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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
뉴욕 변호사의 엑스팻 생활기
뉴욕은 지금, 가을 단풍이 절정 오리엔트 특급 풍 열차를 타고, 애디론댁 산맥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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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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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정원. ⓒ이철재 

 

나는 나의 집을 내 여름 별장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여름이면 휴가를 떠날 궁리를 하지만 나는 7월과 8월 두 달은 될수록 아무데도 가지 않고 집에 있으려고 한다. 서울과 시라큐스를 오가고 그 사이사이 뉴욕시 등으로 출장을 가지만 여름에는 웬만해서는 서울도 잘 가지 않는다. 그만큼 시라큐스의 여름을 좋아한다.

시라큐스의 여름이 좋은 이유는 ‘춥지 않아서’가 가장 큰 이유이다. 시라큐스 여름도 꽤 덥지만 서울이나 내가 오래 살았던 텍사스보다 훨씬 살기 좋은 더위이다. 집에서 반바지와 탱크톱만 입고 여름을 난다. 에어컨도 잘 틀지 않고, 밤에 잘 때 창문을 모두 열고 자는 것이 얼마나 기분이 상쾌한지 모른다. 새벽이면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깬다. 알람이 따로 필요 없다. 해가 일찍 떠 새벽에 나가 뛰는 것도 수월하다.   

정원 가꾸기는 삶의 활력소

정원 가꾸기는 나의 삶의 활력소이다. 꽃도 심고, 밭도 가꾼다. 아침에 새소리에 잠을 깨면 곧 나가서 30~40분 뛰고 들어오는 길에 아예 밭에 물주고 잡초 뽑고 집으로 들어온다. 사슴이 다 따먹어 여러 가지 심지는 못하지만 오이, 깻잎, 허브 등을 심어 따먹는 재미가 크다. 난 고기 맛 흐려진다고 고기 먹을 때 상추쌈을 거의 먹지 않는다. 하지만 깻잎에는 꽤 싸서 먹는 편이다. 그만큼 깻잎을 좋아한다. 봄에 깻잎이 돋아나면 솎아 줘야 하지만 늘 욕심을 부려 그대로 놔두다가 여름이면 깻잎이 처치 곤란이 된다. 깻잎장아찌, 깻잎김치, 깻잎찜 등을 수없이 만든다.

게다가 장에 가면 쏟아져 나오는 제철 과일로 잼을 만드는 것도 나의 여름 즐거움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일이다. 딸기, 살구, 블랙베리 등 그때그때 가장 싱싱한 과일을 사다 만들어 병조림을 해 놓으면 1년 내내 나도 먹고, 한국에 갈 때 가져가 어머니도 드린다. 이렇게 병조림 하는 것을 영어로 캐닝(Canning)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이제 사서 먹는 잼은 못 잡수시겠다고 한다. 나와 어머니 모두 큰 과일 덩어리가 뭉텅뭉텅 씹히는 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당에 기르는 바질로는 여름 내 페스토 소스를 만들어 먹는다. 내 페스토 소스는 동네에서 꽤 알아준다. 바질과 올리브기름을 함께 갈고 거기에 마늘, 파르메산 치즈, 잣을 넣으면 되는 간단한 음식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재료가 매우 중요하다.

치즈는 그리스 식료품점 타노스에서 최고급 파르메산을 크게 한 덩이 사오고, 마늘은 장에 나가 아직도 흙이 잔뜩 붙은 그 여름 햇마늘을 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올리브기름은 반드시 우리 동네 올리브기름 전문 매장에 가서 구입한다. 이곳은 들어서면 사방이 올리브오일 통으로 벽이 꽉 차 있는 곳이다. 페스토 용으로는 주로 쌉쌀하면서 과일향이 환하게 퍼지는 아르베키나(Arbequina) 올리브오일을 사용하고 없으면 아르베키나에 가장 가까운 맛을 찾아 그걸로 사용한다.

그리고 또 하나 기계에 드르륵 갈지 않고 꼭 돌절구에 바질과 마늘, 잣, 굵은소금을 넣고 으깨서 만든다. 팔이 아파 한 번에 많이 만들지는 못하지만 확실히 맛이 있다. 허브, 마늘, 잣 등의 기름이 제대로 우러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나는 카레도 향신료들을 이것저것 돌절구에 갈아 만들어 먹는다. 페스토나 카레를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돌절구 딱 하나만 꺼내 놓고 만들면 설거지가 훨씬 줄어드는 장점도 있다.

