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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변호사의 라떼가요
노래는 개인과 사회의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다. 어느덧 라떼 세대가 된 필자가 좋아했던 노래들의 아름다운 노랫말을 곱씹고 노래와 얽힌 기억들을 회상한다. 우리 가요와 사회의 반세기의 이야기가 풍요롭게 펼쳐진다. 나이 든다는 건 기억이 풍성해 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나만의 이야기가 담긴 노랫말 동물원의 <혜화동>
입력 : 2021.10.27

노래는 참으로 신비한 것이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이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이고 노래를 했는데 그 안에 나만의 이야기가 가득 들어 있다.

작년 가을 나는 오래 살던 뉴욕주의 시라큐스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에서의 마지막 가을 풍경을 눈 안에 가득 담으려 매일 음악을 들으며 밖에 나가 뛰었다. 어느 날 <혜화동>의 전주가 흘러나오자 나는 뛰다 말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무언가로 빨려 들어가 시간 여행을 떠나 청소년기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을 봤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내가 다니던 학교를 이가 갈리도록 싫어했다. 매일 등굣길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길 같았다. 그렇게 싫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학교가 떡하니 보일 정도로 가까이 살았다.

미술 시간에 풍경화를 그리면 60명 중 59명이 우리 집을 그렸다. 우리 집을 그리지 않은 한 사람이 나였다. 모두가 우리 집 쪽으로 앉아 그림을 그리는데 나만 돌아앉아 학교 건물을 그렸다. 나는 그림 솜씨가 영 젬병이라 결국 같은 반 인회라는 친구가 그리다 망쳤다는 그림을 받아서 하얀 우리 집 그림에 앙리 마티스 풍의 붉은 색을 덧칠해 제출했다가 ‘독창적’이라는 선생님의 평을 받으며 내 생애 최고의 미술 점수를 받았다. 결국 반 전체가 우리 집을 그려 냈다.

 

동숭동 길을 지나
나무가 우거진 긴 언덕을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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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교얄개>의 한 장면, 보성고가 보이는 혜화동 골목길.

우리 집은 학교 후문으로 나오면 걸어서 5〜6분 거리였다. 아침마다 죽기보다 입기 싫은 까만 교복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학교로 갔으니 오가는 사람들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후문으로 등하교를 하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는데도 2학년 1학기 시작하고 한참 지나서야 같은 반 성원이를 등하굣길에 늘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업 끝나고 오늘도 지긋지긋한 학교생활을 하루 지웠다는 해방감에 휩싸여 후문을 빠져나와 누가 내 뒷덜미를 잡기라도 할 것처럼 서둘러 길을 걷는데 같은 반 성원이가 뒤에서 나를 툭 쳤다. 학교를 죽도록 싫어하면서도 친구는 잘 사귀어서 성원이와 이미 안면 트고 이야기도 여러 번 했는데 그때까지 성원이가 나처럼 매일 후문으로 드나든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성원이는 내가 우리 집 골목으로 들어간 뒤에도 계속 똑바로 한 3분 정도 더 걸어가는 곳에 살았다. 그 뒤로 나와 성원이는 학교 파하면 늘 함께 교문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3학년이 되고 다른 반으로 헤어졌지만 늘 하교 시간에 서로 만나 함께 걸어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성원이는 신부님이 되기 위해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 신학대학으로 진학했다. 신학교 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며 토요일 오후에만 외부인의 면회를 허락했다. 미국에 가기 전 나는 우리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동성고등학교 근처에서 내려 동숭동 길을 지나 나무가 우거진 긴 언덕을 올라 신학교 구내에서 성원이를 만나고 왔다. 성원이는 잘 다녀오라며 학교 구내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선물로 사줬다.

미국에 갔다 다음 해 여름방학에 한국으로 돌아오니 그사이 지하철 4호선의 상계-사당 구간이 개통했다. 지금 4호선 이촌역이 있는 곳은 내가 중학교 시절 과외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곳이다. 그때 그 주변은 암흑천지 우범지대에 진창길이었고 이촌역에는 지금의 경의중앙선만 다니고 있었다.

한번은 과외 끝나고 걸어 나오는데 컴컴한 길에 동네 깡패가 하나 갑자기 등장하더니 나와 내 친구를 불러 세워 돈을 빼앗으려 했다. 어두운 곳에서 목소리만 들리던 깡패 녀석이 내 친구의 주머니를 뒤지려고 몸을 약간 굽혀 얼굴을 앞으로 내밀자 순간 그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내가 깡패 녀석에게 기습적으로 왼손 어퍼컷을 날렸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른 이의 얼굴을 내 주먹으로 힘껏 치고 혹시라도 숨어 있는 다른 깡패들이 나올까봐 친구에게 “뛰자”고 소리를 질렀다. 도망가며 힐끔 보니 그 녀석은 쫓아오지 않았다. 내 주먹이 그렇게 센 것도 아닌데 불의의 일격을 당하며 혀를 깨물었는지 몸을 굽히고 제자리에 가만 서 있었다.

우리는 지하도를 건너 진창길로 나가 캄캄한 길을 마구 뛰어 버스 정류장으로 도망쳤다. 지하철역 공사하는 자재를 그 캄캄한 길에 아무렇게나 방치해 둬서 나는 그만 무엇에 걸렸는지 걸려 넘어져 손목에 금이 갔다. 그런데 바로 그 진창길에 멋지게 4호선 역이 생기고 주변에 인도까지 생겼다. 게다가 가로등도 달랑 한 개씩이나 생겼다.

