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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
이재인의 투유 그림 에세이
유쾌함과 유익함의 교집합에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자 하는 크리에이터. 책, 빵, 그리고 여행을 사랑하며 그에 대한 글과 그림을 많은 이들과 나누고자 한다.
할머니와 북토크를 2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지금의 나를 만든 과거의 따뜻한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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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1.21
지은이: 포리스트 카터, 출판사: 아름드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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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다닌 대기업에는 한 달에 한 권 원하는 책을 지원해주는 복지제도가 있었다. 매월 20일에 신청한 책은 25일쯤에 집으로 배송됐다.  

할머니는 그 책을 며칠간 읽고 또 읽었다. 회사에서는 공짜로 책을 주는 대신 그에 대한 온라인 평가를 치르게 했다. 시험이라면 질색하는 나를 대신해 할머니는 독서 평가 만점을 월간 목표로 정했다.  

성실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할머니는 대부분 고득점을 받았다. 심지어 세 번은 100점이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그 세 권 중 한 권이다. 이 책의 어떤 매력이 할머니를 그렇게 끌어당긴 것인지 궁금했다.  

한가했던 어느 토요일 낮에 별 기대 없이 이 책을 들고 거실 책상 앞에 앉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고개는 책 쪽으로 기울어졌고, 일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화자가 다섯 살에 부모를 잃고 체로키 인디언(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부족 중 하나)인 조부모와 함께 자연 속에서 살았던 2년의 시간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책의 배경인 1930년대에 그들은 과거의 인디언 이주법(1830년부터 20년 간 미국 내 원주민들은 강제로 고향을 떠나 미시시피 강 서부 지역으로 이동했다)’으로 인해 미국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체로키는 마지막까지 강제 이주에 저항한 집단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도 외부인들의 공격적인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는 인디언으로서의 당당함과 자부심이 두드러진다.  

집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씩을 앞에 두고 나는 할머니에게 이 책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것은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지만, 이후 우리의 북토크는 거의 책 안의 내용에 초점을 맞췄다.  

객관적으로 좋은 책이 어떤 것인지 난 모른다. 그것을 평가할 식견도 부족하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을 움직이는 책을 좋아한다. 일상 생활에서는 잔잔한 감정을 파도 치듯 크게 울렁이게 만드는 그런 책 말이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자연의 포근함에서, 이웃과의 교류에서, 무엇보다도 가족의 사랑에서 오는 따뜻함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감정의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렸던 건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작은 나무(<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속 화자의 인디언식 이름)’를 보호하려던 할아버지가 뱀에 물려 위험에 처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할머니는 입고 있던 치마를 찢어 할아버지의 상처 위에 묶는데, 치마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진짜 웃기지 않니?(할머니는 정말로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상상하니까 너무 웃음이 나오는거야.”  

며칠 뒤, 할머니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작은 나무를 데려갔어. 그런데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그리워서 매일 밤 창가에서 별을 보면서 그리워해. 너무 슬프다고. 나 진짜 눈물 날 뻔 했어.”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인디언 노인 부부에게는 아이를 양육할 자격이 없다며 정치인들이 작은 나무를 근처 고아원으로 데려간 에피소드를 읽은 뒤의 반응이었다.  

이후에도 할머니의 감정 롤러코스터는 계속됐다.

 


 

 

할머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본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보니까 주인공이랑 나이 차이가 몇 살 안 돼, 내가. 다섯 살 때는 기억이 안 나고제일 오래된 기억이 국민학교 때지, 아마?  

그 때가 일제강점기 시대야. 교문 들어가기 전에 나무로 만든 신사에서 참배하고. 수업은 일본어로 듣고. 학교에서는 큰 이모(본인의 자매를 지칭할 때 항상 엄마를 기준으로 큰 이모와 작은 이모라 말한다)를 가와모도 에이키, 작은 이모를 가와모도 에이께이로 불렀던 것 같은데. 정작 내 이름은 기억이 안 나네.  

