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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과 함께 한 과학자 마리 퀴리 (Marie Curie, 1867. 11. 7~1934. 7. 4)
입력 : 2020.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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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신로아
 마리 퀴리는 모국어를 쓰거나 읽을 수 없는 피지배국가에서 자랐고, 여성은 대학을 갈 수 없는 교육 체제 속에서 최초의 이학박사, 최초의 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최초로 노벨상을 2회 수상1)한 인물이다. 서로 다른 과학 분야(물리, 화학)에서 각각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역사상 그녀가 유일하다. 남편과 두 딸, 두 사위도 전부 노벨상을 수상하여 마리의 가족은 전무후무한 역사로 남아있다.
1) 노벨상 2회 수상자
- 라이너스 폴링(Linus Carl Pauling, 1901~1994): 화학 결합 오비탈 이론, 전기음성도를 밝혀 1954년 노벨 화학상, 핵실험 금지를 위한 반핵 평화 운동으로 1962년 노벨 평화상 수상
- 프레더릭 생어(Frederick Sanger, 1918-2013): 인슐린의 아미노산 배열순서 규명으로 1958년 노벨 화학상, DNA 유전 정보와 직결된 핵산의 염기결합서열 결정 방법 개발로 1980년 노벨 화학상 수상
- 존 바딘(John Bardeen; 1908-1991): 트랜지스터 발명으로 1956년 노벨 물리학상, 초전도 이론으로 197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녀의 어릴 적 이름은 마냐 스클로도프스카(Manya Skłodowska)였다. 당시 폴란드는 역사 속에만 존재하는 나라였다.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독일), 러시아가 폴란드를 세 차례나 분할하여 1795년 폴란드를 세계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바르샤바에서는 폴란드의 역사와 언어를 가르치는 일이 금지되고 있었다.
 마냐의 어머니 브로니슬라바(Bronislawa Sklodowska)는 학교장이었으나 마냐를 낳으면서 학교를 그만 두었다. 마냐의 아버지 브라디스와프(Władysław Skłodowski)는 공립학교에서 물리와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였으나 사상을 의심받아 한동안 실직했고, 월급이 적은 학교로 직장을 옮겨야 했다. 마냐의 어머니는 여학생 십여 명을 모아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마냐는 여학생들과 함께 폴란드 역사와 폴란드어를 배웠다.
 마냐가 아홉 살일 때 맏언니 조피아(Zofia)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고, 열한 살 때 결핵을 앓고 있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마냐는 어머니가 죽고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1883년 6월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져서 시골 친척집들을 돌며 휴양의 시간을 보냈고, 1년 후 바르샤바로 돌아와 비밀리에 혁명단체가 운영하는 ‘이동 대학(flying university)’을 다니며 공부했다. 이동 대학은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공부하는 장소를 계속 이동했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다. 마냐의 오빠 조제프(Józef)는 바르샤바 의과대학에 입학했지만, 당시 바르샤바에서 여성은 대학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다.
 마냐와 언니 브로냐(Bronisława Dłuska, 1865~1939)는 학업에 대한 열망이 컸기 때문에 프랑스 유학을 결심했다. 자매는 일종의 릴레이 학업 계약을 맺었다. 언니가 공부하는 동안은 동생이 돈을 벌어 송금하고, 언니가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얻으면 언니가 동생의 학업을 돕기로 약조한 것이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냐는 시골로 내려가 입주가정교사를 시작했고 돈을 벌어 언니에게 수년 동안 송금했다. 언니 브로냐는 의학 공부를 했고 대학에서 만난 폴란드 출신의 의사와 결혼한 후 약속대로 동생의 학업을 지원했다.
 1891년 가을 24세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마냐는 언니 집에 몇 달 머물다가 소르본 대학에 가까운 싸구려 아파트를 얻어 입주했다. 소르본 대학(Sorbonne Université)에 등록할 때는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며 ‘마리(Marie)’라는 이름을 썼다. 그녀는 공부 이외의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1893년 물리학 리상스(licence, 석사학위에 해당)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덕분에 후원 장학금을 받게 된 마리는 두 번째 전공으로 수학을 택했고 1894년 차석으로 학위를 받았다. 
