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비가 배우 정지훈이 될 때

글 : 유슬기 기자  / 사진제공 : 레인컴퍼니 

2002년 ‘나쁜 남자’로 데뷔한 비는 이후 ‘안녕이란 말 대신’ ‘태양을 피하는 방법’ 등을 내놓으며 혼자서도 무대를 가득 채우는 ‘퍼포머(performer)’로 우뚝 섰다. 이 앨범을 프로듀싱한 JYP 대표 박진영은 “처음 만났을 때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지훈이 모습이 기억난다. 눈빛이 약간 굶어 죽기 직전의 사자 같았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그의 상황이 그랬다. 가정 형편이 나빠지면서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해외로 나갔고, 노점을 하던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무너졌다.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그가 성공하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그에게 지금도 깊은 슬픔으로 남아 있다. “세상 일이 자기 뜻대로 안 풀리고 몰라주니 시니컬해진 느낌. 그런데도 자존심은 포기할 수 없는 복합적인 눈빛”으로 기억했던 박진영의 말처럼 비의 무대는 굉장히 세고 강렬한데, 어딘가 모르게 슬픈 느낌을 안고 있었다.

그는 예능을 할 때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데뷔 당시 유행하던 연애 프로그램이나, 체력을 과시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도 그는 웬만하면 ‘최후의 1인’으로 살아남았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승부욕 그리고 그걸 뒷받침해주는 체력과 정신력은 2000년대 초반 그를 독보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그리고 2003년, 그는 뜻밖에 연기에 도전한다. 〈상두야, 학교 가자〉라는 제목의 드라마였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그리고 훗날 비와 재회한 〈이 죽일 놈의 사랑〉을 쓴 이경희 작가의 작품으로, 비가 맡은 차상두는 사기꾼에 전과범, 미혼부로 인생 막장을 살지만 순정과 의리를 지닌 맑은 인물이었다.

“당시만 해도 가수가 연기를 하는 데 거부감이 많았어요. 주변에서 모두가 반대했죠. 저는 꼭 하고 싶었어요. 학창 시절에도 연극을 전공했고, 무대를 올려본 경험도 있었으니까요. 드라마 시놉시스를 읽고 제가 밀어붙였어요.”


순박하고 순수한 인물, 엄복동


비슷한 상황이 15년 후에도 반복됐다. 〈자전차왕 엄복동〉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끌리는 작품이라 하고 싶었다.

비는 데뷔 3년 만에 아시아 투어, 월드 투어를 성공리에 마친 월드 스타가 됐고, 한국에서 첫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해외 첫 영화는 워쇼스키 감독의 〈스피드 레이서〉였다. 2009년에는 영화 〈닌자 어쌔신〉으로 할리우드 단독 주연을 맡기도 했다. 그를 둘러싼 파이는 커졌지만 마음은 여전했다.

“가수와 배우를 병행하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요. 영화의 경우 적어도 6개월에서 1년은 시간을 내야 하는데, 앨범 내고 공연하다 보면 그런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죠. 그래서 타이밍 맞는 작품을 인연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처음 〈자전차왕 엄복동〉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우뢰매〉 같은 가족 히어로물인 줄 알았다. 그조차도 ‘엄복동’이라는 인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오직 자전차 하나로 조선인의 마음에 긍지와 희망을 심어준 인물이 있었다는 게 가슴 뛰었다. 할리우드 오디션도 포기하고 그는 엄복동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엄복동이 왜 자전거를 탈까, 고민했어요. 그는 신념을 위해 타는 것 같진 않았어요. 복동은 자전거를 타는 순간 ‘신바람’이 나니까 달렸죠. 나중에 그가 소중한 사람을 위해 경주에 나서는 것도, 그만큼 순박하고 순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복동은 어깨 위에 커다란 물짐을 지고 장터를 누비면서도 인상 한번 쓰지 않고 동생과 아버지를 돌보는 사람 좋은 사내다. 그가 자전차 왕이 되어가는 과정은, 드라마틱하기보다 일종의 소동극 같다.