이렇게 여름을 즐기니 여름날이 가는 것이 매일 아깝다. 해가 조금씩 짧아지는 것도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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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있는 올리브기름 전문 매장. ⓒ이철재


8월 말에 뉴욕주 페어(New York State Fair)가 2주간 시라큐스에서 열린다. 페어는 원래 농산물 품평회로 시작한 행사인데 사람들이 시끌벅적 모여 먹을 것 사먹고 게임도 하는 연중행사다. 페어가 시작되면 여름이 다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9월 첫 월요일 노동절에 페어가 폐막하는데, 노동절은 전통적으로 여름의 흥청망청한 기분을 접고 가을을 새로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9월이라고 해도 날씨는 여름처럼 후텁지근한 것이 보통이라 그래도 여름 기분을 내며 지내려 안간힘을 쓴다. 날씨가 갑자기 조금 쌀쌀해진다 해도 다시 더운 날이 돌아온다. 이렇게 가을에 여름처럼 더운 것을 ‘인디언 서머’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인디언 서머가 찾아와도 마당에 과꽃이 피면 대세는 이미 기운 것이라고 봐야한다.

 

애디론댁 산맥은 지금, 가을 단풍이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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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올해 여름은 참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과꽃이 피기도 훨씬 전, 노동절도 되기 전, 페어 시작하기 사흘 전 갑자기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중간에 인디언 서머가 몇 번 와서 30도가 넘어가는 날씨가 있었지만, 그것도 하루 반짝 하고 곧 다시 최고 기온이 20도도 되지 않는 날로 돌아가곤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저기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 이제는 영 가망이 없는 듯하다. 그럼 여름은 포기하고 가을이나 즐기자는 심산으로 하루 시간을 내어 애디론댁산맥(Adirondack Mountains)으로 단풍 구경을 가기로 했다.

뉴욕주 북동부에 있는 애디론댁은 사실 산맥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산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곳이다. 산이 딱 하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태백산맥처럼 길게 뻗은 산맥도 아니다. 뉴욕주의 북동쪽 캐나다 바로 아래에 지름 260Km쯤 되는 원이 있다고 치면 그 안에 산들이 옹기종기 둘러서 있다. 업스테이트 뉴욕주의 지도를 보면 맨 위에 애디론댁산맥이 있고, 그 남쪽에 모호크 계곡이 있다. 그리고 모호크 계곡 아래로 애팔래치아산맥(Appalachian Mountains)이 지나간다.

애팔래치아산맥은 미국 남부의 앨라배마주에서 시작해서 뉴욕과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메인, 버몬트주 등 미국 동부를 거의 다 훑고 캐나다의 뉴펀들랜드(Newfoundland)까지 뻗어 있는 산맥이다. 워낙 장대한 산맥이라 흔히 모호크 계곡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애디론댁산맥도 애팔래치아의 일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지질학적으로 서로 다른 산이라고 한다.

애디론댁산맥에서 발견되는 돌들은 약 20억 년 전 적도 근처 바다 밑에 두껍게 형성된 침전물이 현재의 아메리카 대륙이 적도 근방에 떠 있던 시절에 땅위로 올라와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애디론댁산맥의 고향은 적도 바다 속이다. 이 추운 뉴욕주 북부까지 올라와 고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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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절정을 이룬 강가. ⓒ이철재

애디론댁산맥으로 단풍 구경을 가려면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는 방법이 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시라큐스에서 동쪽으로 1시간 정도만 운전하고 가면 유티카(Utica)라는 도시가 나온다. 유티카의 유니온역(Union Station)에서 애디론댁 관람선(Adirondack Scenic Railroad) 열차를 타면 애디론댁산맥 중턱쯤에 있는 올드 포지(Old Forge)라는 곳까지 약 2시간 반 만에 도착할 수 있다.

올드 포지는 인구 800명 정도의 ‘햄릿’이다. 햄릿은 아주 작은 부락이라는 의미로 셰익스피어 연극 제목과 철자가 같다. 올드 포지는 원래 행정구역상 빌리지(Village)였는데 사람이 모자라 1936년 행정구역이 해체되고 햄릿으로 남았다.

