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 이공

문구 덕후들의 성지 ‘스럽댄’

글 : 김가원 명예기자  / 사진 : 서경리 기자  / 사진제공 : 이공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둘러싸인 소녀들은 마냥 귀엽지만은 않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과 무표정해 보이는 입술이 사연 하나씩 갖고 있을 것만 같다. ‘Remember your girlhood’란 슬로건이 말해주듯 일러스트 굿즈 브랜드 ‘Standard Love Dance(스탠다드 러브 댄스, 스럽댄)’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서 시작됐다.
문구 덕후나 예쁜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일러스트레이터 이공과 ‘스럽댄’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의 다이어리는 최근 다시 유행하는 레트로 문구인 ‘6공 다이어리’로 인기를 얻고 있고,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굿즈숍은 ‘연남동의 그 핑크 가게’란 별명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개인 작업뿐 아니라 세븐일레븐, 패션 브랜드 ‘Chuu’, 주얼리 브랜드 ‘Amondz’ 등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 활동으로 입지를 다졌다.

일상의 그림을 입힌 그의 물건들은 같은 감성을 지닌 사람들의 일상과도 함께한다. 정작 그는 자신의 작품을 평범한 그림이라 말한다. “혼자서 그림을 그리다 얼떨결에 브랜드 대표까지 됐다”는 이공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평범한 일상에서 잡아내는 특별함


그의 일러스트 ‘Girl student’ 시리즈 중엔 책가방을 내려놓고 난간에 기댄 학생들을 그린 그림이 있다. ‘친구들과 함께 미술학원에 가지 않았던 날, 해방감으로 행복할 줄 알았지만 아무 말 없이 걷고 또 걸었던 날’로 설명된다. 이렇게 상세한 묘사를 할 수 있는 힘은 일상에 대한 깊은 관찰에서 나왔다.

“저 자신과 일상에 관심이 많고, 끊임없이 궁금해합니다. 반려묘 솜이를 무심히 관찰하거나 매일 같은 커피를 마시면서 오늘의 커피 맛을 생각하는 식이죠. 또 습관처럼 일기를 쓰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도 꼭 기록해요. 일상에서 특별함을 잡아내려는 거죠. 이런 글이 작업에 영감을 주다 보니 기록하는 게 습관이 됐어요.”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편집 디자이너로 직장 생활을 했다. 그에게 그림은 취미보다 일상에 가까웠다. 회사 생활에 지칠 무렵, 쉬면서 신나게 그림을 그리자는 생각으로 퇴사했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정말 그림만 그렸다. 걱정되진 않았느냐는 질문에 “1인 창작자 활동 자체를 상상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퇴사 초기에는 재취업을 생각했다. 센 근무 강도에 지쳤을 뿐, 회사 생활은 잘 맞았기 때문이다.

“퇴사 기간에 그린 그림들을 아카이빙하려고 SNS에 올렸어요. 많은 분들이 봐주셨고, 잡지 삽화 등 그림 제안도 들어왔죠. 그림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얼떨결에 일러스트레이터이자 1인 창작자의 삶을 살게 됐어요.”

캐릭터 레빗 걸(Rabbit girl). 레빗 걸은 토끼 머리띠와 양 갈래 머리를 한, 생각에 잠겨 꿈꾸기를 좋아하는 캐릭터다.
장시간 혼자 작업하고, 오로지 자신의 선택을 믿어야 하는 1인 창작자의 생활은 양면성을 지녔다. 무한 자유와 함께 무한 책임도 뒤따른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슬럼프를 만들기도 한다.