 1894년 27세의 마리는 국가산업진흥협회에서 제안한 연구를 수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1906)를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았다. 피에르 퀴리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홈스쿨링을 통해 파리과학부(Faculté des sciences de Paris)에 입학하여 16세에 물리학 학사, 18세에 석사를 딴 인재였다. 그는 파리물리화학산업대학원(ESPCI Paris)의 연구책임자였으며, 파리 남쪽의 도시 소(Sceaux)에서 부모와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다. 피에르는 21세 때 형 자크(Jacques Curie, 1856-1941)와 함께 수정(水晶)을 연구하여 압전 효과2)를 발견하였고, 국제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2) 압전 효과: 기계적 일그러짐이 발생할 때 전류가 발생하는 현상. 압전 소자를 이용한 대표적인 물건은 전자 라이터, 마이크로폰, 수정 시계, 압전 LED 등이 있으며, 사람의 근육 힘줄도 압전기 현상을 일으킨다.
 1894년 마리는 학위를 마쳤으므로 고국 폴란드로 귀국했다. 그런데 피에르 퀴리가 그녀에게 프랑스로 돌아오라고 여러 번 편지를 썼다. 서른다섯이 되도록 여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였지만, 인생과 학문을 함께할 반려자로 손색없는 마리에게 반한 것이었다. 결국 마리는 그의 청을 받아들여 프랑스로 돌아왔다.
 1895년 3월 피에르 퀴리는 물질의 자기 특성에 관한 논문을 써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파리물리화학산업대학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자성을 가진 물질이 특정한 높은 온도에서 자성을 잃게 되는 온도를 ‘퀴리 온도(Curie temperature)’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그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그해 피에르는 마리에게 청혼했고 7월 26일 소(Sceaux)의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부터 마리는 프랑스 국적을 갖게 되었다.
 1896년 마리는 물리학 고급교사자격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고, 1897년 9월 첫째 딸 이렌(Irène)을 출산했다. 그녀는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찾기 위해 남편 피에르의 실험실에서 함께 연구를 시작했다. 마리가 연구 주제로 택한 것은 앙리 베크렐(Antoine Henri Becquerel, 1852~1908)이 발견한 우라늄 광선에 관한 것이었다.
 1896년 베크렐은 우라늄염이 사진판을 감광시키며 공기 중에서 전리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우라늄에서 나오는 광선을 ‘베크렐선’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베크렐선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1년 전(1895년) 뢴트겐(Wilhelm Conrad Röntgen, 1845~1923)이 진공관 실험을 하다가 발견한 X선 때문이었다. X선으로 촬영한 뼈 사진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세상의 관심은 온통 X선에 쏠려 있었다.
 1897년 12월 마리 퀴리는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 광선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마리는 우라늄 광석 표본이 덩어리이든 분말이든, 습하든 건조하든, 뜨겁든 차갑든 상관없이 방출하는 에너지가 동일한 강도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토륨도 우라늄과 같은 광선을 방출한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당시 물질의 최소 단위는 원자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마리는 우라늄 광선이 원자의 내부에서 방출되는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우라늄 함유 광석인 피치블랜드(pitchblende, 역청 우라늄광)가 예상보다 많은 양의 베크렐선을 방출한다는 것을 파악한 후, 피치블랜드에 우라늄이외의 다른 원소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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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치블랜드(pitchblende, 역청 우라늄광) ] 그림 출처: wikimedia
 피에르 퀴리는 1898년 3월 중순부터 자신의 연구를 중단하고 아내의 연구에 동참했다. 그 결과 1898년 6월에 우라늄보다 300배 이상의 강한 반응을 보이는 물질을 얻었다. 그 물질은 마리의 조국 폴란드를 기리는 의미에서 ‘폴로늄(polonium)’이라고 명명했다.
 또한 우라늄과 같은 원소들이 자발적으로 방출하는 에너지에 '방사능(radioactivité)'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는 우라늄보다 900배나 높은 방사능 물질을 추출했다. 이 물질에는 ‘라듐(radi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방사능이나 라듐의 어원은 라틴어 ‘빛살(Radius)’에서 따온 것이다. 부부는 이 사실을 과학 아카데미에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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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리의 방사능 측정 장치 개념도 ]
 A-B: 플레이트 커패시터, C: 스위치, E: 전기 계량기, H: 저울, P: 배터리, Q: 압전 석영
압전 석영을 이용한 전위 측정 장치는 피에르 퀴리가 개발했다.
≪Untersuchungen Über Die Radioactiven Substanzen(1904)≫ p7
 1900년 피에르 퀴리는 소르본 대학 교수가 되었고, 마리 퀴리는 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다.
 라듐이 새로운 원소라는 것을 증명하고 그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우라늄 함유 광석이 필요했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다. 그렇지만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한 비엔나 아카데미와 오스트리아 정부가 보헤미아의 한 채굴회사에 협조를 요청하였고, 회사는 수 톤 분량의 광석 찌꺼기를 마리 부부에게 보내주었다.
