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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여행에서 만나는 것들

여행은 꽤나 흥미롭습니다. 공항이라는 경계의 공간에 서는 것부터 타국에서 만나는 이들, 그곳의 공기와 역사 같은 것들에 짓눌려 내 자신이 작아지는 그 순간순간이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들었던 음악들은 지금도 소중합니다. 첫 여행은 유럽이었습니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 내리자마자, 밥 먹듯이 무단횡단을 하는 열댓 명의 신사들을 보며 충격받은 기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꼬드겨 집에 데려가려던 게이 할아버지, 커피를 달랬더니 머핀을 주고 나가라는 카페 점원, 길거리에서 기타를 퉁기던 보헤미안 흑인 할아버지 등,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습니다. ‘처음’이라는 건 그만큼 몇 갑절로 큰 충격을 주나봅니다. 영국에선 제이슨 므라즈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며 주야장천 mp3에서 흘러 나오던 그의 음악. 그 음악을 들으며 템스강에 흘려보낸 내 눈물은 지금 어디쯤 있을까요. 미안하다 눈물아, 영국 사람인 줄 알았어. 근데 미국 사람이래. 며칠 전에 알았어. 미안해.

영국·프랑스·독일에서 총 네 편의 연극을 봤습니다. 놀라운 건, 평일 낮 시간 공연임에도 전 석이 매진이라는 겁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 프랑스의 ‘라신’ 같은 대문호의 공연에 그들은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공연장에 찾아와 배우들과 함께 호흡합니다. “와, 정말 리어왕이 백인 할아버지다. 와, 진짜 프랑스 사람이 나와” 하며 감탄을 금치 못하던 저는, 커튼콜이 시작함과 동시에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관객들이 ‘뭐야. 딱 봐도 무전여행하는 것 같은 이 애송이는’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역사의 한 부분을 당당하게 차지하는 이 공연을 실제 본토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것을 보니 이역만리 아시아 청년은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렇게 저는 여행을 가면 꼭 그 나라의 연극을 찾아보는 값진 취미를 얻었습니다.

일본의 오사카에 갔을 적 이야기입니다. 그날의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 도톤보리의 어느 골목에서 한국 술집을 발견했습니다. 장근석의 사진이 붙어 있고 빈 소주병을 죽 늘어놓은 가게였습니다. 신기한 마음에 기웃거리고 있는데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한 명이 나와 맥주 한잔하고 가라는 겁니다. 궁색하게 “비싸지 않아요?” 하고는 터덜터덜 들어갔습니다. 바에 앉아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합니다. 옆에서 그 여학생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혹시…” “네?” “한국에서 뭐하세요?” “(꽃뱀인가) 학생인데요.” “전공이 뭔데요?” “(치밀한 꽃뱀인가) 이런 외모에 이런 말씀드리기 뭣하지만 연기를 전공해요. 스미마셍.” “아, 그럼 영화 출연하신 거 있으세요?” “(배우 지망생 꽃뱀인가) 있긴 한데 잘 모르실 걸요.” “뭔데요?” “(끈질긴 꽃뱀인가) 〈파수꾼〉이라고… 스미마…” “꺄악! 저 그 영화 다섯 번 봤어요. 이제훈 짱 팬임.” “그렇죠. 저도 한 일곱 번 봤는데요. 저도 이제훈 짱 팬임. 거기 나오는 베킨지 뭔지 그 새끼 죽이고 싶었음.” 정도의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주방에서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 사장이 나타납니다. “왜 무슨 일이야.” “오빠 이 사람, 그 <파수꾼>에 나왔던 그 배우야.” “오! 이제훈?” “(이제훈이 아니라서 스미마셍)” “아니 그 베킨가 뭔가.” “진짜! 몇 살이야. 86이야? 친구네! 우와, 그럼 안주 하나 해줘야지! 소야(소시지야채볶음) 어때, 소야. 소야가 죽여. 괜찮아?” “네, 고맙습니다. 하하.” 그러더니 그 녀석 난데없이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일본인 단골 손님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한국에서 배우인데, 장근석 친구야.” “오! 소카?(그렇습니까?) 혼토 근짱노도모다치데스까?(진짜 장근석의 친구입니까?) 스바라시(대단해요).” 난 10분 만에 오사카 관광객에서 연기 전공 학생을 거쳐 <파수꾼>에 나온 이제훈 팬을 지나 장근석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장 녀석, 아르바이트 여학생, 사이토라는 단골 손님과 함께 한 시간 남짓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럼 난 가볼게.” “오늘 만나서 정말 반갑다.” “나도 반가웠어.” “맥주 3잔 3000엔, 소야 2000엔 총 5000엔이네.” “응? 뭐라고?” “총 5000엔.” “소야 뭐라고 한 것 같은데.” “응, 소야가 2000엔이야.”

어디서 배웠는지 장사 더럽게 잘합니다. 그 이후로 소야는 죽어도 안 먹습니다. 혹여 소야라는 걸그룹이 나오면 안티카페를 만들 것이고, 소야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주인공을 시켜준다 해도 안 할 겁니다. 1년 뒤 오사카를 다시 찾아 죽어도 소야를 먹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그 가게를 찾았을 땐 이미 문을 닫고 장근석 사진만 나풀거리고 있더군요. 그래도 재밌는 친구였는데 아쉽습니다. 어디선가 또 소야를 볶고 있겠지요.

여하튼 여행은 이토록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평생 만나볼 수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설렙니다. 조금만 용기를 갖고 도전해보세요. 적지 않은 돈이지만, 적지 않은 경험과 사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대형 마트에 가도 살 수 없는 것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꼭 값진 경험하고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혹시 일본에 가신다면 그 소야 볶는 수염 난 양아치, 아 그 친구 찾으시면 제가 꼭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해주세요. 그때 소야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는 말과 함께요. 한 번의 인연이지만 이토록 보고 싶을 수가 없네요. 여행은 그런 것. 오히려 역향수를 불러일으켜 한동안 우울감에 빠져버리게 하는 그런… 당신의 평생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여행을 단 한 번이라도 하시길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박정민은 영화 <전설의 주먹>으로 이름을 알린 신인 배우. 2011년 <파수꾼>으로 데뷔했다.
‘언희(言喜)’는 말로 기쁘게 한다는 뜻의 필명으로, 앞으로 영화 현장, 배우, 그리고 연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낼 작정이다.
  • 201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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