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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
뉴욕 변호사의 엑스팻 생활기
엑스팻(Expat)이란 외국에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엑스팻으로 반평생을 살아온 필자 이철재 변호사가 뉴욕에서의 엑스팻 생활을 풀어나가며 그곳의 일상적 모습 혹은 관광객들이 모르고 지나가는 곳들을 소개한다.
이방인 속의 이방인 上 엑스팻이 뉴욕을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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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1.25
이제부터 나의 뉴욕 주에서의 엑스팻 생활을 풀어나가려 한다. 여유로운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 뉴욕의 작은 마을에 시간이 허락하는 한 길게 머물며 천천히 그 마을의 분위기를 느끼고, 혹은 맨해튼의 휘황찬란한 거리로 나가 이방인 속에 나를 묻고 내가 이방인들의 이방인이 되어 크고, 작고, 일상적이고, 역사적인 것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내 삶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
Ⓒ셔터스톡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는 1920년대 프랑스 파리에 살던 미국인들의 이야기이다. 등장인물 중 주인공인 제이크 반즈(Jake Barnes)는 언론사 특파원이고, 그밖에 창작의 자유를 찾아 미국을 떠나 파리로 온 작가 혹은 그저 인생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영어로 엑스페트리어트(Expatriate), 줄여서 엑스팻(Expat)이라고 한다. Ex는 ‘밖’이라는 뜻이고, Patria는 ‘조국’이다. ‘조국 밖’에 있는 사람이다. 꼭 이민자만이 아니라도 국적은 조국의 국적이지만 장기간 외국에 체류하는 사람들도 모두 포함한다.

나는 내 인생의 반 이상을 엑스팻으로 살았다. 학업을 위해 학생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처음 건너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산 것이 30년이 훌쩍 넘었다. 전 세계 인종들이 모여 산다는 뉴욕에 처음 발을 붙인 것도 30년이 되어 온다. 

유학을 떠난 뒤 대학원 마치고 한 번, 로스쿨 마치고 한 번 한국에 돌아와 총 8년간 병역도 필하고 직장도 다녔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 살면서도 엑스팻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랜 세월 엑스팻으로 살다보니 어디를 가도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학업을 위해 뉴욕시의 브롱크스로 이사했을 때 뉴욕이 나를 그리도 강렬히 끌어당겼는지 모를 일이다.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뉴욕에 이방인인 나는 강물에 떨어진 물방울 같기 때문이다.

 

온갖 인종이 모여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곳

대학원은 다운스테이트인 뉴욕시 브롱크스에서 다녔고, 로스쿨은 업스테이트인 시라큐스에서 다녔다. 지금도 시라큐스에 살고 있지만 나의 변호사로서의 대부분의 일은 맨해튼에서 벌어진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텍사스로 건너가 대학의 행사가 온 마을의 행사인 작고 조용한 고장에서 4년을 보내고 뉴욕시로 이사를 하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텍사스는 1년의 대부분이 찌는 듯 더운 날씨라 자가 운전이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고 길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헌데 뉴욕에 오니 대도시답게 모두가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웬만한 곳은 걸어 다닌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대도시인 서울에서 나고 자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익숙했지만, 걷는 것은 그리 즐기지 않았다. 뉴욕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걷다보니, 상상도 못했던 구경거리들에 심취해 나도 웬만한 곳은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뉴욕시의 거리는 별별 건물과 사람들로 북적인다. 심지어 복잡하기 그지없는 브로드웨이 길 한복판에 작은 양탄자를 깔고 기도를 바치는 이슬람교 신도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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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스톡
내가 대학원에 진학할 무렵만 해도 뉴욕시는 범죄가 극심하고 위험한 지역이 많아 길을 잘 알고 다녀야 했다. 타임스 광장은 특히 우범 지역으로 해가 지면 기피해야 할 거리였다. 맨해튼 북쪽에 있는 클로이스터즈(Cloisters)라는 아름다운 박물관에 가려면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말고 환할 때 택시를 타고 다녀오라는 말도 여러 번 들었다. 내가 다닌 포담 대학(Fordham University)이 인접해 있던 남 브롱크스(South Bronx)는 특히 험악하기로 악명을 떨치던 곳이라 ‘어느 동네는 경찰을 불러도 아예 오지도 않는다,’ ‘근처 지하철역이 미국 내 13번째로 살인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역이다’라는 등 별별 소문이 흉흉했다. 저녁 늦게 대학원 수업이 끝나 혼자 밤길을 15분 정도 걸어 아파트로 돌아가려면 늘 발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세계 제일의 가족 동반 관광지로 손꼽히는 근래의 뉴욕시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 시절 뉴욕은 그랬다.    
하지만 그때도 뉴욕시는 그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수도였다. 뉴욕으로 이사해 한 달이나 되었을까 한 어느 날 나는 맨해튼의 66번가 링컨센터 앞에서 지하철 1번 트레인을 타고 타임스 광장인 42번가에서 내렸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Grand Central Terminal)로 가기 위해 맨해튼을 동서로 이어주는 셔틀 트레인으로 갈아타야 했다. 역 환승 구역을 걸어가는데 한 재즈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몸집이 작은 소녀 같은 색소폰 플레이어가 앞으로 나와 신들린 듯 몸을 흔들며 애드리브로 솔로를 하기 시작했다. 그 소녀는 동양인이었다. 흑인과 동양인, 백인, 라티노 등 온갖 인종이 모인 밴드였다. 신나는 음악에 취해 기차 놓치는 것도 잊고 보던 나는 ‘아, 이것이 뉴욕이다. 온갖 인종이 모여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곳’이라 속으로 감탄했다. 물론 그건 스물 몇 살 이상주의자가 단편적인 뉴욕의 모습을 보고 한 생각이었다. 현실은 그리 녹녹하고 간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바로 그 순간 나는 뉴욕과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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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미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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