 마리는 학교가 제공한 헛간에서 광석을 끓이고 졸이기를 거듭하며 3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했다. 그녀는 액체가 그득한 항아리들로 꽉 찬 비좁은 곳에서 광석 덩어리가 뜨거운 곤죽이 될 때까지 팔 힘만으로 철봉막대를 휘저어야 했고, 황화 수소와 같은 유독 가스도 사용해야 했다. 오랜 기간의 고된 작업으로 인해 마리의 몸은 퀭하니 야위고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푸른 인광을 내는 라듐은 주변을 방사능으로 물들였다. 피에르는 라듐을 자신의 피부에 하루 종일 붙이고 다니며 실험하다가 화상을 입었지만, 방사능이 종양 세포를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퀴리 부부는 1902년 순수 염화라듐 0.1 데시그램(0.1 그램)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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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와 마리 퀴리, 1904년 무렵 ] 출처: Wikimedia
 1903년 6월 마리 퀴리는 소르본 대학에 논문 ≪방사능 물질에 관한 연구, Untersuchungen Über Die Radioactiven Substanzen≫를 제출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에는 폴로늄, 악티늄, 라듐의 성질, 염화라듐의 추출 과정, 방사선 측정, 방사선의 특징과 제어 등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 내용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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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듐에서 방출되는 방사선 α선, β선, γ선에 자기장을 걸었을 때 각 선이 휘어지는 효과를 설명하는 퀴리의 논문 그림 4.] ≪Untersuchungen Über Die Radioactiven Substanzen(1904)≫ p42
 1903년 런던 왕립학회는 방사능 연구에 대한 공적을 인정하여 퀴리 부부에게 데이비(Davy) 메달을 수여했다. 같은 해 12월 노벨상 위원회도 방사능 연구에 대한 탁월한 업적을 인정하여 마리 퀴리(36세), 피에르 퀴리(44세), 그리고 앙리 베크렐(51세)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결정했다. 그녀는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지만, 몸이 쇠약해진 상태였고 대학 강의도 많았기 때문에 스톡홀름까지 직접 수상하러 가지는 못했다.
 노벨상을 수상하기 직전에 마리의 아버지는 외과 수술 후유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마리는 폴란드로 귀국했지만 임종을 보지는 못했다. 1904년 피에르는 소르본 대학 정교수가 되었고, 마리는 남편의 조수가 되어 실험실 관리 책임을 맡았다. 그해 12월 둘째 딸 에브(Ève)를 낳았다.
 라듐의 발견과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부부는 유명세에 시달리느라 한동안 연구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사업가 중에는 라듐을 섞어 만든 화장품을 출시하고 닥터 퀴리의 처방이라는 광고까지 게재하여 돈을 벌기도 했다. 방사능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대중들은 지갑을 열었고, 빛의 요정이라 불리는 유명한 무용수는 몸에 바르고 공연하고 싶다며 퀴리 부부에게 라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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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듐과 토륨 기반 화장품 ‘토-라디아(THO-RADIA)’ 광고 포스터 ]
출처: encheres-nantes-labaule.com
 1906년 4월 19일, 과학자 협회 모임에 갔다가 귀가하던 피에르 퀴리는 질주하는 마차를 피하지 못하고 수레바퀴에 깔려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의 나이 47세였고, 두 딸 이렌과 에브는 9살과 2살이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많은 이의 애도와 추모가 뒤를 이었다.
 소르본 대학은 피에르를 대신하여 마리 퀴리에게 교수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1906년 11월 그녀는 소르본 대학 대강의실에서 많은 취재진이 몰린 가운데 취임 강의를 했다.
 마리는 혼자 된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기 위해 두 딸을 데리고 소(Sceaux)에 정착했다. 언니 브로냐가 살림을 도울 젊은 폴란드 여인을 보내 도움을 주었다. 공교육의 방식으로는 인재를 길러내기 힘들다고 생각한 그녀는 딸 이렌을 포함하여 열 명 정도의 아이들을 모아 사립학교를 만들었다. 하루에 한 주제만 배우는 자유로운 형식의 수업은 2년 과정으로, 마리 퀴리, 장 페렝(Jean Baptiste Perrin), 폴 랑주뱅(Paul Langevin)을 비롯한 대학교수들이 수학, 과학, 문학, 역사, 데생 등을 가르쳤다.
