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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가 내게는 더 중요”

한국 영화의 파수꾼 배우 이제훈

시사회가 끝나고 상영관에 불이 켜졌다. 객석에서 박수가 나왔다. 미안함, 고마움, 그리고 다짐을 담은 박수였다. 〈아이캔스피크〉를 만든 배우에게도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착한 영화일수록 더 잘 만들어야 한다. 날카로운 선량함이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해낸 배우 이제훈은 이제 한국 영화의 ‘파수꾼’으로 보였다.

사진제공 : 리틀빅픽쳐스
이제훈을 만나면 그의 콧날을 눈여겨보리라 다짐했다. 스크린에서 그의 코는 우뚝하고 날카로웠다. 그 콧날 위에 걸친 둥근 안경은, 여간해서는 먼지 하나 묻지 않을 것 같았다. 이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는 원리원칙주의자가 영화의 후반부, 콧날이 시큰거린다는 듯 눈을 찡그릴 때 객석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막상 만나 보니 그의 코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얌전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웃음이 터질 때만 잠시 실주름이 잡힐 뿐이다. 어떤 배우는 뒷모습으로도 연기한다고 한다. 이제훈은 코로도 연기한다.

그가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아이캔스피크〉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나문희의 몫이 크다. 최근 한국 영화에서 여배우가 의미 있는 역할로 나오는 영화는 가뭄에 나는 콩 같다. 그 와중에 1941년생 여배우가 포스터의 절반을 차지한 영화가 등장했다. 영화가 상영되는 두 시간 동안,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나문희가 연기한 여인 나옥분이다. 이제훈이 연기한 박민재는 그저 나옥분의 삶을 관찰하고, 경계했다가, 끝내 동참한다. 영화가 흐르는 동안 관객과 동일한 경험을 하는 인물이다.

“준비를 정말 많이 했어요. 선생님께 누가 되면 안 되니까요. 민재의 머리 스타일, 옷, 안경까지 다 준비했어요. 막상 현장에서 선생님을 뵈니까 제가 준비한 모든 것이 다 사라졌어요. 선생님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면, 그냥 그것만 남아요. 그 충만한 느낌을 뭐라 설명할 수가 없어요.”

나옥분은 동네의 ‘파수꾼’이다.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동네의 구석구석을 탐방하고, 구청에 쉴 새 없이 민원을 제기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수고는 구청 직원에게나 동네 주민에게나 환영받지 못한다. 그저 구청 직원에게도 민원을 제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민원 넣고 싶은’ 기피 할머니일 뿐이다. 그가 제출한 민원이 8000통이 쌓일 즈음, 철저한 절차와 흐트러짐 없는 원칙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가 나타난다. 한 번에 ‘만만치 않다’는 기운을 감지한 두 사람. 이들의 기 싸움이 영화 초반의 치트키 (눈을 빼앗기는 속임수)다.


마음 가는 대로


2007년 미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문’이 채택됐다.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은 8만에서 20만 명의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 그중 절반은 조선 여성이었다. 배우 나문희는 그 시절에 태어났다. 당시 태어난 배우가 일흔을 넘긴 지금도, 결의문이 통과된 후 10년이 흐른 지금도 제대로 된 사과는 받지 못했다.

〈아이캔스피크〉가 배경으로 삼은 2007년은 또한 배우 이제훈이 데뷔한 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나온 그는 스물넷에 〈밤은 그들만의 시간〉이라는 단편영화로 데뷔했다. 이후 윤성현 감독과 함께 만든 〈파수꾼〉은 그에게 청룡영화상, 대종상영화상 신인상을 안겨주었다. 그 이듬해 만든 〈건축학개론〉은 그가 독립영화뿐 아니라 상업영화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가질 수 있는 배우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아이캔스피크〉는 〈건축학개론〉을 만든 명필름에서 선택한 작품이다. 질풍노도의 소년으로 스크린에 등장한 한 남자는 이제 생계의 지난함과 민원의 고단함을 아는 30대 공무원이 되어 있었다.

