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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
이재인의 투유 그림 에세이
할머니와 북토크를 1화.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 할머니에겐 코미디, 나에겐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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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2.28
지은이: 하완, 출판사: 웅진 지식하우스

 

하마터면.jpg

 

"읽는 내내 네 생각이 나서 가져왔어."

지난 9월, 옛 회사 동기가 책을 하나 건넸다.

 

표지에는 다리에 털이 숭숭난 남자 캐릭터가 팬티만 입고 만사 귀찮은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내 생각이 났다고...?"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내 손을 막으며,

"아니, 겉모습이 닮았다는 건 아니고. 일단 읽어봐."

 

정신 없이 지내다 퇴사를 일주일 앞두고서야 여유가 생겨 책을 펼쳤다.

 

완독 소감.

나는 작가와 비슷한 종족(?)임에 틀림 없다. 아직은 어쩔 수 없이 열심히 살고 있으니, 내가 좀 덜 진화한 버전이려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의 첫인상은 할머니에게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 뭐야.. 징그럽게!"

표지를 바라보다 손으로 책을 대충 훑은 뒤 할머니는 말했다.

"안볼래."

 

'이런 트렌디한 책의 감성은 역시 2030세대만을 위한 것인가.'라고 생각한 지 일주일도 안되어 큭큭대며 책을 읽고 있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엥? 안 읽겠다며. 징그럽다더니!"

"어제 신문에 나왔어. 어디서 들어본 제목이다 했더니 이 책인거여. 막상 읽어보니까 재밌는거여."

 

할머니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신문을 구독했다. 그러니까, 60년 넘게 하루의 시작을 신문과 함께 해왔다.

 

그 세월 동안 쌓인 신뢰는 꽤 두텁다. 11월 6일자 조선일보에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의 하완 작가가 짧게 소개됐다. 그것을 보자마자 할머니의 책에 대한 진입 장벽이 단숨에 낮아졌다.

 

첫 번째 북토크는 일요일 낮에 맥주 두 캔을 앞에 두고 진행했다. '묘한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게 한다는 낮술(p117)'을 우리도 시도했다. 작가는 평일 낮을 이야기한 것이었겠지만 아직 난 열심히 살고 있으니 그건 불가능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40을 앞둔 반백수의 유쾌한 위로 에세이'다.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베스트셀러 작가에 등극했지만, 이 책을 집필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을 프리랜서라 쓰고 백수라 읽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이렇다 할 대책 없이 6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자신을, 열심히 살아도 제자리 걸음 중인 젊은 세대를 위로하는 내용이다.

 

'그렇게 너무 애쓰며 살아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토닥이며.

 

처음엔 괜한 반발심에, '그러다 뒤쳐지면 작가님이 내 인생 책임질거유?'라 생각했다. 근데 웬걸, 이미 난 열심히 보내지 않은 순간들이 많았다. 공부에 집중하지도, 신나게 놀지도 않은 그런 순간들.

 

작가는 '열심히 살지 말자'는 만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면 뭐 어때? 괜찮다니까!'며 독자들을 위로한다.

 


“난 늙은이인데도 재미 있던데?”

“그래? 할머니 세대랑은 너무 다른 가치관 아닌가?”

"나 때랑 지금이랑은 다르지. 나 때는 '자아 실현' 같은 건 고민도 안했어. 그냥 다들 흘러가는 대로 살았지. 꼭 맞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흠.. 그럼 요즘 젊은이들은 살만하니까 배부른 고민을 하는건가?"

"그건 아니지. 예전엔 회사에서 과장이면 다 자기 집이 있었어. 지금처럼 '내집마련'이 하늘에 별 따기 같진 않았다, 이 말이여. 어느 세대든 안 힘들다고 할 수 없어. 다 자기가 제일 힘든거야."

 

개인의 '힘듦'을 객관적인 지표로 평가할 순 없지만, 나보다는 할머니의 인생이 배로 고단했다 확신한다.

 

학창시절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었고, 성인이 되자마자 한 제조업 회사에서 경리로 일을 시작했고, 30대와 40대는 홀로 두 딸을 키우느라 고군분투하며 보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질 즈음에서야 할머니는 가장의 무게를 벗었다.