그 후 나는 한국에 돌아올 때마다 버스 대신 이촌역에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혜화역에서 내려 성원이를 만나러 갔다.

 

내일 먼 곳으로 떠난다면
오늘 가장 생각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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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교얄개>의 한 장면.

동물원이 1988년에 발표한 <혜화동>은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성원이 면회를 다니던 나와 함께 한 노래이다. 전주만 들어도 성원이를 찾아가던 나의 마음과 예고 없이 찾아온 나를 보고 저만치서 환하게 웃으며 달려 나오던 성원이의 모습 등 봉인이 풀린 옛 기억들이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나온다.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

<혜화동>은 동물원의 일원으로 동물원의 거의 모든 노래를 작곡한 김창기가 만든 곡이다. 어려서 실제로 혜화동에서 자라다 가족들과 호주로 이주해 중학교를 다닌 그가 호주로 떠날 때의 마음을 대학생이 된 후의 감성에 버무려 떠나는 친구와 보내는 친구의 마음속에 적당히 나누어 담아 쓴 가사인 듯하다.

내가 처음 미국으로 떠난 것이 3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한국에 왔다 떠나기 전날 친구를 만날 때면 설명하기 힘든 묘하게 싸한 느낌이 목구멍 뒤에 걸린다. 김창기도 호주로 떠나기 전날 그런 느낌이 차 올랐나 보다. 그는 죽마고우에게 전화를 한다.

‘어릴 적 함께 뛰놀던 골목길에서 만나자 하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내일 먼 곳으로 떠난다면 오늘 가장 생각나는 것이 어릴 적 뛰놀던 골목일까?

 

어릴 적 뛰놀던 골목의 아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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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한 장면.

우리 가족은 내가 만 네 살이 되기 두 달 전에 이사 간 집에서 45년을 살았다. 1990년대부터 서울의 주택가 골목에 있던 집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그 자리를 빌딩이 메우기 시작했다. 빌딩 숲속에 둘러싸인 옛 주택가 골목의 마지막 남은 단독주택들이 겪던 일들을 우리도 겪으며 정이 있는 대로 다 떨어졌다.

축구 하며 놀던 공터에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자동차 주차를 놓고 매일 시비가 붙었다. 한강과 반포가 훤히 보이던 내 방 창문으로 앞집의 빨래만 그득히 보였다. 우리 집 담에 거의 딱 붙여 지은 3층짜리 건물에 사는 누군가는 아침마다 우리 집 마당으로 담배꽁초를 버렸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허공에 대고 누구라도 들으라는 식으로 “여기다 담배꽁초 버리지 마세요”라고 큰 소리로 읍소하다시피 하셨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집이 빨리 팔리기만 기다리다 탈출하듯 이사를 나왔다. 어린 시절 추억이 아련히 배어나는 동네 골목의 감상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나의 아버지는 이런 나와 매우 달랐다. 돌아가시기 1년쯤 전부터 아버지가 어릴 적 자랐던 집 이야기를 무척 많이 하셨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수원 지역 지주의 아들이었지만 6남매의 막내였던 탓에 ‘손바닥만’한 땅밖에 물려받지 못했다. 할머니는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도 혼자 글을 깨우쳐 성경책을 독파하고 주변에 보이는 책을 모조리 읽을 정도로 향학열이 강했다.

16세에 수원 부잣집의 실속 없는 막내와 혼인해 한동안 살림만 하다 첫째인 아버지를 낳고 자신의 향학열을 남편에게 쏟아붓기로 했다. 할아버지를 꼬드겨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손바닥만 한 땅 쪼가리를 팔아치우고 그 돈으로 가족을 이끌고 상경했다. 집안 어른들은 “며느리 잘 못 들어와 땅 팔아먹고 집안 망하게 생겼다”고 뒤늦게 노발대발했다.

혜화동에 집을 구하고 할머니는 삯바느질을 하고 하숙치며 할아버지를 의사로 만들고 자식들 모두 대학 교육을 시켰다. 처음 자리 잡은 혜화동에서 나의 아버지는 당시의 혜화소학교 1학년으로 입학했다.

아버지는 미국에 있는 나와 매일 전화를 하면서 늘 마지막에 혜화동 이야기로 옮겨가곤 하셨다. 길에서 같은 초등학교 6학년으로 입학해 만학도의 길을 가던 할아버지를 보고 “아버지” 하고 불렀다 길에서 아는 척하지 말라고 혼났던 이야기, ‘방울떡’이라는 정체 모를 음식을 사 먹다 경기중학교 수험표를 잃어버린 이야기 등 그 오래전 살았던 곳에 대한 기억이 무궁무진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의 모교인 배재 중학교의 옛터를 지나갔다. 그때 내 눈앞에 보이던 새까만 교복을 입은 어린 내 모습에 미소 지었다. 그때 처음 느꼈다. ‘아, 이런 것이 어릴 적 뛰놀던 골목의 아련함인가 보다.’ 그래서 아버지도 김창기도 멀리 떠나기 전 어릴 적 뛰놀던 골목길을 생각했나 보다.

동물원 下 편에서 계속...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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