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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고 나른한 오후 12시 40분쯤 들으면 좋을 음악 드뷔시 교향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L. 86
입력 : 2020.07.29

‘나른한’. 이 형용사는 왠지 아침보다는 오후에 더 어울립니다. 나른한 오후! 이 시간에 제격인 음악, 드뷔시(1862~1918, 프랑스)의 교향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입니다. 드뷔시는 관능을 음악으로 풀어낸 천재입니다. 제목에 벌써 목신이 들어가는 걸 보니 좀 나른하죠? 반은 사람이고 반은 염소인 이 목신(Pan)은 다른 신들과 달리 느긋하게 살았을 것 같아요. 느긋하게 여유로운 이 곡을 감상하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10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점심 먹고, 양치질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대충 12시 40분쯤 들으면 좋을 음악이죠.

물론 음악이란 언제 들어도 좋지만, 어떤 음악은 특정 시간에 들었을 때 더 진하게 전달됩니다. 이 곡이 그렇습니다. 부산한 아침을 보내고 점심 먹고 드뷔시 한 곡을 들으면 몸과 마음이 느긋해지면서 릴랙스되는 기분이에요. 분명 음악 듣기 전에는 정신이 멀쩡했는데, 듣다 보면 노곤한 것이 쪽잠이라도 자게 됩니다. 드뷔시 듣고 한 15분 졸다가 다시 오후 업무 시작하면 완벽한 타이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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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스톡

드뷔시는 19세기 말, 벨 에포크 시대를 한껏 즐긴 작곡가입니다. 상징주의에 빠져있던 드뷔시가 프랑스의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1842~ 1898, 프랑스)의 《목신의 오후》를 읽고 음악으로 옷을 입힌 곡이 바로 교향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L.86입니다. 교향시란 악장이 나눠진 교향곡과는 달리 단악장으로 하나로 이어져 있는 관현악곡을 말합니다. 그리고 드뷔시의 작품번호는 프랑스의 음악학자이자 드뷔시 연구가인 프랑수아 르쉬르가 1977년에 정리했기에 그의 이름 이니셜을 따서 보통 L번호로 표기합니다.

말라르메보다 20살 어린 드뷔시가 좋아했던 시 ‘목신의 오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른한 여름 오후 목신이 시칠리아 숲 속에서 졸고 있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 안 되는 상황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목욕하는 요정을 봅니다. 그때부터 목신의 머릿속에는 예쁜 한 쌍의 요정들이 떠오르고 자석처럼 끌려 그 두 요정을 안고 입을 맞추려는 순간 목신은 관능적인 희열을 느낍니다. 눈을 떠 바라보니 두 요정은 환영이었는지 더 이상 사라지고 보이지 않아요. 망연자실하게 앉아 권태로움을 느끼며 오후를 보내다가 다시 숲 속 풀 위에 누워 잠이 드는 목신.

장면이 상상이 되시죠?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여유로워 보이는 목신입니다. 졸리는 것도 그렇고 예쁜 요정을 꿈꾼 것도 그렇고, 분명히 두 눈 똑바로 뜨고 느끼는 감정은 아닙니다. 몽롱한 기분으로 듣는 게 더 어울리는 음악이죠.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목신의 모습을 봐도 그의 성격이 느껴집니다. 갈대 피리를 부는 한량 목신. 당최 열심히 일할 생각은 별로 없는 듯 보여요. 근엄하거나 완벽하기보다는 허점 많고 실수 많은 인간적인 모습의 그리스 신들이라지만 그중에서도 목신은 유난히 친근한 성격입니다. 주변에 이런 친구들 한 명씩은 있지 않나요?

음악에서도 이 몽롱하고 느슨한 기분을 묘사하기 위해 처음 주제 선율을 목관 악기 플루트를 관능적으로 연주합니다. 그리고 따뜻한 음색의 클라리넷이 이어받아 연주를 하죠. 처음 주제는 다른 악기 없이 오롯이 플루트 멜로디만 연주되기에, 이 곡은 어떤 연주자가 플루트를 연주하느냐도 큰 관심사입니다. 연주가 끝나면 지휘자가 플루트 연주자를 일으켜 세워 박수를 받게 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플루트가 곡의 처음과 끝을 장식해요. 플루트와 클라리넷, 오보에 등의 목관악기 역할이 아주 큰 관현악곡입니다. 한참을 진행하다가 목신이 다시 잠드는 마지막 장면엔 아름다운 하프가 흐르는데, 이 곡에서는 하프가 2대나 쓰입니다. 여러 다양한 악기들을 볼 수 있는 재미가 있어요.

관능적이고 환상적인 장면들을 음악으로 표현한 이 음악은 1892년부터 1894년 사이에 작곡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전주곡, 간주곡, 피날레로 작곡할 생각이었는데, 첫 곡인 ‘전주곡’이 너무 완벽하고 좋아서 나머지 두 곡은 생략되었답니다. 첫 연주는 1894년에 했는데, 사실 나중에 있었던 발레 공연으로 더 유명해졌습니다. 1912년 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의 무용가 니진스키가 딱 붙은 타이즈에 스카프를 들고 나와 연기했던 발레 공연이 프랑스에서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드뷔시의 음악만으로는 느낌이 잘 안 온다면 발레 공연으로 감상하셔도 좋습니다. 발레를 보면서 음악을 들으면 좀 더 느낌이 뚜렷해지니까요.

그 누구보다도 자유분방하고 기존의 정형성을 벗어나기 위해 항상 새로운 것을 꿈꿨던 혁명가 드뷔시. 결혼한 유부남이었는데도 다른 여인을 사랑해서 급기야 첫 번째 부인이 권총 자살까지 시도했다는 남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부인과 헤어지고 드뷔시는 유부녀였던 엠마 바르닥 부인과 두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끝없는 여성 편력으로 항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그였지만 음악에서만은 진정 순수 영혼이었습니다.

드뷔시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통해 제대로 드뷔시다운 새로운 음악을 선보입니다. 이 곡을 기점으로 이전의 드뷔시와 이후의 드뷔시를 구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객관이나 규칙보다는 그 순간 자기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을 아주 세세하게 미묘한 음색으로 잘 표현한 작곡가입니다. 그래서 이런 음악은 한음 한음 완벽하게 분석하며 이해하려기보다는 온몸으로 그냥 듣고 느끼는 것에 열중하면 좋습니다. 한 번을 들어도 느낌이 중요합니다. 너무 이성적으로 각 잡고 듣기보다는 셔츠 단추도 두어 개쯤 풀고, 몸도 좀 흐트러지게 앉아 음악을 느껴보세요. 음악이 여러분의 얼굴과 귀에 와서 간질이면 환상적으로 마음 깊이 스며들 거예요.


유튜브 검색어- 드뷔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교향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L. 86(1894)
 

 

L'Après-midi d'un faune / Afternoon of a Faun - Ballets Russes
발레 뤼스의 발레

조현영 피아니스트,아트앤소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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