 

"어쩔 수 없지. 그냥, 그런 시대에 태어난 걸 어쩌겠어. 근데 또, 뉴스 보면 요즘 젊은이로 사는 것도 힘들어. 뉴스고 신문이고 맨날 얘기하잖아. 입시난이다, 취업난이다.."

"맞아. 게다가 직장인이 된다고 해서 마음 편하게 살 수도 없어. 이 책의 작가도 그렇잖아. 나도 그렇고."

 

책임질 가족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돈을 못 벌면 큰일나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수십 가지의 이유로 방황 중이다.

 

10대 시절을 되돌아보면 치열하게 공부한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깨어 있는 시간의 반 이상을 책상 앞에서 보내며 매일 생각했다.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 갈 수 있댔어.'

 

그 '좋은 대학'은 딱 2년만 좋았다. 노트북에 입사 지원서를 띄워놓고 커피를 포션 삼아 마시며 생각했다. '스펙 잘 쌓고 자소서 열심히 쓰면 좋은 회사 갈 수 있댔어.'

 

그렇게 좋은 회사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나는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평범한 월급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미래를 위해 인내하며 돈을 벌었다. 내게 돈을 번다는 건, 곧 무언가를 참고 버티는 것이었다. (p.216)”

 

10년을 달린 ‘열심 마라톤’의 결과가 이것이라니.

"나는 참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생을 바랐길래 이처럼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p.278)"

작가님, 즐거운 직장 생활을 바라는 게 SF적인 기대일 줄은 몰랐습니다.

 

안되겠어요, 저도 열심히 안 살렵니다. 그래도 괜찮다면서요!

 

 

퇴사 후 한동안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속 삽화였다.

 

아무리 바다 같은 이해심을 소유하고 있다지만 우리 할머니는 80세, 기성세대 안에서도 고참이다. 

안정적인 삶이 최고라는 생각이 아주 굳건하다.

“작가가 6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잖아. 돈 때문에 자유를 계속 미루기만 하다간 한번도 자유롭지 못한 채 늙어 죽게 생겼다는 위기감이 덮쳐왔다(p.214)잖아. 할머니는 이런 작가의 행동이 이해돼?”

“솔직히 아니지.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월급도 나쁘지 않았다며. 책이 잘됐으니 다행이지만, 무명으로 끝났으면 어쩔 뻔했어.”

“할머니 근데, 나도 두 달 전에 대기업 그만뒀잖아. 그 때 쟤 왜 저러나 싶었겠네?”

“좀... 그렇지?”

“엥? 그런 얘기 없었잖아!”

“네가 오죽했으면 퇴사한다고 했을까, 싶어서 가만 있었던 거지. 그렇게 힘들게 들어간 좋은 회사를 나온다는 게, 늙은이 입장에선 이해가 안되지.”

 

죄송해요, 할머니. 손녀는 새 회사에서도 프리랜서가 될 타이밍을 노리고 있답니다.

 

작가의 생각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는데도 할머니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웃기니까.

“센스가 있어. 그림도 처음엔 숭하다 싶었는데, 자꾸 보니까 아주 재미있어.”

“작가가 이해가 안 되는데도 이 책이 좋다는 거네, 그러면?”

“응. 좋아. 요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싶어서 흥미롭기도 하고.”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할머니에게 한 편의 코미디 영화 같은 책이었다. 반대로 나에겐 재미 요소가 많은 다큐멘터리였다.

 

사회인이 되고 나서부터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고민들이 책에 너무나 현실적으로 담겨 있었고,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거리는 나와 달리 ‘안전하다고 유혹하는 남들이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선택 (p.130)’을 한 작가의 모습이 감명 깊었다.

 

시무룩해지지 않았다. 작가가 그랬다. 사람은 각자의 속도가 있다고 (p.222). 나는 과거의 ‘열심 마라톤’은 잊고 또 다른 마라톤을 위해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있는 중이라 생각한다.

 

마라톤 이름은, ‘아무도 안 시켰는데 그냥 혼자 좋아서 뛰는 마라톤’ 정도가 괜찮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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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이재인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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