단풍 구경 기차는 올드 포지가 종착역이지만, 철로는 100마일 가량 계속 이어져 애디론댁의 최북단이자 유명한 맥주 이름이기도한 사라낙 레이크(Saranac Lake)를 지나고 또 거기서 조금 동남쪽으로 가 1980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레이크플래시드(Lake Placid)에서 끝난다. 사라낙 레이크가 최북단이지만 레이크플래시드가 해발고도는 더 높아 레이크플래시드에서 11마일 정도 가면 마운트 마시(Mount Marcy)라는 애디론댁의 최고봉이 있다.

레이크플래시드에서 동남쪽으로 I-87번 고속도로를 타고 80마일 정도 차를 운전하고 내려가면 알바니 거의 다 가서 레이크 조지(Lake George)라고, 뉴욕 사는 사람들이 여름에 휴가를 즐기는 애디론댁 최고의 휴양지가 나온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그곳에 여름 별장이 있는 사람이 있어 나도 한번 가 봤다. 인터넷도 먹통이고, 전화도 먹통인 곳이다. 그 대신 밤하늘이 놀이동산 불꽃놀이보다 더 화려하다. 별빛과 달빛만으로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레이크 조지에 가던 날 한국에 알리지 않고 갔는데 하필 그날 어머니가 나에게 전화를 하다 계속 불통이라 미국에 있는 모든 친척들에게 전화를 해 내가 사라졌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전화를 걸어댔다. 어머니도 계속 전화를 하셨다. 하룻밤 별장에서 묵고 차를 운전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어느 지점에 이르자 갑자기 전화가 터지고 연달아 땡땡거리는 소리가 났다. 차를 세우고 전화기를 열어보니 이 사람 저 사람이 보낸 문자메시지들이 핵분열을 일으키듯 내 전화기 화면에 계속 뜨고 있었다.

별장 주인 부부가 “다음에는 와서 오래 푹 쉬다 가라”고 해서 그러려고 했는데, 온 미국 땅에 또다시 앰버 경고 발령이 날까 봐 다시 가지 못했다.

 

34개 대리석 기둥으로 유명한 유티카 유니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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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티카 유니온역. ⓒ이철재

과꽃이 만발한 10월 초, 기상캐스터들이 ‘올해 마지막’이라 단언하는 인디언 서머가 24시간 동안 찾아왔다. 낮 최고기온이 37도까지 올라가 78년 묵은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리고 기온이 2도로 급강하 한다는 그 다음날 나는 기차에 몸을 싣고 단풍 구경을 떠났다.

올드 포지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4시간 머물렀다 다음 기차를 타고 올 수 있고, 아니면 도착해 기차를 돌릴 동안 약 30분 주변을 걸어 다니다 곧장 돌아올 수 있다. 4시간 머물다 오려면 아침 8시 기차를 타야 해서 그냥 11시 30분 기차 타고 가서 조금 걷다 오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어차피 전망 칸이 있어 가는 길 내내 사진을 찍고 경치를 구경하며 갈 수 있어 꼭 올드 포지에 오래 머무를 필요는 없다. 관광단을 모집해 보려고 했으나 웬일인지 사람들이 다 시큰둥한 반응이라 나 혼자 갔다. 그러니 더더구나 4시간 혼자 머물며 할 일이 없었다.

유티카 가는 내내 비가 내렸다. 바흐의 <영국모음곡>을 들으며 갔다. 가다 시계를 보고 너무 일찍 떠난 것을 알았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시계도 보지 않고 떠나 출발시간 1시간 반 전인 아침 10시에 도착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온 연안김씨의 「동명일기」 한 구절이 떠올랐다.

“떡국을 쑤었으되 아니 먹고 발발이 재촉하야 귀경대에 오르니….” 

유티카역의 주차장은 착하게도 무료였다. 무료에 익숙하지 않아 차를 세우고도 불안해 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두리번거리다 지나가는 경비원에게 물어봤더니 제대로 주차를 했다고 했다.