“그를 위인이나 영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 태극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 스포츠맨이라고 생각했죠.”

몸 쓰는 일에 정지훈을 따라올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작품을 준비하면서 6개월 동안 매일 트랙 60바퀴를 돌았다. 그는 지구를 반 바퀴 정도는 돈 것 같다고 말했다. 선수촌에서 페달을 굴리다 보면, 함께 달리던 이들이 구토를 하거나 지쳐 나가떨어지곤 했다. 몸이 힘든 건 견딜 수 있었다. 〈자전차왕 엄복동〉은 개봉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제작진이 교체되는가 하면,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제작자이자 출연자이기도 했던 배우 이범수는 “지훈이가 아니었다면, 영화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의 앞날이 어찌 될지 모르는 날들에도 그는 묵묵히 페달을 굴렸다.

“일종의 승부욕이었던 것 같아요. 저한테는 승부욕이 책임감이에요. 한번 시작한 일을 중간에 멈출 수는 없죠. 저희에게는 영화가 무사히 개봉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책임감이라는 승부욕


영화는 개봉 후에도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엄복동이라는 인물이 가진 명과 암이 세상에 알려졌고, 영화가 지닌 메시지를 놓고도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개봉 2주 차인 현재, 영화 관람객은 16만 명을 넘겼다. 손익분기점인 400만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매를 맞아야 한다면 맞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걸 피하려고 하다 보면 일이 더 커지거든요. 우리의 부족함이 있었다면, 그 부족함을 인정해야죠.”

한국에서는 〈알투비:리턴투베이스〉 이후 7년 만이다. 7년 만의 영화로 취재진과 만나는 자리인데 테이블에서는 가시 돋친 말들도 오간다. 영화를 연출한 감독도, 기획한 제작자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상황인데 그는 오히려 피하지 않고 인터뷰에 응한다.

“20년 동안 일하면서 어떨 때는 ‘학교 종이 땡땡땡’만 불러도 박수 받는 날이 있었고, 최선을 다해도 매를 맞아야 하는 때가 있었어요.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라요. 제가 견딜 수 없는 건 더 노력할 수 있었는데 노력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들이에요.”

그는 현재 레인컴퍼니라는 기획사도 운영 중이다. 신인 발굴과 앨범 제작도 겸하고 있다. 작년에는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더 유닛〉이라는 프로그램에도 멘토로 출연했다.

“세상에서 버려진 것 같은 순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잘 되지 않는 친구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 친구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요. 여전히 ‘소중한 존재’라고 말해주고 싶고요. 저한테 진영이 형이 그랬던 것처럼요.”

찬란한 정상에 있을 때나, 뼈아픈 실패를 겪을 때나 정지훈은 ‘버틸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계속 페달을 밟으면 언젠가는 ‘이 시간도 지나간다’고 말이다. 어린 비는 어머니를 지키지 못해 속울음을 삼켜야 했지만, 어른이 된 정지훈은 지켜야 할 식구들을 잘 지키고 싶다.

“어렸을 때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소중함이 더한 것 같아요. 가족을 건드리면 정말 못 참아요. 밖에선 배우고 가수지만, 집에 들어가서 신발을 벗는 순간 저는 그냥 남편이고 아빠예요. 곧 알리고 싶은 좋은 소식도 있고요. 지금은 스스로에게 ‘그동안 수고 많았다. 이제 좀 대충 살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근데… 그게 될까요?(웃음)”

그에게 찾아온 ‘좋은 소식’은 아내인 배우 김태희와 사이에서 둘째를 임신했다는 소식이다. 말 많고 탈 많은 시기를 지나면서도, 그가 여전히 웃을 수 있는 건 ‘후회 없이 노력한 자’만의 자신감이 있어서다. 불리한 상황에도 물러서지 않는 그는 여전히 사자처럼 보인다. 굶주린 어린 사자 심바가 아닌, 사바나를 지키는 ‘무파사’ 말이다.
  • 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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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Rainshine   ( 2019-04-04 ) 찬성 : 0 반대 : 0
앞으로도 좋은 일들이 많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래요 둘째 아가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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