“명필름과 함께 작업한 기억은 제게도 무척 좋은 추억으로 남았어요. 심재명 대표님이 작품을 제안해주셨을 때부터 해야겠다는 마음이었죠. 책을 읽는 동안 이건 ‘나문희 선생님’이 하셔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선생님까지 함께 하신다고 하니 안 할 이유가 없었고요.”

〈아이캔스피크〉는 이제훈이 돋보이는 작품은 아니다. 〈탐정 홍길동〉의 길동이나 〈박열〉의 박열처럼 타이틀롤이 아닐뿐더러 〈아이캔스피크〉의 민재는 옥분의 조력자다. 옥분이 관객의 마음을 훔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다. 초능력이나 비범함으로 관객을 사로잡던 이제훈은 여기에 없다.

“작품에서 제가 얼마나 돋보일까는 고려하지 않았어요. 이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봤어요. 그 기준은 제가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변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저는 영화가 너무 좋아요. 그 영화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게 좋고요. 최근에는 영화가 감당해야 하는 ‘소명’이 있다는 생각을 해요.”

최근 이제훈의 필모그래피는 ‘의미 있는’ 작품들로 연결된다. 전작인 〈박열〉은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불량 청년’으로 살았던 한 아나키스트의 일대기를 담은 작품이다. 실존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가 던지는 메시지가 묵직했기 때문에 촬영 기간 동안 ‘악몽’을 꿀 정도로 몸살을 앓았다. 영화의 말미, 박열은 일본의 재판정에서 “나는 피고가 아니다. 나는 조선의 대표로 여기에 서 있다”는 최후진술을 한다. 옆에서 건들기만 해도, 이 진술이 줄줄 나올 정도로 강박적으로 연습했다. 〈아이캔스피크〉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미국 하원 공개 청문회에서 영어로 연설하는 장면이다. 단, 이 연설의 주인공은 이제훈이 아닌 나문희다.

“선생님이 가진 부담감과 떨림이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지더라고요. 그 순간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어요. 다만 옆에서 바라봐주고, 응원할 뿐이죠. 저는 그냥 서 있기만 하는 장면인데도, 제가 다 오금이 저리더라고요. 정말 힘이 되어드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선생님께서 멋지게 연설을 마치셨을 때는, 마음에서 울컥 하고 뜨거운 게 올라왔습니다.”

그 말을 하는 중에도 콧날을 몇 번 찡긋했다.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듣는 이들에게도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당시 현장의 분위기를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이캔스피크〉 촬영이 〈박열〉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체력적으로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런데 현장에 가면 따뜻하고 살가운 분위기가 있었어요. 막상 촬영을 시작하면 힘든 줄 모르겠더라고요. 김현석 감독님과는 첫 작품인데, 마치 감독님과 여러 작품을 해본 것처럼 잘 통했고요.”

김현석 감독은 〈광식이 동생 광태〉, 〈스카우트〉, 〈시라노 연애조작단〉. 〈쎄시봉〉 등을 만들었다. 겉보기에는 뭔가 모자라지만, 은근한 미소가 지어지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제훈은 김현석 감독의 작품을 좋아했다. 그 인물들이 가진 사랑스러움을 사랑한다고 했다.

“촬영 중에도 감독님 집에 자주 놀러 갔어요. 내 집에 온 것처럼 편하더라고요.(웃음) 집의 구조나 소품들, 취향이 저랑 아주 비슷했거든요.”

김현석 감독은 이제훈을 ‘품위 있는 배우’라고 했다. 당장의 개인기로 눈앞의 인기를 좇지 않고, 큰 그림을 보며 연기하기 때문이다. 마치 손자처럼 나문희 배우를 곁에서 보필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품격 있는 배우


“젊은이를 대표해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우리 곁에 계셨음에도, 그 고통을 나눠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요. 저는 민재로 말한 거지만, 영화를 만들고 공부하면서 저조차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을 했어요. 선생님 앞에서 제가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냥 그 마음이 너무 가득 차오르더라고요.”