유티카 유니온역은 기차 타고 뉴욕시 가면서 늘 서는 역인데 기차에서 내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역 내부는 애디론댁행 열차 덕에 처음으로 구경하게 되었다. 원래 있던 역을 허물고 1914년에 다시 지은 역인데 34개의 대리석 기둥이 유명한 역이다. 기차 전성시절에 지은 역들은 확실히 화려하다. 요즘 인천공항에 공들이는 것 보면 그 당시에 기차역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을까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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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 풍의 낡고 허름한 기차. ⓒ이철재

아침부터 기온이 떨어져 저녁에 잘못하면 서리가 내린다고 하여 우리 할머니 시집올 때 입으셨다던 7겹치마 부럽지 않게 옷을 끼어 입고 나왔더니 더웠다. 기온이 아직 그렇게 많이 떨어지지 않아 전날 인디언 서머의 끈적거리는 습기와 더운 바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겹겹이 끼어 입은 옷 속으로 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렸다. 옷을 들고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미욱스레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그대로 끼어 입고 서 있었다.

드디어 탑승을 하는데 어르신들이 기차에 올라타지를 못해 시간이 오래 걸렸다. 척 봐도 한눈에 승객들 중 ‘막내’인 내가 앞으로 나서 역무원과 함께 탑승을 돕고 나는 맨 나중에 올라탔다. 기차 안은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에 나올법한 오리엔트 특급 풍의 인테리어인데 매우 낡고 허름했다. 벽에 붙은 테이블이 있고, 한 테이블 당 4명이 둘러앉게 되어 있다.

나는 30달러 더 비싼 1등석을 예매했다. 별다른 것은 없고 음료와 간식을 제공한다. 그리고 테이블에 하얀 테이블보가 씌어 있고, 자리마다 하얀 린넨 냅킨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기차에 탑승하는 승무원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라고 한다.

1등석 서빙을 담당한 할머니는 27년간 자원봉사자로 일을 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기차가 출발하자 할머니는 비행기 승무원처럼 카트를 밀고 다니며 음료와 도넛을 서빙했다. 그런데 다른 승객들과 일일이 인사하고, 수다 떨며 서빙을 하느라 내 차례까지 오는데 한참 걸렸다. 왕복 6시간 기차에 앉아 있노라니 그 할머니가 과거에 딱 한 번 결혼을 했는데 7년 만에 이혼했다는 사실까지 얼떨결에 주워듣게 되었다. 전 남편과는 아직도 친구처럼 연락하며 지낸다고 한다.


유티카 늪지대와 폭포를 지나 애디론댁으로 향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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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대를 지나 만난 작은 폭포. ⓒ이철재

기차가 유티카를 떠나 10분정도 가면 모호크강이 나오고 조금 더 지나면 유티카 늪지대(Utica Marsh)가 나온다. 둘 다 업스테이트 뉴욕 생태계의 젓줄이다. 업스테이트는 겨울 날씨가 험악해서 그렇지 사실 굉장히 풍요로운 자연 환경을 갖고 있다. 거짓말 조금 보태 두 발자국만 나가면 강이 있고, 호수가 있고, 늪지대가 있다. 게다가 땅이 비옥해 봄과 여름이 짧아도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시라큐스는 미국에서 가장 자연재해가 없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1년 내내 기후가 쾌적해 살기 좋다고 하지만 늘 물 부족과 산불에 시달리고 언제 큰 지진이 일어날지 모르는 캘리포니아주가 별로 부럽지 않다. 세상이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인 본전치기인가보다. 새들은 멋지게 창공을 날아가지만, 땅에서는 늘 뒷짐을 지고 다녀야 한다.

늪지대를 지나 또다시 10분쯤 가면 옛날에 물레방아가 있던 터가 나오는데 작고 예쁜 폭포도 있다. 그 폭포를 지나면 곧이어 스노우 정션(Snow Junction)이라는 곳이 나온다. 그때까지 서북쪽으로 가던 기차는 여기서 본격적으로 애디론댁 관람선 철로로 들어서 정북향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애디론댁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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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절정을 이룬 강가. ⓒ이철재

일단 기차가 트랙을 바꿔 타면 그때부터 주변 경관이 달라진다. 그때까지 활엽수만 즐비하던 것이 갑자기 활엽수들 사이사이로 상록침엽수인 발삼나무, 스프루스 나무들이 들어차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전화기의 데이터 속도가 LTE에서 3G로 바뀌었다가, 바가 하나로 줄었다가 아예 없어졌다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스튜어디스 할머니는 승객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이제 곧 절경이 나오니 사진 찍을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다. 워낙 오래 이 일을 해 와서 앞으로 5분가면 뭐가 나오고, 10분가면 뭐가 나오는지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다. 승객들에게 “전화기 꺼내 준비하시고… Now!” 하면 모두 셔터를 눌렀다.

