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을 바꿀 영화 〈17〉 〈아이, 토냐(I, TONYA)〉

그렇다면 당신은, 의미 있게 살고 있습니까

세계 최고 권위의 노벨문학상은 1901년 시작됐다. 100년이 넘는 노벨문학상의 연혁에서 몇몇 오점이 남아있으니, 그중 하나가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문호를 실수로(?) 수상자 명단에서 빠뜨린 점이다.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 1828~1910)가 대표적인 경우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입을 전후한 러시아 사회의 풍경을 6년에 걸쳐 집필한 《전쟁과 평화》(1864∼1869), 러시아 민담을 개작한 〈바보 이반〉(1886), 죽음의 문제를 파고든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 외에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1885), 《부활》(1899) 등 그의 작품은 당대 사회의 모습을 탁월하게 형상화함으로써 ‘제정(帝政) 러시아 사회의 저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필자는 톨스토이 문학의 정점을 《안나 카레니나》로 본다. 작품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절감이 들 정도였다. 사회의 편견에 허덕이다 목숨까지 던지는 안나와 매력적이나 공허한 브론스키의 격정적 러브 스토리만으로도 훌륭한 연애소설이지만, 이 커플과 병치되는 청렴한 지주 레빈과 키티 사이의 사랑 이야기는 남녀 관계에 ‘영혼의 친화성’이 얼마나 소중한 요소인지를 피부 깊숙이 느끼게 만들었다.

영국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 2012)가 개봉했을 땐 부하 팀원 둘의 티켓까지 자비로 구입해 단체 관람(?)을 했다. 〈오만과 편견〉(Pride & Prejudice, 2005), 〈어톤먼트〉(Atonement, 2007) 같은 완성도 높은 드라마는 물론 〈한나〉(Hanna, 2011)류의 액션 스릴러도 찍은 실력파 조 라이트(Joe Wright) 감독이라 두근거리며 자리를 잡았었는데, 막상 필름이 돌기 시작하자 기대 이하의 연출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귀족 부인 안나 역을 〈비긴 어게인〉(Begin Again, 2013)의 키라 나이틀리가 맡았는데, 깊고 복잡 미묘한 캐릭터를 감당해내기엔 속수무책이었다. 비록 평면적 연기였지만 70년 전 흑백영화 〈안나 카레니나〉의 비비언 리가 차라리 낫겠다 싶을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 1935년 그레타 가르보 이후 1948년 비비언 리, 1997년 소피 마르소, 2012년 키라 나이틀리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나이로나 경력으로나 인생의 최전성기에 호기롭게 도전했지만, 톨스토이 원작이 그려낸 안나 카레니나에는 모두 족탈불급(足脫不及)이었던 셈이다.

영화 소개 지면에서 필자가 구구절절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언급하는 것은 작중 안나의 삶이, 전혀 다른 시대에 전혀 다른 인생을 산 〈아이, 토냐〉(I, Tonya, 감독 크레이그 질레스피, 2017)에서 묘사된 피겨스케이팅 선수 토냐 하딩의 인생 궤적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입부로 인정되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불행하다”(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가 토냐 하딩의 실제 삶에 딱 들어맞는다.


피겨스케이팅 선수 토냐 하딩의 실화


1994년 미국을 뒤흔들어놓는 사건이 터진다. 시합을 목전에 두고 맹훈련 중인 피겨스케이팅 올림픽 기대주 낸시 케리건을 한 괴한이 습격, 무릎을 박살 낸 것이다. 매스컴이 연일 도배를 하고 미국 스포츠계가 발칵 뒤집혔다.

곧 케리건의 강력한 라이벌이던 토냐 하딩(마고 로비)과 그녀의 남편 제프 길롤리(서배스천 스탠)가 범인으로 지목된다. 토냐는 제프와 그의 친구 션이 꾸민 짓이며 자신은 전혀 아는 바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제프와 션은 교도소에 수감되고, 평소 토냐를 달가워하지 않던 미국 빙상연맹은 영구 제명 처분을 내린다. 영화는 그 과정과 이후 스케이터로 재기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토냐의 분투와 그 좌절에 따른 분루(憤淚)를 짜임새 있고 리드미컬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투 트랙(two-track)으로 진행된다. 그녀의 어린 시절 이후 성장 과정을 극화한 내용이 주된 축을 형성하고, 다른 한편 토냐 하딩과 주변 인물들의 실제 인터뷰가 또 다른 축을 이룬다. 이 두 축은 서로를 견인하기도 하지만, 결정적 어긋남을 통해 강도 높은 긴장감을 빚어내기도 한다.

