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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강추! 벨기에

벨기에라는 나라는 와플과 맥주가 유명한 나라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독일이라는 세계적인 강대국 사이에 위치해 있고(나폴레옹의 패배로 유명한 ‘워털루 전쟁’의 워털루도 벨기에에 속한 지역입니다), 대한민국보다 작은 영토와 1000만 정도의 인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 정치적 무정부 상태가 장기화되면서 ‘무정부 세계 신기록’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갖고 있기도 하며, 인접국가에 비해 여행객의 관심도가 낮은 국가이기도 합니다. ‘아, 그 축구 잘하는 나라?’ 정도의 인식만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년 전, 벨기에에 다녀왔습니다. 수도인 브뤼셀을 등지고 ‘브뤼주, 브루게, 브루헤’ 등으로 불리는 ‘Brugge’라는 지역을 곧장 찾아갔습니다. 오후 8시 기차역에 도착해서 숙소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지만 이미 차는 끊긴 상태였고 길가의 가로등만 껌뻑일 뿐, 마치 암전된 무대처럼 도시는 조용했습니다. 하릴없이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한 시간 남짓 걷다 보니 예약해둔 호스텔이 나타났습니다. 방은 남녀 공용이었고 남녀 공용이어서 남녀 공용? 남녀 공용이라니 으헤헤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침대에 누워 나를 꿈뻑꿈뻑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 눈이 말하는 걸 읽었고, 우린 모두 친구니까 조용히 그 방을 나가주었습니다. 그래 여기는 서양이야. 원래 서양은 그런 거야. 서양이 왜 서양이야, 서양이니까 서양이지 하며 1층에 있는 바로 내려갔습니다.

바텐더 앞에 앉아 최대한 자연스럽게 맥주를 한 잔 시켜놓고 기다리는데 옆에 서양 남자 두 명이 앉습니다. 한 명은 뚱뚱하고 한 명은 홀쭉했는데, 둘 다 팔에는 문신이 있었고, 홀쭉이는 입술에 피어싱을 했더군요.

‘무섭지만 무섭지 않다. 태권도가 2단이고 내 주머니엔 유사시 사용할 호신용 후추도 들었다.’

그 순간,

“너 어디서 왔냐? 새꺄?(같이 들렸음)”

“아, 나는 한국에서 왔어.”

“오, 새끼, 난 폴란드 사람이다. 너 재키찬 아냐? (재키찬의 동작을 따라 하며) 나 걔 좋아해.”

“재키찬은 한국인이 아냐, 중국인이지.”

“이런 씨X! 그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뒤돌려차기를 하는 척하며 후추를 꺼내면 자연스럽겠지. 무섭다. 깡패가 분명해. 어떡하면 좋지.’ 하지만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뭔가 좋은 방향으로 대화를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홀쭉이의 휴대폰을 발견하곤,

“와우, 너 휴대폰 샘성 쓰는구나?”

“씨X, 맞어 애니콜 예.”

“와우, 샘성이즈 코리아 브랜드야.”

“이런 개X씨X. 그건 나한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안되겠다. 후추를 쓰자. 후추를 쓰고 서양이고 나발이고 방으로 튀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홀쭉이가 말합니다.

“야, 너 술 더 마실 거냐?”

“아니 난 술을 잘 못해.”

“XX. 야, 그럼 일어나.”

“왜?”

“여자랑 자러 가자! 예!!” “(뚱뚱이도) 예! 여자! 여자!”


따라가지 않으면 맞을 것 같아서 슬금슬금 일어나 같이 문을 나서는데 그 앞에 묶여 있던 시베리안 허스키에게 홀쭉이가 급 관심을 보이더니 갑자기 그 개와 뒹굴기 시작합니다.

‘미쳤어.’

그들이 개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틈을 타 다시 바 안으로 들어가 계산을 하고 방으로 올라가려던 차에 저쪽 구석 테이블에 김치가 있는 걸 발견합니다. ‘한국 사람이구나.’ 다가가서 물어보니 한국 사람이 맞습니다. 한국 여자 둘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반가운 마음에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한 명은 작은 누나, 한 명은 큰 누나 정도의 터울이었고, 타지에서 만난 반가움과 벨기에에서 만난 폴란드 깡패를 벗어난 기쁨에 한자리에서 세 시간 남짓 수다를 떨었습니다. 한창 이야기를 하다가 전직 인터뷰어라는 큰 누나가

“정민이 넌 배우 하지 마. 니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라고 말했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배우를 하지 말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나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나란 사람은 그다지 감정에 솔직하지 않았고, 반칙도 많이 했고, 잘 꾸며냈고, 에둘러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기에 고민이 많았었죠. 그리고 그 사람은 두세 시간 만에 그것을 파악해서 직언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때 그 직언이 그때의 박정민을 어느 정도 무너뜨린 것도 같습니다. 덕분에 변했고, 덕분에 반칙을 덜 하게 되었달까요.

아직도 그 벨기에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힘들 때만 찾는 누나라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 누나에게만큼은 그 누구보다 솔직해질 수 있어서 아직도 그 인연을 벨기에의 선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근데 갑자기 왜 벨기에 타령이냐. 글쎄요. 더위가 물러가는 이 시즌에, 여행을 계획하는 분이 있다면 추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마을 중간에는 운하가 흐르고 그 옆으로는 풍차가 줄줄이 서 있습니다. 건물이 낮아 하늘이 더 높고, 길에는 아스팔트 대신 박석이 깔려 있습니다(박석이라 함은 말이 다니기 편하게 깔아놓은 얇고 네모난 돌입니다). 그래서 동이 트는 새벽에 창 밖에서는 다그닥다그닥 말의 편자와 박석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소리에 일어나서 마을 중심에 위치한 우체국으로 가 한국으로 편지 한 통을 보냈고, 빌어먹을 같은 방 커플이 수건을 훔쳐 가서 어쩔 수 없이 찾아간 한적한 수건 가게에서 주인 할머니에게 체크무늬 수건을 한 장 샀습니다. 숙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운하와 풍차 사이로 난 자전거 도로를 달렸고, 실수로 잃어버린 조끼를 뒤따라오던 벨기에 아저씨가 찾아주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들른 역시나 한적한 동네의 한 빵집에서 산 빵은 아직까지 인생 최고의 빵이었고, 그날 저녁 두 누나와 마신 마지막 맥주는 뭐 그다지 맛은 없었지만 의미 있는 자리였습니다.

여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별 기대 없이 갔던 벨기에는 내게 큰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그저 피파 랭킹 5위, 지구 최강 센터백 콤파니의 나라 외에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이 가을, 여행 계획이 있다면 벨기에도 좋을 것 같네요. 단 하나, 폴란드 깡패만 조심하시면 되겠습니다.

박정민은 영화 <신촌좀비만화> <들개> <전설의 주먹> <파수꾼>, 연극 〈G코드의 탈출〉 <키사라기 미키짱>, 드라마 <너희들은 포위됐다> <사춘기 메들리>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언희(言喜)’는 말로 기쁘게 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 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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