 피에르 퀴리가 사망한 후 라듐은 원소가 아니라 화합물이라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에 마리는 라듐 추출을 위해 몇 년 동안 노력했다.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는 마리의 연구 지원을 위해 재단까지 만들어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마리는 미량이지만 염화라듐을 전기분해하여 백색의 순수 라듐을 얻었고, 녹는점이 700℃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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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듐 2.7 gram, 1922년 퀴리 연구소 촬영 사진 ]
 1910년 ‘전기와 방사선학에 관한 국제학회’는 라듐 1 그램에서 발산되는 방사선량의 크기를 1 퀴리(Ci)로 결정했다. 그해 마리 퀴리는 과학아카데미 회원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여성이 선출된 적이 없고 외국 출신의 유대인인 그녀는 자격이 없다는 비방이 일었다. 결국 그녀는 2표 차이로 탈락했다.
 1911년 11월 마리 퀴리는 ‘방사능과 양자(Radiation and the Quanta)’라는 의제로 브뤼셀에서 열린 제1차 ‘솔베이 회의(Solvay Conference)3)’에 참석했다.
3) 물리와 화학에 대한 국제 솔베이 학회(International Solvay Institutes for Physics and Chemistry): 벨기에의 기업가 어네스트 솔베이가 경비를 제공하여 주최한 물리, 화학 학회로 대략 3년마다 한 번씩 회의가 열린다. 1911년 1회를 시작으로 하여 2017년까지 27회의 솔베이 회의가 열렸다.
 당시 기념사진을 보면 로렌츠, 푸앵카레, 플랑크, 러더퍼드, 아인슈타인, 드브로이 등 당대의 쟁쟁한 물리학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마리 퀴리는 중앙에 앉아 한 손을 이마에 받친 채 푸앵카레와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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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년 솔베이 회의 ]
앉아 있는 사람: 왼쪽부터 네른스트, 브린루앙, 솔베이, 로렌츠, 와부르, 페렝, 빈, 마리 퀴리, 푸앵카레.
서 있는 사람: 왼쪽부터 슈미트, 플랑크, 루벤스, 조머펠트, 린더만, 드브로이, 쿤젠, 하젠욀, 올슈텔레, 헤르첸, 진스, 러더퍼드, 온네스, 아인슈타인, 랑주뱅. 그림출처: i.pinimg.com
 솔베이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에 마리 퀴리는 노벨 위원회로부터 폴로늄과 라듐 표본을 제조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기쁜 전보를 받았다. 역사상 처음으로 노벨상 2회 수상자로 결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파리에서 커다란 스캔들이 터졌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솔베이 회의에 함께 참석한 폴 랑주뱅(Paul Langevin, 1872~1946)과 주고받은 연애편지가 그의 부인에 의해 잡지에 보도된 것이었다. 마리보다 5세 연하였던 랑주뱅은 죽은 남편의 제자였다. 그와의 스캔들이 폭로되면서 그녀는 가정파탄의 주범, 타락한 요부, 유대인이라는 맹비난을 들어야 했다.
 귀국한 마리는 적의에 찬 군중들이 신변을 위협했기 때문에 두 딸을 각각 다른 곳에 맡기고 피신해야 했다. 노벨상 2회 수상에 대한 소식은 스캔들에 묻혀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 심신이 쇠약해진 그녀는 그해 12월 가명으로 어느 요양원에 들어가 한동안 건강을 추슬렀다.
 이듬해 파스퇴르 연구소는 라듐의 의학적 연구와 협력을 위해 연구소를 건립하자고 마리에게 제의했다. 1914년 7월 퀴리의 라듐 연구소가 거의 완공될 무렵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선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마리 퀴리는 차량이동식 X선 촬영 장비를 구비하여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스무 대 가량의 이동식 X선 차량은 ‘작은 퀴리들’이라고 불리며 전장을 누볐고, 17세가 된 마리의 첫째 딸 이렌도 엄마의 동지가 되어 참여했다. 이렌은 130명의 X선 촬영기술자를 교육하여 야전 X선 초소에 배치되도록 하는 일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3천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1918년 11월 11일에 끝났다. 마리 퀴리의 조국 폴란드도 123년 동안의 강점 통치에서 벗어나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라듐은 상업적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피부 미용에 좋다는 광고를 등에 업고 화장품 비롯한 각종 상품에 첨가되었고, 형광 도료에도 사용되었다. 라듐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기 때문에 라듐을 구매할 수 없었던 퀴리 연구소에는 1 그램의 라듐 밖에 남지 않았다. 퀴리 부부가 라듐을 발견할 당시 물질특허를 낼 수도 있었지만 과학 연구 결과를 이용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었기에 모든 정보를 개방하고 공유한 결과였다.
