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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변호사의 라떼가요
노래는 개인과 사회의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다. 어느덧 라떼 세대가 된 필자가 좋아했던 노래들의 아름다운 노랫말을 곱씹고 노래와 얽힌 기억들을 회상한다. 우리 가요와 사회의 반세기의 이야기가 풍요롭게 펼쳐진다. 나이 든다는 건 기억이 풍성해 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나훈아는 어떻게 가황(歌皇)이 되었나 나훈아下 <남자의 인생>
입력 : 2020.10.14

내가 어렸을 때는 나훈아와 남진이 쌍벽을 이루며 한창 날선 경쟁을 하고 인기 가도를 달릴 때였다. 나훈아가 공연하는데 어느 괴한이 무대로 올라와 깨진 병 조각을 나훈아의 얼굴에 그어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이 남진의 사주를 받은 사람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남진 팬과 나훈아 팬 사이에 싸움이 나기도 했다. 그 사람은 나중에 남진의 목포 본가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한창 둘이 화제를 몰고 다니던 시절에도 ‘멋쟁이 높은 삘띵’ 하며 나중에 알고 보니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방한 몸짓으로 여성 팬들을 홀리던 남진은 텔레비전에서 여러 번 본 기억이 나는데 나훈아는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당연히 자주 보고 라이방 색안경 끼고 싱글싱글 웃으며 춤을 추는 남진 아저씨가 멋있었다. 하지만 나훈아의 노래인지도 모르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그의 노래를 엄청 많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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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나훈아와 남진이 쌍벽을 이루며 인기 가도를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방송 화면 캡처.

우리 집에 나의 형이 돌이 되기 전에 와서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밥을 하던 아주머니가 계셨다. 그때는 시골에서 혼자된 사람이나 어린 아가씨들이 연줄연줄 서울에 있는 가정에 밥하고 빨래하는 가정부로 취직을 했다. 흔히 식모라고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여서 인건비가 싸고 서울과 농촌의 생활 수준 차가 극심했다. 서울에 사는 웬만한 중산층 가정은 입주 가정부 한둘 정도는 둘 수 있었고, 시골에서 오는 사람은 숙식을 모두 제공 받으니 잘만 하면 고향에서 만져보지 못한 목돈을 모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물레방아 도는데> 가사에 얽힌 사연

전라남도 함평군에 속한 학교라는 마을에서 온 아주머니는 남편이 16년 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수감 중이어서 서울로 오게 되었다. 남편이 감옥에 간 지 1년 뒤에 우리 집에 와서 남편이 만기 출소할 때까지 있었으니 15년을 우리와 살았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손에 주부습진이 생긴 아주머니의 10년 근속 선물로 우리 집에 금성 세탁기를 처음으로 들여놓았다. 한 대에 10만 원 정도 했던 것 같으니 큰돈 쓴 것이었다. 그만큼 아주머니는 우리 한 가족이었고, 우리 형제에게 그 당시 아주머니가 엄마 다음이었다.

이 아주머니가 나훈아 팬이었다. 부엌에 늘 라디오를 틀어놓고 나훈아의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니 우리는 제목도 가수도 모르고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고-향에 물레방아아아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하며 노래를 외워 불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하는 것은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1969년에 나온 노래이고 ‘고향에 물레방아’는 1972년에 나온 <물레방아 도는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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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려서 먹던 음식, 혹은 어려서 활동하다 지금은 사라진 배우의 근황 등이 궁금해 인터넷을 뒤질 때가 있다. 2〜3년 전 <물레방아 도는데>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사실 노래 제목도 몰라 ‘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나훈아’라고 검색했다. 깜짝 놀란 것은 경남 하동군에 <물레방아 도는데> 기념비가 있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진짜로 물레방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기념비가 들어서 있다.

하도 신기해 이 노래의 배경에 대해 좀 더 찾아봤더니 두 가지의 이야기가 있었다. 이 노래의 작사가는 정두수이고 그의 가사에 박춘석이 곡을 썼다. 정두수의 고향이 경남 하동이다. 여기까지는 모두 이야기가 같다. 그다음부터 어떤 글에서는 이 가사가 정두수가 어렸을 때 일본군에 의해 징용을 당해 끌려 나갔다 전사한 그의 삼촌을 기리는 가사라고 하고 어느 글에서는 1970년대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붐이 일어나면서 서울로 떠나 소식이 끊긴 사람을 기다리는 여심을 그린 노래라고도 한다.

