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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영화 거장 허우샤오시엔 감독

내 상상력의 원천은 무협 소설

사진제공 : 이준희(JUNIBAUM), 영화사 진진
허우샤오시엔(侯孝賢, 69) 감독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형과 함께 무협 소설을 즐겨 읽었다. 동네 도서 대여점에서 무협 소설을 한 질씩 통째로 빌려 오는 역할을 도맡았다. 형이 책을 읽는 속도를 따라가느라 그의 눈도 활자를 급히 좇았다. 중학생 시절엔 홍콩에서 건너온 무협 영화를 봤다. 대학교 때까지 그는 《자객열전》과 같은 무협 소설을 읽었다. 허우 감독은 “소설 속의 무협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허구였지만 불의를 무찌르는 정의로운 세계라는 점에 끌렸던 것 같다”고 했다.

대만 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허우 감독이 8년 만에 최근 내놓은 건 당대(唐代)를 배경으로 한 무협 영화 〈자객 섭은낭〉이다. 〈비정성시〉 〈동년왕사〉 등 근현대 대만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찍어온 그가 근대 이전의 중국을 카메라에 담은 것도, 무협이란 장르를 택한 것도 처음이다. 개봉을 앞두고 방한한 허우 감독을 지난 1월 27일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만났다. 그는 헐렁한 점퍼에 야구 모자 차림이었다.


‘숨어서 듣는’ 여자 자객 이야기

영화 〈자객 섭은낭〉.
그는 “대학 다닐 때 《전기》(당대의 기이한 이야기를 모아 엮은 단편소설집)를 많이 읽었고, 언젠가 꼭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무협 영화와 비슷한 것을 만들기는 싫었다”고 했다. 이 영화도 《전기》의 〈섭은낭〉 편에서 영감을 얻었다. 섭은낭(서기)은 고위 관료의 딸로 태어나, 훗날 지방 절도사가 되는 정계안(장첸)과 정혼을 한다. 하지만 정계안은 어머니의 야망 때문에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섭은낭은 부패한 관리를 살해하는 암살자로 키워진다. 하지만 원한이나 욕망이 없는 섭은낭은 누구든 일격에 제압할 수 있는 무공을 지니고도 끊임없이 망설인다.

첫 암살 임무에서 아들과 놀고 있는 암살 대상을 차마 죽이지 못한 섭은낭에게 사부는 정계안을 죽이라고 명한다. 섭은낭은 옛 정인(情人)에 대한 감정과 자객으로서의 본분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는 “무엇보다 〈섭은낭(攝隱娘)〉이라는 제목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섭(攝)’은 귀 이(耳) 자 세 개가 모여 있는 모양이고, ‘은(隱)’은 은신하다, ‘낭(娘)’은 젊은 여자를 뜻한다. 숨어서 듣고 있는 여자라는 제목이 흥미로웠다. 섭은낭이라는 자객이 소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때가 됐을 때 단번에 달려가서 살해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고 했다.

“과연 무슨 이유를 가지고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를 말하고 싶었어요. 사람이 사람을 죽일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정치나 이념을 위해서 사람을 죽여도 된다고요? 아닙니다. 가당치 않은 일이죠.”


무협 영화이지만,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현란한 칼 솜씨를 겨루거나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검객들을 〈자객 섭은낭〉에서는 찾기 힘들다. 대상을 한 발짝 떨어져서 오랫동안 응시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허우 감독의 전작들에서 익숙하게 봤던 것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대만 금마장영화제에서 감독상, 작품상 등 다섯 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피웅’하고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거, 저는 못하겠어요. 중력의 법칙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뭐든지 다 가능하다면, 그러니까 아무런 제한이 없고 현실성도 없다면 표현의 자유가 없어집니다. 제한이 있어야 그 안에서 가장 많은 걸, 가장 좋은 걸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니까요.”

액션과 특수효과 대신에 산수화와도 같은 절경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오염되지 않은 내몽골 지역, 허베이 성의 우당 산과 다지우 호수에서 촬영을 했다. 하지만 그 모습 자체도 조명 없이, 자연의 민낯을 소박하게 담아냈다. 배우들의 연기도 바람이나 물결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섭은낭의 대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허우 감독은 “내 눈에 보이는 대상의 특별한 점에 집중해 선택한다.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담아내고,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 “배우들에게 요구하기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서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서기는 〈밀레니엄 맘보〉 〈쓰리 타임즈〉 등으로 이미 허우 감독의 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서기에겐 천부적인 직감 같은 게 있어요. 칸 영화제 60주년 개막식 때 30대 초반이었던 서기가 100세의 감독과 사회를 봤습니다. 그 자리에 설 여배우로 왜 서기를 골랐겠어요. 대담하고 안정적이고, 스태프 중 그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친절하기도 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압도하지만 기죽이지 않아요. 이런 성격을 타고난 사람은 정말 드물죠.”


〈비정성시〉로 세계적 영화감독 반열에


〈자객 섭은낭〉은 원작이 있지만, 영화를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긴 시간을 들여 그 시대에 대한 많은 기록과 해설들을 읽었다. 사마광의 역사서 《자치통감》의 도움이 컸다. 전계안이나 그의 어머니인 야심가 가성공주 같은 인물들은 실제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소설에 담기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참고하며 인물들의 성격을 파악하고 시나리오에 반영했다. 그는 “상상력은 영화가 아니라 책에서 나온다”며 “내가 예전에 〈해상화〉란 영화에 담은 수백년 전의 중국은 내가 읽었던 모든 책들로부터 상상하고 이해한 중국이다. 이렇게 내가 상상한 중국은 아마도 진짜 중국과 완전히 다를 것이다”라고 했다.

허우 감독은 ‘세계관’이란 단어를 종종 언급했다. 그는 세계관이라는 것이 대단히 복잡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일상 도처에 널려 있는 것, 예를 들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나 국가와 개인의 관계 등 실생활에서 접하는 것들이 모두 자신만의 세계관을 형성한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읽었던 소설들이 내 세계관 형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영화를 통해 리얼리즘을 강조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죠. 섭은낭이 장검이 아닌 단도를 사용하는 것처럼.”

1947년 중국 광둥 성에서 태어난 허우 감독은 이듬해 일가가 대만으로 이주해 어린 시절을 대만에서 보냈다. 대만 국립예술아카데미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80년대 〈펑꾸이에서 온 소년〉 〈동동의 여름방학〉 〈동년왕사〉 등을 연출하며 대만의 뉴웨이브를 이끄는 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다.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양조위가 주연한 영화 〈비정성시〉(1989)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면서 아시아의 거장으로 자리 잡았다. 개인의 이야기를 현미경으로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대만 사회나 역사를 망원경으로 조망해내는 게 그의 특기이다. 중국과 대만의 양안 관계가 화제가 될 때마다 그의 작품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허우 감독은 “여전히 대만 역사를 다룬 영화를 찍고 싶지만 그런 민감한 영화에는 투자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최근에 제작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대화를 나눠보면 나와 견해가 다르더라. 나는 역사적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시대와 떨어져서 표현하길 원한다”고 했다.

허우 감독은 금마장과 타이베이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8년간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는 “8년 동안 영화를 안 찍고 싶었겠나. 영화제 일을 맡으면서 구조부터 다 바꾸느라…. 그게 내 문제다”라고 했다. 부산국제영화제도 자주 찾았던 그는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 사이먼 필 전(前) 로테르담 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영화인들과 타이거 클럽을 결성했다. 술을 많이 마시는 친목 모임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회고전을 연 소감을 묻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늙었단 얘기지, 뭐.”
  • 2016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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