사실 옥분에게 구청은, 아픈 곳이다. 처음 정부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조사했을 때, 옥분은 가지 못했다. 자신의 과거가 알려지기 바라지 않았고, 자신의 과거를 가족이 수치스러워할까 두려웠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에만 묻어둔 이야기를 ‘I can speak’ 할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9월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생존자는 35명이다. 살아서 증언하지 않으면, 잊힐지 모르는 이야기였다.

〈아이캔스피크〉는 영화사 ‘시선’의 기획으로 출발해 4년에 걸쳐 완성된 프로젝트다. CJ문화재단은 2014년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공모전’을 열었고, 여기에 당선된 작품을 영화진흥위원회 가족영화제에서 지원했다. 지금도 동사무소에서, 시장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저 인물은 왜 저렇게 분노와 슬픔에 차게 됐을까’를 묻는 이야기다. 스쳐지나갔을 어떤 인물에 카메라는 공을 들여 그의 삶을 쫓는다. 혼자 차려 먹는 밥상과, 달이 기울도록 잠들지 못하는 밤을 담는다.

배우 나문희는 “옥분은 아주 재밌고 훌륭한 할머니”라고 말했다. 나쁜 걸 보면 나쁘다고 말할 수 있고, 그 말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데도 열심을 쏟는다. 그 열심이 결국 민재의 마음도 돌이킨다.

“제가 영어 연습을 한 건 옥분을 돕기 위해서였어요.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민재가 옥분의 ‘선생님’처럼 보이길 원했고, 그러려면 민재의 영어가 탁월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현장에서 늘 영어 선생님과 함께 대사를 체크했어요. 작은 감탄사나 단어도 하나씩 확인했죠. 민재는 지금 공무원으로 살지만, 사실 민재의 꿈은 공무원이 아닌 건축가였거든요. 유학도 꿈꾸었고요. 민재의 영어에는 민재가 이루지 못한 꿈도 담겨 있어요.”

〈아이캔스피크〉에서 이제훈의 영어 실력은 놀랍다. 단어의 구사력뿐 아니라, 발음과 표현력이 훌륭하다. ‘종로에서 배운 실력’이 아닌 것 같다고 물으니, ‘아마 평소에 영화와 미드를 즐겨 봐서 그 느낌이 묻어난 것’이라며 수줍게 웃었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 점점 커진다


영화는 현재 그의 유일한 취미이고 특기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팽팽해진 신경과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것도 영화다. 집에서는 늘 영화를 본다. 가끔 시간이 나면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다.

“영화를 향한 사랑이 점점 커져요. 저도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로요. 처음에는 이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는데, 이제는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저뿐 아니라 제 주변도 행복하길 바라는 거죠. 그리고 이게 더 퍼져 나가서,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행복하기를 바라요. 제가 영화를 만들면서 느꼈던 충만함을 보는 분들도 느끼시길 바라고요.”

〈파수꾼〉의 소년은,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다. 이 세상이 바깥세상과 충돌해 소년은 삶을 등졌다. 〈고지전〉과 〈분노의 윤리학〉에 팽팽한 성장통이 있었다면, 〈탐정 홍길동〉과 〈박열〉에는 세상과 싸우는 법을 익힌 날선 청년이 있었다. 그렇게 소년은 성장해, 〈아이캔스피크〉에서는 자신과 주변의 삶을 되돌아보는 어른이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준비로 무장했던 신인 배우는, 주변의 앙상블과 우러나오는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10년 차 배우가 됐다. 〈파수꾼〉으로 한국 영화에 벼락처럼 등장했던 콧대 높은 배우가 이제는 한국 영화의 파수꾼이 되었다. 여러 모로 든든한 일이다.
  •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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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b   ( 2017-09-25 ) 찬성 : 8 반대 : 0
기자님 은유비유가 품위있는글 그러면서 왜곡없는글 잘봤습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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