작사가 정두수의 개인사에 징용 끌려 나갔다 전사한 삼촌이 있을 수는 있지만 가사는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로 떠나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그 시절 자주 듣던 표현이다. 대도시 공장에 일자리를 잡아 떠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게다가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널 때 뒤돌아보며 서울로 떠난 사람’이 ‘새봄이 오기 전에 잊어버렸나’ 하는 것을 가만 들어보면 뭔가 원망조이다. 징용처럼 좋지 않은 일로 끌려 나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새 봄이 오기도 전에 잊어버린 것 아니냐고 따지듯 묻지는 않을 것이다.

6·25 때 북으로 피랍된 남편을 그리는 <단장의 미아리고개>에서도 단장, 즉 창자를 끊는 고통으로 아내가 노래한다. ‘십년이 가고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우리 가족 다 잊어버렸냐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다고 한다.

사람이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물레방아 도는데>의 떠난 임도 그렇게 서럽게 뒤돌아보며 떠났지만 공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도시의 화려한 맛을 보니 고향 생각이 점점 잊힌 것이 아닐까? 그를 보낸 사람은 오늘도 돌아가는 물레방아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이리도 애타게 그를 기다리건만….

 

나훈아, 인기만큼이나 뜨거웠던 '열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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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 부르는 김지미. 방송 화면 캡처

나훈아는 1976년 영화계의 거물급 스타 김지미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김지미의 고향인 충남 신탄진으로 이사해 살고, 나훈아는 방송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신탄진에 사는 이야기는 엄마 따라 미장원 갔다 주간지에 실린 것을 봤다.

신탄진이란 지명이 아직도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그 당시 신탄진이란 담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자, 은하수 등과 함께 담배 가게에 늘 진열되어 있었다. 1965년 신탄진에 대규모 담배공장을 준공하면서 그 기념으로 출시한 담배인데 출시 당시 버스요금이 10원, 자장면 한 그릇 값이 50원인데 반해 신탄진 담배는 60원이나 하는 고급 담배였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 담배 심부름을 다니던 무렵부터는 좀 천덕꾸러기 담배가 되었는지 아버지는 은하수, 거북선, 태양, 솔 등으로 갈아타며 피고 청자나 신탄진은 한 번도 사 오라고 시키신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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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와 김지미는 1982년까지 6년 정도 함께 살았다. 어떤 사람은 결혼했다 이혼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실혼 관계였다고 한다. 그런 건 별로 관심 없다. 이 기간 나훈아는 노래 잘하는 가수에서 자신의 철학과 문학이 있는 예술가로 거듭난 것 같다.

결별 1년 전인 1981년 발표한 <울긴 왜 울어>부터 자작곡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남진은 미국으로 이민 갔지만, 이때부터 나훈아는 활동이 조금 활발해졌다. 나도 나훈아의 텔레비전 공연을 종종 봤던 기억들이 있다.

창법도 내가 기억하던 1970년대의 얌전하고 서러운 창법과 달리 훨씬 공격적으로 꺾기를 하며 노래를 불렀다. 이 시기부터 <잡초> <무시로> <갈무리> <청춘을 돌려다오> <세월 베고 길게 누운 구름 한 조각> <남자의 인생>처럼 곡도 좋고 가사도 가슴을 울리는 자작곡들이 수도 없이 나왔다.

<울긴 왜 울어>는 나만큼이나 술을 못 마시던 고등학교 동창 정석이가 고3 소풍날 어디 숨어 술을 마시고 벌겋게 돼서 장기자랑 시간에 미스터트롯의 '찬또배기' 이찬원 못지않게 꺾어가며 불렀다. <세월 베고 길게 누운 구름 한 조각>은 제목이 한 폭의 그림이다. ‘삐딱하게 날아가는 저 산비둘기 가지 끝에 하루를 접네’는 시라 생각하고 읽고 또 읽었다.

 

아버지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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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트롯의 맛에서 장민호가 제2의 인생곡으로 꼽은 <남자의 인생>을 열창하고 있다. ⓒTV조선 화면 캡처

<남자의 인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쯤 있다 나온 노래라 처음 나올 때부터 좋아했다. 얼마 전 미스터트롯의 장민호가 불후의 명곡에서 이 노래를 어찌나 구성지게 몰입해서 부르는지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나도 코끝이 찡했다.  

어린 나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요즘 말로 꽃길만 걸어간 분이었다. 성장하면서 그런 아버지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공부가 잘되지 않을 때 직장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아버지가 부럽기도 했다. 헌데 어느 날 아버지에게도 힘든 날이 있었나 보다 생각하게 되었다.

