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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는 누가 발견했을까? 下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 1743. 8. 26 ~ 1794.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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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0.25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 1743. 8. 26 ~ 1794.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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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신로아

  1743년 프랑스 파리의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난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와 고모의 돌봄을 받으며 컸다. 그는 열한 살에 마자렝 대학(College Mazarin)에 입학하여 법학과 자연과학을 배웠고 20세에 법학 학위를 받았으나, 그의 주된 관심과 사회 활동은 과학 쪽에 치우쳐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파리 식물원에서 주최하는 과학 강연을 수강하고 틈틈이 교수들의 조언도 구하면서 스스로 공부했고, 프랑스의 지질도를 제작하기 위한 지질조사에도 참여했다.

 1765년 무렵, 라부아지에는 석고에 관한 분석 논문을 써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발표하였고, 도시의 가로등을 설치하기 위한 공모전에서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라부아지에는 과학자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고, 1768년 24세의 젊은 나이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Academie des sciences)1) 회원이 되었다.

1) 과학 연구의 발전 정신을 촉진시키고 보호하자는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의 제안으로 루이 14세에 의해 1666년 설립되었다. 본부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당시까지는 물, 불, 공기, 흙이 물질을 이루는 4대 원소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 과학자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물을 증류하면 앙금이 생기는데 이는 물이 흙으로 변하는 현상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했다. 1768년 과학 아카데미에서 수질 조사 임무를 받은 라부아지에는 유리로 만든 플라스크에 물을 넣고 밀봉한 후 약한 불로 100일 동안 가열하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플라스크 바닥에 앙금이 생겼지만, 물의 무게에는 변동이 없었다. 앙금은 단지 플라스크의 유리 성분이 녹아서 침전된 것일 뿐이었다.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데 미세한 질량의 변화까지 측정할 수 있는 정밀한 저울을 이용했다.

 라부아지에의 이 실험은 정량 분석(Quantitative analysis)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정부가 운영하는 세금징수조합인 페르미 제너럴에 입사하여 주로 담배와 관련된 밀수나 사기 범죄를 적발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1771년 회사 사장의 외동딸 마리 안2)과 결혼했다.

2) 마리 안(Marie-Anne Pierrette Paulze, 1758~1836): 14살에 라부아지에와 결혼한 마리 안은 남편의 훌륭한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녀는 라부아지에의 실험 과정을 기록하고, 영어를 배워 논문을 번역하고, 남편의 책에 넣을 삽화를 손수 그렸다. 그렇지만 자녀를 출산하지 못했고, 라부아지에 사망 10 년 후 럼포드 백작과 재혼하여 30년을 더 살다가 78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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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안이 그린 삽화, 라부아지에의 실험 장면(오른쪽 끝이 마리 안)

 1772년 라부아지에는 황, 인, 납, 양철과 같은 물질을 플라스크 속에서 연소시키는 실험을 통해 ‘황과 인이 연소하면 많은 양의 공기가 소비되고 질량이 20~30% 증가한다.’라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그해 11월 1일 그는 실험 기록을 봉인하여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원장에게 보냈고, 그 내용은 몇 개월 후인 1773년 5월 5일 ≪인과 황의 연소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1774년 라부아지에는 만찬을 열어 명사들을 초대하였다. 영국의 과학자 프리스틀리도 초대되어 참석했다. 정보 공개에 개방적이었던 프리스틀리는 자신이 산화수은을 가열하여 ‘플로지스톤이 없는 공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만찬에서 털어놓았다. 그 공기 속에 촛불을 넣으면 훨씬 잘 타오르고, 그 공기 속에서는 동물들이 더 오래 생존한다는 사실도 말했다.

 프리스틀리의 이야기를 듣고 한 달이 지난 즈음에 라부아지에는 수은 가열 실험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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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구부러진 플라스크에 수은 4 온스(113.4 g)를 넣고 수조에 거꾸로 세운 종 모양의 병과 연결했다. 내부 공기의 부피를 50 세제곱 인치(819.35 ㎤)가 되도록 조절한 후 수위를 체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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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도가니에 불을 피워 수은을 며칠 동안 계속 가열했다. 48시간이 지나자 수은 표면에 붉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고 수은은 점차 붉은 색을 띠는 금속 가루 형태로 변했다. 반응이 끝난 후 플라스크를 상온으로 냉각시켜서 부피의 변화를 살폈다. 종 모양 내부의 공기 부피는 8 세제곱 인치가 줄어들고 무게는 3.5 그레인(0.23 g)이 줄어들었다. 그 대신 산화 수은의 무게가 3.5 그레인(0.23 g) 증가했다. 줄어든 공기의 무게만큼 산화 수은의 무게가 증가한 것이다. 이 실험을 현대의 화학 반응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2Hg(수은) + O₂(산소) → (300℃로 가열) → 2HgO(금속재 산화 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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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부아지에는 역반응 실험도 수행했다. 수은 대신에 산화 수은 가루를 플라스크에 넣고 더 높은 온도로 며칠 동안 가열했다. 그러자 회색 증기가 피어오르며 플라스크 벽면에 수은 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산화 수은에서 수은으로 변하는 반응이 끝났을 때 무게는 3.5 그레인이 줄었고 내부 공기는 다시 8 세제곱 인치 증가했다. 산화 수은이 수은으로 변하면서 산소가 방출되었기 때문이다. 이 반응을 현대의 화학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2HgO(금속재 산화 수은) →(600℃로 연소)→ 2Hg(수은) + O₂(산소 발생)

 라부아지에는 이 실험에 관한 결과를 1775년 4월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보고했다. 논문은 저널(Rozier's Journal)에 실렸는데, 흔히 ‘라부아지에의 부활절 보고(Lavoisier's Easter Memoir)’라고 부른다.