“스스로 높은 목표를 설정해놓고 이를 성취하지 못하면 자책하고 실망하곤 했어요. 이 모습 또한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니 그림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의 SNS에는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는 학생들의 댓글도 자주 올라온다. 도움이 되는 한마디를 부탁하자 “버티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견뎌낼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저 역시 여전히 슬럼프가 오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교훈 삼아 더 깊게 빠지지 않을 뿐이에요. 슬럼프에 빠졌을 때 끌어올릴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 평소에 미리 찾아놓으려 해요. 나 자신을 챙기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핑크색 굿즈로 가득한 연남동 ‘스럽댄’.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일기장

펍 당시의 매장 모습. 테이블을 중심으로 곳곳에 그림이 녹아 있는 공간, 동화 속 캐릭터의 집에 놀러 온 콘셉트로 아트 디렉팅을 진행했다.
굿즈숍 매장은 원래 펍이었다. 2016년 펍 오픈을 준비하던 남자 친구가 아트 디렉팅을 제안해 구석구석에 그의 일러스트를 녹여냈다. 화보 촬영 장소로 대여하는 등 펍은 공간으로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 그는 브랜드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상품 제작에도 관심을 가졌다. 종이에 머무르던 그림을 제품에 입혔을 때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펍은 2017년 8월 굿즈숍으로 탈바꿈했다.

“그림만 그리다 갑자기 운영까지 하려니 배워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이 작은 브랜드 안에서도 경영이 필요한데, 저는 경영과는 거리가 멀었거든요. 수량이나 제작비 면에서 신중한 계산이 필요했고, 복잡한 제작 과정을 체크하다 신경이 곤두설 때도 많았어요. 그래서 주변에 자문도 구하고, 관련 서적을 읽으며 공부했습니다.”

초창기 굿즈는 포스터, 엽서 등 지류 상품에 그쳤다. 시그니처 제품을 고민하던 중 일기 쓰는 습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6공 다이어리’인 이공 다이어리를 제작했다. 6공 바인더 다이어리는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인기를 끈 제품으로, 3년 전부터 다시 유행 중이다.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해 ‘다꾸(다이어리 꾸미기)’족에게 인기가 높다. 지금은 브랜드를 대표하는 제품이지만 쉽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공 다이어리 시리즈.
“제작 당시엔 이미 유행이 지나서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었어요. 제작 공정을 잘 모르는 상태로 제작에 들어갔고, 바인더 500개 중 200개가 불량일 정도로 불량률이 높았습니다. 속지를 직접 제작했는데, 일손이 너무 부족해 할머니께서도 종이를 뚫고 포장하는 것을 도와주실 정도였어요. 지금 판매하는 다이어리는 실패를 경험 삼아 새롭게 제작한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나온 다이어리는 이제 세대 화합의 장이 됐다.

“어렸을 적 6공 다이어리를 사용한 이들은 과거를 회상하고, 10대 손님들은 처음 만나는 다이어리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죠. 저희 슬로건(Remember your girlhood)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주저하지 않고 도전하기


올해 1월엔 SLD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스튜디오에서 네 명의 직원과 함께 일러스트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정리하고 세계관을 구체화해, ‘레빗 걸(Rabbit girl)’과 ‘체리 파이(Cherry Pie)’를 탄생시켰다. 6개월 전부터는 유튜브를 통해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소통을 늘려가고 있다.

알아채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매장 외부와 내부의 핑크 컬러는 서로 다르다. 외부는 햇빛이 닿았을 때 아름답게 빛날 색을, 내부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만큼 차분한 색을 쓰고 싶었다. ‘예민한 컬러라 재밌다’는 핑크의 속성과 작업할 때의 그가 어딘지 닮았다.

올해 그의 다짐은 새로운 도전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부산에서 ‘1인 창작자가 브랜드를 만드는 과정’을 주제로 처음으로 강연도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아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이 창작의 큰 에너지가 된다고 말한다.

“까마득한 옛날이 아닌 바로 어제나 1분 전의 모습도 어린 시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나보다 어설펐던 모습을 사랑하고 격려하는 그림들을 계속 그려나가고 싶습니다.”
  • 2019년 05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01906

201906

구독신청
낱권구매
전체기사

event2019.05

event
event 신청하기
영월에서 한달살기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