한참 가니 퍼거토리힐(Purgatory Hill)이 나왔다. 힐은 언덕이다. 퍼거토리는 우리말로 연옥이다. 단테의 『신곡』 「연옥」편에 보면 연옥은 죄를 짓고 죽은 영혼들이 천국으로 올라가기 전 죗값을 치르고 영혼을 정화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7층으로 된 산이 있다. 이를 칠층산(Seven Storey Mountain)이라고도 부른다. 죄를 지은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자신을 정화하며 한 층씩 올라가는 산이니 얼마나 험할지는 짐작이 간다.

애디론댁의 퍼거토리힐도 그에 못지않다. 게다가 전날 비가 와 젖은 나뭇잎들이 철로 위로 떨어져 상당히 미끄러웠다. 스튜어디스 할머니 말에 의하면 젖은 낙엽이 눈보다 더 미끄럽다고 한다. 기차가 거북이걸음으로 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연상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사실 사진 찍기에는 그게 더 좋았다.

 

무스강을 따라 올드 포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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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바라본 무스강. ⓒ이철재

    

올드 포지에 도착하기 한 1시간 전쯤 기찻길 옆으로 무스강(Moose River)이 나타났다. 기찻길과 평행으로 가다, 사라졌다가 기찻길 밑으로 가로질러 가다가 하면서 네 번을 만난다. 마지막 4번째 만나면 그때부터 올드 포지까지 기찻길과 쭉 평행으로 나간다. 무스강이 처음 나타날 때부터 나는 전망 칸으로 가서 거기 서서 사진을 찍었다.

 미국 장거리 기차들은 더블데커로 2층에 유리 천장을 씌우고 그곳을 전망 칸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올드 포지 행 기차는 그렇게 화려한 기차가 아니다. 전망 칸이라는 것이 화물칸의 문을 활짝 다 열고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난간을 설치한 것이 다이다. 그래도 사진 찍기는 훨씬 좋다. 자리에 앉아서 사진을 찍자니 빗물이 창문에 말라붙어 구정물이 된 것이 모두 사진에 나와서 찍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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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숲과 언덕이 어우러진 강가. ⓒ이철재


무스강을 따라 올드 포지로 들어가는 길은 절경 애디론댁 안에서도 절경이었다. 물과 숲과 언덕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는 경치였다. 전망 칸에 서서 찬바람을 맞으며 무스강을 바라보자니 어린 시절 시청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디즈니사는 원래 만화 영화만 만들던 곳이 아니라 어린이용 영화도 많이 만들었다. 그래서 월트 디즈니 자신이 1주일에 한 번씩 텔레비전에 출연해 영화를 소개해 주고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영어로 〈월트 디즈니의 멋진 세상(The Wonderful World of Walt Disney)〉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디즈니랜드〉라고 해서 방영을 했다. 거기서 봤던 개척 시대에 관한 영화에는 산속에서 좁고 빠르게 흐르는 강 위를 뗏목을 타고 지나가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혹시 그것이 애디론댁에 흐르는 강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내 기억 속의 강과 무스강의 주변 경관이 비슷했다.

 

무스강 앞, 아담한 텐다라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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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포지의 텐다라 역. ⓒ이철재

11시 반에 유티카를 떠나 1시 반에서 2시 사이 올드 포지의 텐다라 역(Thendara Station)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중간에 철로가 미끄러워 거북이걸음을 한 탓에 3시가 거의 다 되어 도착했다. 텐다라 역은 간이역 건물 하나 있고, 철로가 두 개 있고 그걸로 끝이다. 담장도 없다. 역 건물은 아주 작은데 그나마 그 안에 기념품가게 겸 박물관이 함께 들어와 있다.