 1777년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는 새로운 연소 이론을 세우면서, 프리스틀리가 ‘탈플로지스톤 공기(산소)’라고 부른 공기를 ‘순수 공기(Air pur)’라고 명명했다. 그렇지만 1778년 논문 ≪산에 대한 일반적 고찰≫에서는 순수 공기 대신 ‘산의 형성자(principe oxygine)’라는 말을 썼는데 이것이 ‘산소(Oxygen, 酸素)’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참고: 조정미, ≪산소는 누가 발견하였는가, Discovery of Oxygen≫ Journal of Basic Science, Feb, 1997)

 영국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1731~1810)는 귀족 출신이자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었지만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려서 은둔자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속 받은 재산이 많았지만 의복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식사도 혼자서 했으며, 하인들과 마주치는 것도 싫어해서 지시할 것이 있으면 쪽지를 써서 남겼다고 한다. 그는 ‘가연성 공기’를 발견했는데 이것이 산소와 만나면 물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소식을 들은 라부아지에는 가연성 공기에 ‘수소(水素, hydrogen)’라는 이름을 붙였다. 물을 생성하는 원소라는 뜻이었다.

 라부아지에는 1783년에 수소를 연소시켜 물이 생성되는 실험을 선보였고, 발효와 호흡에 관한 연구도 병행하여 호흡 과정에서 산소가 흡수되고 이산화 탄소가 방출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785년에는 고열을 이용하여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울러 물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수소의 질량과 산소의 질량을 측정하였고, 이를 통해 물은 단일한 원소가 아니라 두 원소의 화합물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당시 화학 물질의 이름은 대부분 연금술사들에 의해서 붙여진 것으로 비밀스러운 암호문과 같은 것이었다. 황산은 ‘독한 기름’, 황산 칼륨은 ‘안티몬의 버터’, 붕산은 ‘훔베르크를 진정시키는 염’과 같은 식이다. 1787년 라부아지에는 화학 물질의 이름을 통일할 필요성을 느끼고 베르톨레(Berthollet), 모르보(Morveau), 푸르크로아(Fourcroy)와 함께 ≪화학 명명법, Me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를 출간했다. 이 책은 유럽의 여러 언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화학 원소의 이름을 짓는 기본 틀을 제공했다.

 1789년 라부아지에는 공기와 물의 조성, 산과 염기의 목록과 화합물, 33종 원소의 목록, 화학 실험 장비 사용법 등의 내용을 담은 ≪화학 원론, Traite elementaire de chimie, Elements of Chemistry≫을 출간하였다. 그의 화학 원론에는 ‘반응물의 질량 = 결과물의 질량’이라는 ‘질량 보존의 법칙’의 내용이 담겨 있었고,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화학 교과서의 지위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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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원론≫에 실린 삽화, 라부아지에의 실험 장비

 1789년 루이 16세의 폭정과 과도한 세금 부과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라부아지에는 세금징수 조합의 간부였으므로 혁명 주도 세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당시 라부아지에를 궁지를 몰아넣은 사람은 급진주의 저널리스트이자 공포 정치를 주도한 장 폴 마라3)였다. 그는 과거에 허술한 논문을 써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가 라부아지에로부터 퇴짜를 받은 일로 앙심을 품었다고 알려져 있다.

3) 장 폴 마라(Jean-Paul Mara, 1743~1793) : 프랑스 혁명 후 급진 좌파인 자코뱅 당에 참가하여 공포 정치를 추진했다. 그는 지롱드 당 지지자였던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서 목욕탕에서 살해되었다.
  
 라부아지에는 법정에서 자신이 과학자일 뿐이라고 말했으나 재판장은 ‘프랑스에는 더 이상 과학자가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한 뒤 사형을 언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1794년 5월 8일 저녁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혁명광장의 단두대에서 참수되었고 시신은 공동묘지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이듬해 시월에 정식으로 장례식이 치러졌고, 1796년 8월에는 두 번째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지켜 본 이탈리아 출신의 수학자 라그랑주(Joseph-Louis Lagrange, 1736~1813)는 시계를 쳐다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의 머리를 베어 버리는 것은 1초면 충분하지만, 프랑스에서 같은 두뇌를 만들려면 백 년도 넘게 걸릴 것이다.”

尾註) 20세기의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Thomas S. Kuhn, 1922~1996)은 그의 대표 저서인 ≪과학 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서 셸레, 프리스틀리, 라부아지에의 산소 발견 우선권 논쟁을 다루면서 “산소 발견 연대를 정하려고 한다면 굉장히 자의적인 시도일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신규진 경성고 과학교사 《너무 재밌어서 잠못드는 지구의 과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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