서울의 로펌에서 일할 때 로펌 변호사들끼리 점심을 먹는데 한 변호사가 “난 직장에서 힘든 날은 꼭 집에 가면 자는 아들을 깨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가끔 아버지도 늦게 들어오셔서 자는 나의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날이 있었다. 선잠을 깬 난 칭얼댔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꼭 끌어 안아주고 나가셨다. 뻥 뚫린 성공의 고속도로 같았던 아버지의 인생에도 힘든 날이 있었나 보다.

<남자의 인생>이 나오기 1년 전인 2016년 나훈아는 김지미와 결별 이후 결혼한 부인과 5년의 법정 공방 끝에 이혼한다. 나훈아는 이혼을 원하지 않았지만 부인이 줄기차게 원했다. 둘 사이의 이야기는 밖에서 보는 내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다만 우리 법의 유책주의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은 했다.

결혼이란 누구에게 잘못이 있든 한 쪽이 더 이상 지속할 의사가 없다면 이미 파탄 난 것이다. 그걸 법원이 남의 사생활을 미주알고주알 캐 듣고 더 살아라 마라 결정을 해준다는 것이 월권이라고 생각한다. 나훈아의 팬이지만 이때만은 부인의 뜻대로 이혼이 성립하길 바랐다.  

 

세월을 반주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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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조선 '미스터트롯의 맛'에서 <영영>을 부르는 임영웅. ⓒTV조선 방송화면 캡처

이 글을 쓰는 2〜3일 계속 포기하지 않고 유튜브에 들어가 《대한민국 어게인》 실황을 뒤진 덕에 드디어 하나 건졌다. 약 30분짜리 영상인데 누군가가 텔레비전 화면을 녹화해 올린 것 같다. <갈무리> <비나리> <영영>을 기타를 치며 불렀다. 좀 더 느끼해진 면이 없지 않으나, 목소리는 나이가 무색했다.

힘을 20% 정도 뺀 노래는 완급 조절의 극치를 보는 것 같았다. 언젠가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인터뷰에서 빠른 곡을 눈이 돌아가도록 쳐서 청중을 열광케 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은 피아니시모 한 음을 땅하고 쳤을 때 청중이 감동하는 그런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다. 끊임없이 갈고닦은 사람에게 세월의 내공이 쌓일 때 가능한 연주이다. 나훈아의 노래가 그랬다. 가만히 앉아 때로 흥이 나면 기타를 손으로 탁탁 치지만, 제스처를 심하게 쓰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가사를 따라가는데 오히려 가사에 집중하게 되고 가슴이 먹먹해 왔다. 

임영웅이 추석 연휴 동안 이미자와 나훈아의 노래를 들으니 자신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당연하다. 앞으로 40년 더 세월을 쌓아야 하니까. 아무리 나훈아가 노래를 잘해도 누가 그의 나이 서른일 때 그를 가황이라 불렀다면 다들 웃었을 것이다. 

지금 임영웅에게는 서른의 노래가 있는 것이고 나훈아에게는 70여 년 세월이 쌓인 노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서른의 노래는 서른이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앞으로 임영웅이 해야 할 일은 나훈아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 관리 잘하면서 서른과 마흔과 쉰의 노래를 차곡차곡 불러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세월을 반주 삼아 70세 임영웅의 노래를 하는 것이다.

나는 《내일은 미스터 트롯》을 보며 임영웅뿐 아니라 참가자 전원의 높은 수준에 놀랍고, 자랑스럽고 그런 실력자들이 무명으로 고생했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나훈아가 이번 공연 중에 이제 나이가 있으니 언제 노래를 그만둘지 모르겠다고 했다. 언제든 이런 후배들을 보면 “나는 내 안에 것들을 다 쏟아냈다. 이제 너희도 쏟아라” 하며 마음 든든하게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나훈아의 추석 공연을 시청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이야기하려다 나의 어린 시절, 유학 시절을 지나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에 우리 가요계 전망까지 다 나왔다. 추석날 한국에서 나훈아의 공연을 텔레비전으로 봤던 사람들도 하나하나 붙잡고 이야기해 보면 어린 시절부터 오늘까지 나훈아의 노래와 연관된 이야기가 이만큼 나오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게 나훈아의 노래이다. 나훈아가 한 곡의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는 수많은 사람의 인생 깊숙이 들어가 꽂힌다.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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