“직설적이고 반박의 여지가 가득한 토냐 하딩과 제프 길롤리의 실제 인터뷰를 바탕으로 했다”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엔 토냐, 제프, 션 그리고 토냐의 어머니 라보나(앨리슨 제니)와 코치 다이앤의 인터뷰와 회상 장면이 수시로 등장한다. 한데 동일 사건을 둘러싼 이들의 진술은 서로 전혀 일치하지 않고, 영화는 그 어긋남을 포착하고 강조한다.

토냐 하딩의 실제 이야기이므로 영화의 중심엔 당연히 배우 인생 최고의 연기를 펼친 마고 로비가 자리 잡고 있지만, 간간이 등장하면서도 러닝타임 120분 내내 관객의 머리 한쪽을 차지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토냐의 엄마 라보나 역을 맡은 앨리슨 제니다. 그 엄마는 ‘세상에 저런 생모가 다 있나’ 싶은, 차라리 없는 게 나을 엄마다. 딸의 행복한 인생을 위해 딸의 노력을 권고하는 여느 엄마들과 달리 라보나는 본인의 경제적 수익, 즉 돈벌이를 위해 딸의 노력을 ‘강요’한다. 거의 ‘사육(飼育)’ 수준이다.

어린 딸이 함께 아이스링크에서 피겨스케이팅을 배우는 친구와 얘기를 나누자 엄마는 담배를 꼬나문 채 소리 지른다. “그 아이랑 말 섞지 마. 걘 너의 적이야.” 돈이 되는 일 앞에선 자식의 난처함과 곤경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이 싱글맘 ‘냉혈모(冷血母)’가 빙판에서 수시로 엉덩방아를 찧는 딸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넌 너무 나약해 빠졌어. 넌 할 수 없어”다.

심지어 손찌검도 서슴지 않는다. 나아가 “난 널 챔피언으로 키웠어”라며 자신의 아동학대를 정당화하는 지경이다. 딸을 챔피언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엄마의 캐릭터를 다이내믹하게 소화한 앨리슨 제니는 제90회 아카데미와 제75회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조연상을 거머쥐는 등 주요 영화상을 휩쓸었다. 그녀는 “이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여성들을 대변한다”는 수상 소감을 밝혀 많은 여성의 공감과 지지를 얻기도 했다. 이를 받아 뉴욕 포스트는 “〈아이, 토냐〉는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이야기”라는 영화평을 남겼다.

엄마의 잔영이 워낙 강하기 때문일까, 영화 중반부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링크로 나아가는 토냐 하딩의 당당한 모습에 “‘넌 할 수 없어’란 말만 들으며 자랐지만, 혹시 알아? 나도 뭔가 할 수 있을지”라는 독백이 깔릴 때 이 블랙코미디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독특한 종류의 ‘감정이입’을 가능케 한다.


《안나 카레니나》와 〈아이, 토냐〉의 공통점

소설 《안나 카레니나》와 영화 〈아이, 토냐〉는 이렇듯 ‘치밀하게 계산된 플롯’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영화 120분을 매끄럽게 교직(交織)하는 것도, 한글 번역서로 3권 분량이 나오는 엄청난 길이의 장편소설을 마치 직소 퍼즐을 맞추듯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것도, 웬만한 내공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안나 카레닌과 토냐 하딩은 또한 남편의 폭력에 시달린다는 공통점도 있다. 물론 안나의 경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폭력이다. 그러나 아내의 이혼 요구를 사회적 체면 때문에 깔아뭉개고 엄마와 어린 아들을 떼어놓는 카레닌 백작의 폭력은 더 집요하고 주도면밀하며 치명적이다. 토냐 하딩은 남편의 폭력 앞에서 아예 무방비다. 유일한 혈육인 엄마의 온전하고 따뜻한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그녀이기에 이는 더욱 비극적이다.

특히 그녀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은 낸시 케리건 피습 사건이, 그녀가 가장 의지하고 사랑했던 남편과 그 친구의 음모였다는 사실은 어디에서도 사랑받지 못한 토냐 하딩의 지독히 외로운 삶을 여실히 드러낸다.

