사건 용의자로 수감된 엄마를 찾아간 딸. 인연을 끊은 채 대조적 삶을 살던 모녀가 감정을 교류하면서 두 얼굴이 하나로 합쳐져 유리에 비친다. 시끄럽고 복잡한 속내와 달리 차분하고 똑 부러진 태도를 취하던 정인이 가족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배종옥은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온 노인을 표현하기 위해 주름과 피부결, 망가진 손톱 등 특수 분장을 했는데, 이를 보고 신혜선은 응어리진 감정을 터뜨린다. 배우로서의 진가가 묻어난 이 장면을 위해 그는 화장실에서 쥐가 날 정도로 연습에 골몰했다.

“배종옥 선배님이 분장한 모습을 못 보게 하셨어요. 제가 그 모습에 익숙해지면 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웬만하면 분장한 걸 보지 않는 게 좋겠다고요. 촬영에 들어가서 그 이유를 알았어요. 작고 초췌한 몸과 눈가의 주름에 야속한 세월이 묻어 있었어요. 혼자서 연습할 때는 느껴지지 않던 감정이 확 와닿았죠. 그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져 감정의 강도가 다르게 다가온 거예요.”

그의 연기를 한층 몰입하게 만드는 요소는 발음이다. 신혜선은 평소 ‘딕션 요정’으로 불린다. 똑 부러진 발음으로 대사 전달력이 좋아 붙은 별명이다. 유튜브에는 그의 발음 모음 영상이 따로 있을 정도다. 영화에서 구체적인 증거를 들며 논리적 변론을 펼치는 그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관객은 ‘딕션 요정’의 대사를 따라가며 몰입할 수밖에 없다. 〈결백〉을 연출한 박상현 감독도 “신혜선 배우처럼 발음이 정확하면서 감정의 템포까지 조절하는 배우가 흔치 않다”며 “현장에서 눈물의 타이밍까지 조절하는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극찬했다.

“유튜브 영상을 봤어요. 기분은 좋은데 발음으로 칭찬받을 줄 몰랐어요. 제 직업에서 당연한 일이잖아요. 전 대사를 전달하는 사람인 걸요. 비결은 딱히 없는데 대사를 눈으로 보지 않고 처음부터 편하게 소리 내어 읽어봐요. 대사를 보면서 하기보다 외워서 하면 더 잘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의 갈망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신혜선은 안방극장 흥행 보증 수표로 인정받는 배우다. 비록 영화 〈검사외전〉 〈하루〉에서는 강동원·변요한의 상대역으로 짧은 역할에 그쳤지만, TV에서는 시청률로 그의 존재감을 입증했다. 드라마 〈아이가 다섯〉과 〈푸른 바다의 전설〉은 각각 32.8%, 21.0%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황금빛 내 인생〉 역시 45.1%의 시청률로 정점을 찍었다. 꽤 좋은 타율이었다.

상반된 캐릭터들도 이질감 없이 척척 소화해냈다. 웰메이드 작품으로 호평받은 〈비밀의 숲〉의 ‘영은수’는 신입 검사로서의 열망을 보여줬고, 로맨틱 코미디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에서 ‘우서리’는 통통 튀는 밝은 매력이 돋보였다. 〈사의 찬미〉의 ‘윤심덕’은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의 비극적 사랑을 선사했다. 스스로가 대견할 만도 한데 신혜선은 절레절레 손사래를 친다.

“아직 멀었어요. 제가 좋은 작품에 잘 업혀 가서 그렇죠. 뒤돌아본 적이 없어서 만족은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연기가 제 시간을 다 바쳐서 할 수 있을 정도로 재밌어요. 작품을 고를 때면 장르를 떠나 연기하는 제가 얼마나 재밌어 할지를 떠올려봐요. 비슷한 역할이라도 재밌겠다 싶으면 하는 거죠.”


신혜선은 데뷔 후 8년 동안 공백기 없이 꾸준히 달려왔다. 초등학생 때부터 연기자를 꿈꿨고 그 꿈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원빈에게 반하면서 배우의 꿈은 더 커졌다. 하지만 정작 준비가 됐다 싶었을 즈음,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서류 심사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부지런히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그는 2년 만에 〈학교 2013〉으로 연기에 첫발을 내딛었다.

“배우의 꿈을 오랫동안 품어왔고, 또 배우 지망생으로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동안 이 일에 대한 갈망이 커서 그럴까요? 쉴 만큼 쉬어봤으니 아직은 쉬고 싶지 않아요.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을수록 더 그래요. 일종의 보상심리처럼 아직은 그때의 갈망이 충족되지 않나 봐요.”

신혜선은 퓨전사극드라마 〈철인왕후〉와 범죄오락영화 〈도굴〉로 다시 한 번 존재감을 증명하려 한다. 오랫동안 바라던 기회가 찾아왔으니 주춤할 겨를이 없다고나 할까. 참고로 아직 원빈은 만나지도 못했다고 한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노력하면서도 즐기는 자는 도통 따라잡을 수 없다. 신혜선이 시청률 보증 수표로 자리 잡은 비결이다.
  • 202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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