 1920년 프랑스 정부는 방사선 의학 연구를 위해 퀴리 재단을 설립하고, 그녀에게 매년 4만 프랑의 연금을 지급하도록 법률로 결정했다(그녀가 죽으면 딸에게 지급). 그해 5월에 미국 여성잡지의 편집장 멜로니(Marie Mattingly Meloney)와의 인터뷰를 통해 마리 퀴리의 명성이 미국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멜로니는 마리가 소원하는 라듐 1 그램을 후원하기 위해서 모금 운동을 시작하여 20만 달러의 기금을 모았고, 1921년 마리는 환대를 받으며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의 하딩(W. G. Harding) 대통령은 그녀에게 라듐 1 그램이 든 상자를 전했다.
 그해 영국에서 처음으로 방사성 보호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X선과 방사선 물질을 다루는 연구원들이 질병에 걸려 사망하는 사고가 속출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도 손목시계 표시판에 라듐으로 숫자를 입히는 작업에 종사하는 직공 십여 명이 골수암에 걸려 사망하는 등 피해가 발생했다.
 마리는 조국 폴란드에 라듐 연구소를 세우고자 노력하였고 1925년 바르샤바 라듐 연구소를 건립했다. 그러나 연구에 필요한 라듐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1929년 미국을 한 차례 더 방문했다. 그리고 또 한 번 1 그램의 라듐을 얻는 데 성공했다.
 1925년 퀴리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들어온 프레데릭 졸리오(Frédéric Joliot, 1900~1958)는 마리의 큰딸 이렌 퀴리(Irène Joliot-Curie, 1897~1956)와 사랑에 빠져 1926년에 결혼했다. 부부는 결혼하자마자 자신들의 성을 졸리오-퀴리(Joliot-Curie)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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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리오-퀴리(Joliot-Curie) 부부 ] 출처: novostinauki.ru
 1934년 졸리오-퀴리 팀은 비방사성 물질에 방사능 충격을 가하여 인공 방사능 물질을 최초로 만들었다. 마리 퀴리는 딸과 사위의 업적에 커다란 만족을 느꼈지만, 그해 7월 4일 ‘골수가 반응하지 않는 재생 불량성 악성 빈혈’이라는 진단을 받고 향년 67세로 생을 마감했다(나중에 의사들은 그녀의 병을 방사능 피폭에 의한 백혈병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녀는 남편 피에르 곁에 묻혔고, 관 위에는 언니 브로냐가 폴란드에서 가져온 한 줌의 흙이 뿌려졌다고 전해진다.
 졸리오-퀴리 부부는 인공 방사능 물질을 만든 업적으로 1935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졸리오-퀴리 부부의 수명도 길지는 못했다. 이렌은 1956년 59세에 방사능이 원인일 것으로 추정되는 백혈병으로 사망했고, 프레데릭 역시 1958년에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마리 퀴리의 자서전을 쓴 둘째 딸 에브 퀴리(Ève Denise Curie Labouisse, 1904~2007)는 제2차 세계대전 특파원 기자,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사무총장 특별보좌관, 유니세프(UNICEF, 유엔 아동 기금)의 아동 구호 활동가로 활약했다. 그녀는 50세에 미국 외교관인 헨리 라부이스(Henry Richardson Labouisse Jr.)와 결혼하였다. 1965년에 에브 퀴리는 남편과 함께 유니세프의 대표로서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2005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 나폴레옹 1세가 1802년 제정한 프랑스 최고의 훈장)을 받았다. 에브 퀴리는 부모와 자매의 못 다한 수명을 대신하여 103세의 수명을 누리고 2007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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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브 퀴리(Ève Denise Curie Labouisse), 1945년 ]
출처: cdn.britannica.com
 1995년 4월 20일, 마리 퀴리, 피에르 퀴리의 유해는 프랑스가 경의를 표하는 위대한 인물들을 모신 성소 팡테옹(Le Panthéon)으로 옮겨졌다. 마리 퀴리는 그곳에 받아들여진 유일한 여성이다. 퀴리 부부의 관은 방사능 차단을 위해 2.5 밀리미터의 납판으로 봉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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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팡테옹에 안치된 마리 퀴리(상)와 피에르 퀴리(하) ] 출처: Wikimedia, by Rémi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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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샤바의 마리 퀴리 동상 ]  by Joergsam

 

신규진 경성고 과학교사 《너무 재밌어서 잠못드는 지구의 과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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