두 여성은 각자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남편의 이혼 거부와 모자 접촉 방해로 살던 집을 나온 안나는 브론스키의 아이까지 낳으면서 러시아 상류 사교계에서 완벽히 배제된다. 하딩 또한 전술한 대로 본인의 전 인생이 투여된 빙상계에서 제명된다.

무엇보다 둘의 가장 큰 공통점은 불합리한 사회적 편견으로 인생이 결딴났다는 점이다. 사실 안나 카레닌의 죄(?)를 억지로 찾아내자면 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한 거밖에 없다. 토냐의 경우는 안나와 달리 사회적 약자 출신이다. 표독한 엄마는 스리잡(three job)을 뛰면서 토냐를 스케이팅 국가대표로 키워낸다. 낸시 케리건보다 기량 면에서 뛰어난 토냐 하딩이 등수에서 케리건에게 밀린 것은 그녀 스스로 묘사한 대로 ‘레드넥(redneck)’, 즉 시골 촌뜨기 하층계급이었기 때문이다.

피겨스케이팅만이 시궁창 같은 현실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토냐를 미국 빙상연맹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녀가 가진 개성 넘치고 자유분방한 이미지가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종목에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이혼한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는 이유로 미국을 대표할 자격이 없다며 대놓고 부당한 점수를 주었다. 언론조차 그녀를 ‘Trashy Tonya(쓰레기 토냐)’라 표현했다.

하층계급 출신의 토냐 하딩은 미국 사회가 원하는 ‘건전한 가족’의 이미지를 전달할 수 없었다. 제프의 폭력으로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토냐가 남편에게 돌아가는 이유는 빙상연맹이 ‘가정 안의 토냐’를 원했기 때문이다.

구글에서 ‘토냐 하딩’ 항목을 찾으면 “닉네임- Bad Girl(나쁜 년)”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누구나 각자의 진실을 갖고 있다(Everyone has their own truth)”는 뼈 있는 말을 남긴 그녀야말로 세상이 열광하고, 세상이 단칼에 내던진 인물이다. 영화는 그 변덕과 비정(非情)에 아프게 메스를 댄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안나 카레니나는 충분히 불행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그들은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고 있는가?” 영화 〈아이, 토냐〉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수분에 걸쳐 마고 로비의 얼굴을 고정 숏으로 잡은 신이다.

케리건 피습으로 미국 전체의 조롱거리가 된 토냐가 1994년 올림픽에 출전하기 직전, 대기실의 거울 앞에 앉아, 빈한(貧寒) 탓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직접 화장을 하며 무대 피날레의 표정을 연습해보는 그 장면. 관중의 경멸에 찬 시선과 야유를 견뎌야 하는 경기장 입장을 앞두고 거울에 비친 비참한 몰골로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애써 웃어 보이는, 그 소리 없는 오열. 불안과 초조, 그리고 두려움과 외로움이, 떡칠이 된 얼굴만큼이나 뒤범벅으로 섞여 있는 그 얼굴.

그 잊기 힘든 표정은 이렇게 묻고 있다.

“나 토냐는 충분히 불행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은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고 있는가?”

Scene in English 명대사 한 장면

낸시 케리건 피습 사건으로 토냐 하딩의 남편 제프 길롤리와 그의 친구 션이 수감되자 미국 빙상연맹은 토냐에게 영구 제명 처분을 내린다.
이에 그녀는 스케이팅이 인생의 전부라면서 재판부의 선처를 호소한다.



토냐 하딩 : 제가 한 일이라곤 기소를 방해한 것뿐입니다. 다시는 스케이트를 타지 못하게 만들겠다고요? 차라리 감옥 생활을 하는 게 낫겠습니다. 제발, 연맹은 18개월 출전 정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18개월입니다. 재판장님, 저는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아는 거라곤 스케이팅뿐입니다. 그게 제가 아는 전부라고요. 스케이트를 타지 못한다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Tonya Harding: All I did was the hindering of prosecution. What, you're never gonna let me skate again? I mean, I'd rather do the jail time. Please, they only got eighteen months. They got eighteen months, I'll do that. Your honour, I don't have an education. All I know is skating. That's all I know. I am no one if I can't skate.

(흐느끼기 시작한다.)

토냐 하딩 : 저는 그 어떤 괴물도 아닙니다. 저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요. 스케이트를 못 하게 한다면 그건 제게 종신형을 선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지 말아주세요.
Tonya Harding: I mean, I'm not some monster. I'm trying to do my best. It's like you're giving me a life sentence if you do that, you can't do that.
  • 2019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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