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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박판식 <공(球)>

견딜 만한 불행을 담고 굴러다니는 알들

나는 흰 빗자루를 들고 있다
성장하려는 고양이의 옆구리를 간질여
작은 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괴롭히고 있다
슬리퍼와 고아는 뒤축이 닳고
점박이 돌인 줄 알고 주웠던 알은 이불 속에서
자극을 주어도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않는다
불안은 순결한 목소리로 숲 비둘기 흉내를 낸다
여자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일과를 마친 남자 선생들이 축구를 한다
공은 교실이 있는 어두운 건물로 굴러 들어가고
삼삼오오 모인 여학생이
잠시 공 없이 서 있는 남자 선생 구경을 한다
연못가 시계탑의 조각상은
무엇인가를 버티면서 전신의 힘을 발 끝에 주고 있다
태양과 달이 아무렇게나 공중에 떠 있는 하루
비 그친 옥상에 방치된 새끼 고양이는
파리의 끈질긴 구애를 받고

박판식 시집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민음사, 2013



<공(球)>은 이 비속한 세계를 스쳐가는 한순간의 풍경을 점묘한다. 누군가는 흰 빗자루를 들고 서 있는데, 일을 하는 대신에 집요하게 새끼 고양이를 괴롭히고 있다. “고양이는 아름답고 불필요한 동물”(<우아하게>)이다. 고양이는 잉여의 존재이고, 새끼 고양이의 옆구리를 간질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심심파적으로 벌이는 놀이다. 새끼 고양이와 더불어 뜻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실업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결코 우주의 왕이 아니며, 그저 평범한 잉여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현재’라는 시간에 연루되어 있지만, 그는 경제적 시간, 즉 봉급의 가능성으로 충만한 세계와 무관하다는 암시를 담고 있다. 권태 속의 현존 속에서 새끼 고양이와 더불어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이미 봉급의 가능성을 함유한 세계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의 화자가 서 있는 곳은 여자 고등학교 옥상이다. 그의 눈길이 가 닿은 저 아래 운동장에서는 일과를 끝낸 선생들이 축구를 하고 있고,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구경하고 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나’는 “점박이 돌인 줄 알고 주웠던 알”을 떠올린다. 아마도 알[卵]과 공[球]이 형태적으로 닮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입도, 혀도, 이도, 후두도, 식도도, 위도, 배도, 항문도 없는 알을 두고 “기관 없는 신체”라고 불렀다. 우리는 우리의 양친이 만든 알들이다. “양친은 내게 천진함과 더불어/견딜 만한 불행을 속주머니처럼 내 몸통에다 달아 주었다”(<트로소>). 우리는 천진함과 더불어 견딜 만한 불행을 담고 굴러다니는 알들이다!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않는 알과 운동장에 굴러다니는 공은 둥글고, 둥근 것들은 어디로 굴러갈지 알 수가 없다. 운명이 그렇듯이 둥근 것들은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다. ‘알’과 ‘공’이 아무 생명도 배태하지 않듯이 일체의 생산 활동에서 배제된 채 어슬렁거리는 ‘나’의 생도 그 무엇으로 태어나는데, 결국은 실패하고 말 것이란 암울한 느낌들이 이 시의 배면에 깔려 있다.

‘알’과 ‘공’이 구형이라는 도상학적 측면에서 상호 조응하고 있다면, 옥상에 서 있는 ‘나’와 “무엇인가를 버티면서 전신의 힘을 발끝에 주고” 서 있는 ‘시계탑의 조각상’ 역시 아무 뜻없이 기립(起立)을 유지하기 위해 힘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조응한다. ‘알’과 ‘공’이 초월도 구원도 없는 이 세계를 굴러다닌다면, ‘나’와 ‘시계탑’은 안간힘을 써서 무위의 날들을 견디고 서 있다. ‘나’는 심술궂게도 아무 잘못이 없는 새끼 고양이를 괴롭히는 놀이에 열중했는데, 새끼 고양이는 옥상에서 죽는다. 옥상에 방치된 새끼 고양이의 사체에 파리떼가 엉겨 붙는다. 다른 시편에서 시인은 “고아원의 개들이 우리에게 지껄인다/너희는 이방인이다/슬픔은 진통이고 산통이다, 이상한 종말이다/비와 추위를 견뎌 내고 비참한 꽃이 핀다”(<카프리올>)고 쓴다. 슬픔과 이상한 종말, 비와 추위를 견뎌야만 비참한 꽃이 피는 곳이 이 세계다. 해와 달은 반갈아가며 공중에 떠 있고, 파도는 왔다가 돌아간다. 더러는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벽에 걸린 액자가 신통하게 우리의 미래를 보살펴 줄 테니까요”(<가족사진>)와 같은 황당한 희망과 위로가 떠도는 것도 바로 이 세계다. 무심한 듯 점묘된 새끼 고양이와 개가 어슬렁거리는 이 세계의 범속한 풍경들이 전해주는 것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계가 늘 기쁨이나 보람을 낳는 일에 항상 실패하고 좌절하는 끔찍한 곳이라는 것이다.