기찻길은 텐다라 역에서 계속 이어지지만 속세에서 올라오는 기차는 텐다라 역이 종착역이다. 기차 전성시대에는 사라낙 레이크에서 유티카, 뉴욕시, 몬틀리올 등을 오가는 기차가 상시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 그런 시절은 다 갔다. 스튜어디스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요즘 사라낙 레이크의 역에서는 레이크플래시드를 오가는 기차만 운행한다고 한다.

텐다라 역 바로 앞이 무스강이다. 기차에서 내려 무스강으로 가서 사진을 찍었다. 아침에 떠날 때와는 달리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게다가 산속이니 더 추웠다. 옷을 끼어 입고 오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기념품가게에 들어가 그림엽서 두 장 사고 다시 기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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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다라 역에서 바라본 무스강. ⓒ이철재

기관차를 떼어내고 옆 트랙으로 옮겨 기차 꽁무니에 가져다 붙였다. 30분이면 된다고 하더니 1시간이나 걸려 4시쯤 출발했다. ‘오늘 안에 집에 가려나?’ 걱정이 되었다. 기관차가 기차 꽁무니에 가서 붙었으니 내가 앉은 자리는 졸지에 역방향이 되어 어지러워 창문을 내다보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내 테이블에 나 혼자 앉아 있어 자리를 바꿔 앉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브라우니가 간식으로 나왔다.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나는 코코넛을 묻힌 것을 먹었다. 산길을 내려가니 쉽사리 가는 것인지, 그 사이 비가 그치고 철로가 좀 마른 것인지 돌아가는 길은 훨씬 빨라 2시간 만에 유티카에 도착했다. 유티카도 아침보다 훨씬 추웠지만 그래도 산속에서 내려오니 견딜 만했다. 집에 도착하니 저녁 7시였다. 그날 밤 서리는 내리지 않았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단풍 구경 다녀와 사흘 후 토요일 새벽 결국 시라큐스에 첫서리가 왔다. 전날 기상 정보에서 서리가 올지도 모른다고 해서 아직도 촘촘히 맺혀있는 장미 꽃 몽우리를 모두 따줬다. 장미에게 이제 일 그만하고 잘 자라는 신호이다. 바질은 잎을 모두 따고 다 뽑아버렸다. 바질을 잘 씻어 물기를 제거한 후 겹겹이 싸서 냉장고에 잘 넣어두고 저녁에 음악회에 갔다.

시라큐스 챔버 뮤직 동호회(Syracuse Friends of Chamber Music)라고 있는데 올해 시즌 첫 공연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줄리아드 현악 4중주단이 와서 베토벤 사중주 등을 연주했다. 한국에서 가려면 아무리 나쁜 좌석도 비싼데 여기는 전석 25달러이다. 물론 중학교 강당에서 하는 공연이지만, 나는 유명 음악인들이 시골 학교 강당을 찾아와 연주를 하는 것이 참으로 소중하고 기쁘다. 시설이 낙후해도 관객과 연주자가 더 가깝게 앉아 호흡하고, 어떤 때는 휴식 시간에 화장실에서 마주쳐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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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절구에 갈아 만든 바질 페스토. ⓒ이철재

바질 잎은 일요일 하루 종일 목요일에 놀러갔다 와서 밀린 일을 하느라 바빠서 어쩌지 못하다 월요일 저녁에 또다시 돌절구에 갈아 마지막 바질 페스토를 만들어 먹었다. 레가토니 파스타에 비벼먹은 돌절구 페스토, 맛있었다. 남은 소스는 스테이크에 뿌려 먹어야지.

이 가을, 눈과 귀와 입이 모두 호강한다. 그래 여름이 가서 아쉽지만, 그래도 인생에는 가을도 있고, 겨울도 살아보면 그리 나쁘지 않고, 겨울 지나 봄 오면 좀 살 만해지고, 그러다 보면 여름이 또 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불러본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가을을 힘껏 끌어안는다.

 

이철재 미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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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재즈선율   ( 2019-10-16 )    수정   삭제 찬성 : 6 반대 : 0
너무나 맑고 밝은 세상에서 삶을 누리시는게 부럽기도 하고 행복해 하시는 모습 보니 저까지 좋아지고 밝아지네요.
 건강하시고 오래도록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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