어쨌든 그 시절엔 일본인들이 우리가 추수한 쌀을 몇 가마씩 가져가고 놋대야나 놋그릇도 빼앗아가고 그랬지.”  

아니, 누가 보면 별 일 아닌 줄 알겠어. 너무 담담하게 얘기해서!”  

벌써 몇 십 년이 지났는데. 나 살던 데는 워낙 시골이기도 하고.”  

그럼 작은 나무처럼 자연에서 뛰놀았던 기억은 없어?”  

있지. 몇 살 때인지는 모르겠는데 집 뒤에 있던 산으로 산딸기 따먹으러 갔어. 친구들이랑 만나면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조개 껍데기 모아서 소꿉놀이하고. 소나무 껍질 벗겨서 송진 핥아먹고.”  

송진을 먹어..? 먹을 수 있는 거야, 그거?”  

먹으려면 먹지. 그땐 공해도 뭣도 없었어. 밀 있잖아, 그거를 옷에 넣는 고무줄을 조금 잘라가지고 같이 질겅질겅 씹으면 쫄깃쫄깃한 게 껌처럼 됐어. 말하다 보니 갑자기 생각나네.”  

“!!”  

70년 가까이 된 이야기를 하는데도 할머니는 막힘이 없었다. 커피가 다 식어 전자레인지에 데우러 가는 나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할머니의 입은 쉬지 않았다.  

다른 간식은 없었어? 책에서는 보니비(작은 나무의 할머니의 이름이며, ‘예쁜 벌이라는 뜻이다)가 옥수수로 과자랑 빵 만들잖아.”  

약밥이나 식혜도 있었고. 작은 나무가 시내에 나가면 사먹는 사탕처럼 우리 동네 구멍가게에도 이만한(엄지와 검지를 구부려 원을 만들었다) 알사탕을 팔았어. 설탕이 오돌토돌 붙어있었지.”

나 역시도 책을 읽는 동안 어릴 때의 단편적인 기억들이 생각났다. 그 기억 속엔 염색을 하지 않아도 머리가 까맣던 할머니와 할머니의 허리까지 밖에 안 오던 초등학생의 내가 있다.  

책 속에서 보니비는 좋은 향이 나는 벌레를 잡아온 작은 나무에게 좋은 일이 생기거나 좋은 것을 손에 넣으면 무엇보다 먼저 이웃과 함께 나누도록 해야 한다(110)’며 칭찬했다. 할아버지는 작은 나무와 사냥을 할 때 인디언은 절대 취미 삼아 낚시를 하거나 짐승을 사냥하지 않아. 즐기기 위해서 살생하는 것보다 세상에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단다(191)’라는 가르침을 줬다.  

이런 장면들이 오래 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소풍을 위해 도시락을 준비할 때면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며 넉넉하게 김밥을 싸던 모습. 학원에 가기 싫어 거짓말하고 친구 집에 놀러 간 나를 혼내며 정직하게 살아야 된다고 몇 차례나 강조하던 모습. 받아쓰기 점수가 좋지 않아 우울하던 내 등을 토닥이며 다음에 잘하면 된다며 격려하던 모습.  

문득 기억의 주인공인 할머니가 내 맞은 편에 앉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화자처럼 현실에 없는 대상을 홀로 그리워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때는 오크색 나무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이 순간까지 추억하게 될 것이고 

근데 

, 할머니. ?”  

다섯 살 때의 기억이 저렇게 선명할 수가 있나? 좀 비현실적인 거 아니야? 한국 나이로 일곱 살이라고 해도 말이지. 아니, 위스키로 가득한 유리병을 어떻게 일곱 살이 몇 개씩 나르냔 말이야. 작은 나무의 나이를 세 살만 높이면 될 것 같은데…”  

건의해, 출판사에?”

아니, 그냥 그렇다는 거지. 좀 아쉽다고. 그나저나 우리집에 새로 읽을 책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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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이재인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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