계곡에 걸린 다리 난간에 기대어 울어본 적이 있는가? 가난한 집 착한 남자애로 태어나 경찰관이나 하사관을 꿈꾸다가 성인이 되어서는 “사는 데 너무 지쳐서/누가 자신을 벼랑 끝에서 밀어주기만을 바”(<물벌레들의 하루>)랐던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한부류다. “태양과 달이 아무렇게나 공중에 떠 있는 하루”를 견디고 있는 자들인 것이다. 죽고 싶은데 죽지 못하고 비속하고 삭막한 세계를 떠도는 ‘알’과 ‘공’ 같은 무생명의 존재들은 어디에나 있다. 시인은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장을 시집 제목으로 삼았다. ‘나’는 ‘나’에게서조차 배제되고 소외되는데, 그것은 존재가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 채 공회전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문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적을 때 시인은 이미 “대부분의 인생은 이미 마침표를 얻은 법칙들”(<벌거숭이들의 거짓말>)이라는 염세주의에 깊이 빠져 있음을 암시한다. 시인은 이 비속한 세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스푸트니크를 탄 러시아 개가 느꼈을 우주적 공포와 고립감”(<칼라하리, 서북쪽 350km>) 같은 것을 모아서 자신의 염세주의를 완성한다.

<공(球)>의 여자 고등학교 옥상에서 흰 빗자루를 들고 서 있는 시적 화자와 “세계는 왜 나에게 즐겁게 봉사하지 않는가”라고 투덜대는 <결별의 불>에 나오는 시적 화자들은 다 같이 별것 아닌 존재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동일인일 것이다. “슬리퍼와 고아는 뒤축이 닳”는다는 것과 “운명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도 한사람이다. “행복이란 나로 태어나 나를 하나씩 벗어던지는 일”(<오후 4시 51분 15초>)이라는 것과 “개에게 도약은 어울리지 않지만 웅크림은 어울린다”(<카프리올>)고 쓰는 자도 한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실은 슬리퍼나 고아와 같이 조금씩 닳으며 나이를 먹어가고, 웅크리고 있는 개와 마찬가지로 도약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실패의 후예들인 것이다.


박판식(1973~)은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났다. 200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하고, 시집 《밤의 피치카토》와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를 냈다. 이 총명하고 눈 밝은 시인의 시에는 범속한 세계에서 채집한 조금도 비범할 것 없는 삶의 기미들이 반짝거린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들은 길을 잃고 병든 채 떠돌고, 개업식 경품행사로 자전거가 당첨되고, 그 경품을 내걸었던 빵집은 반년 만에 폐업한다. 옛 애인이 나를 잊으려고 최면협회 신규 회원이 되고, 유년 시절 제 음부를 들여다보게 해준 여자의 부음을 듣는 것도 이 세계다. 시인은 절과 고아원과 술집이 있고, 어디에나 추문과 실패가 널린 세계에서 “영아 속에 들어 있는 어른은 피곤”하고,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인생의 도약이 아니다”라고 못 박는다. 기껏해야 절망 때문에 종교를 발명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도시에 모자나 박쥐우산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산다고 해도, 또 왜 우는지도 모르는 채 다리 난간에 기대어 우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시인은 그런 풍경들에 무심히 눈길을 주고 있다.
  • 2014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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