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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
권정은의 아이 그림 토크
아이 그림을 통해 아이와는 물론 어른과도 소통하고 싶은 권정은입니다.
아이들의 그림은 단순히 보여지는 그림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명화 뒷이야기만큼이나 재미난 것이 많습니다. 아이와 나눈 이야기를 어른들과 나누어 그 순수함의 힘으로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 저자
첫 눈 그리고 첫 소개팅의 기억 열한 살 이채현 양이 그린 '자작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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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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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이채현 作 <자작나무 숲>

 

 자작나무는 하얗고 곧게 뻗은 나무줄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사진이나 그림의 소재로 좋아한다. 그래서 한편으론, 예쁘긴 해도 흔한 그림이기도 하고, 어떨 땐 너무 예쁘고 달콤해서 그게 단점으로, 깊이 없이 가벼워 보일 수도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11세 이채현이 얼마 전 그린 자작나무 숲은 아름다우면서도 무게가 있고, 무엇보다도 따뜻한 정서가 가득해서 나무의 특징을 정말 잘 잡아내어 그렸다는 생각이 든다.

 채현이는 자작나무 숲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별히 창작적인 그림은 아니다. 굳이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모닥불을 추가해서 그려준 게 전부다. 그렇지만 보고 관찰하여 옮기는 그림도 그리는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다.

 그래서 사진과 똑같이 그렸는데도 감정이 별로 안 느껴지는 그림도 있고, 사진과 똑같은데, 사진보다 그림이 더 좋기도 하다. 어떤 것을 보고 그릴 때 그 사람이 그 풍경을, 혹은 인물을, 혹은 정물을 어떻게 자기식으로 해석해서 그리는 지가 그러므로 중요하다고 본다. 어떤 정서를 느끼고 옮기기 시작했나 하는, 즉, 왜 그것을 보고 그리고 싶었냐 하는 마음 말이다. 그 마음에 따라 재료 선택과 표현 선택이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그림 안으로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가 보자. 자작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검은 파스텔로 칠해, 부드럽지만 실제 보다 조금 더 무겁게 눌렀다. 자작나무 숲은 아까 말했듯이 예뻐서 자칫 가벼워 보일 수 있는 풍경인데, 배경을 실제 사진보다 살짝 더 눌러줌으로써 깊이감 있고 여운을 주는 풍경이 되었다. 그 무게감과 어둠 때문에 숲은 정말 깊어보인다. 그래서 더 꿈같고 동화 같다.

 하지만 깊은 숲인데도 전혀 무섭지가 않다. 부드러운 파스텔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파스텔이란 재료를 선택한 것은 현명했다. 파스텔이 주는 부드러운 정서로 그려진 온 세상 하얀 눈이 정말 포근하고 아름다워서 당장이라도 저 그림 안의 풍경에 들어가 바닥에 쌓인 눈 한 줌을 손으로 움켜 들어 올리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이렇게 따뜻하면서도 예쁘고, 동시에 깊이감을 잃지 않는 숲이 있을까?

 그림의 압권은 희고 검은 무채색 숲 바탕 위로 노란빛이 선명한 모닥불 색조로 채색된 두 아이의 모습이다. 불꽃이 타닥타닥 올라가는 느낌을 작은 붓 터치로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혹시 아이가 그린 게 아니라, 선생님이 손대준 게 아닌가 의심이 들어서 확인을 해보았을 정도였다. 

 모닥불을 붉은색이 아닌 노란 색으로만 그린 것도 참 센스 있다. 이런 무채색의 바탕에 만약, 붉은 불이었다면 다소 센 느낌이 들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노란 불이 이 그림의 정서에 더 맞게, 아늑하고 따뜻한 기운을 감돌게 한다. 또한, 앞에서 불을 쬐고 있는 아이들의 옷 색과 같이 통일해서 그림 전체의 정서가 흔들리지 않게 통일감을 주었다. 그래서 그림은 최소한의 색만 있다.

 흰색과 검정의 파스텔로 칠한 부드러운 무채색, 그리고 그 위에 물감으로 채운 따뜻한 노랑과 검정. 그래서 두 명의 아이와 모닥불은 마치 비빔밥 위에 올린 예쁜 달걀이나 참깨처럼 흰 눈 바탕을 심심하지 않고 더 풍요롭게 이야기를 채워준다.

 그림 속 아이들은 누구일까? 어린이들이 깊은 숲속에 둘이 앉아 무슨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것일까? 아이들을 그리며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자기가 생각한 게 있다고 한다. 이렇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그에 어울리는 내용이어야 하는데, 그게 자기에겐 바로 이거였다고 한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반전의 이야기. 글쎄, 둘이서 소개팅 경험을 이야기하는 중이라고 한다. 뭔가 더 낭만적인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당황해서 “뭐 소개팅?” 하며 놀라 물었다.

 “진짜로 그 생각을 하며 이걸 그린 거야?”
 “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풍경에 모닥불 쬐며 할 어울리는 이야기는 소개팅 밖에 없어요. 첫 소개팅요. 그게 얼마나 낭만적인데요.”

 이 그림을 그리는 내내 그걸 상상하며 즐겁게 그렸단다. 자기도 포근하고 행복해지더라고 말이다. 뭔가 더 동화 같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대했던지라 다소 당황했지만, 어찌 보면 그게 가장 그 나이에 맞는 동화 같은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사춘기가 곧 시작될 새해에 12세가 된 아이니까 말이다.

 이 그림을 시작으로 아이는 점점 사춘기 소녀 감성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겠구나, 이젠 아이를 벗어나기 시작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긴, 그냥 소개팅도 아닌 첫 소개팅이라니. 이 눈도 겨울의 첫 함박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로맨틱함은 나이가 들어도 우리 어른들 역시 수줍은 행복감에 젖게 만들지 않은가!

 그나저나, 언제 이런 함박눈이 이번 겨울엔 과연 올까? 운전 때문에라도 눈이 겁나는 어른이 되었지만, 그래도 겨울엔 한 번쯤은 이런 하얀 세상을 만나고 싶다. 하얗고 포근한 함박눈을 기다리며 또 이 겨울 잘 살아보자. 그리고, 첫 소개팅, 첫 사랑 또는 처음 해본 아름다운 경험의 기억 등 어느 것이라도 처음의 설레임과 순수함을 흰 눈처럼 간직하고 있다면 오늘은 한번 그것을 꺼내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 보자. 그러면 어느 새 창 밖에는 흰 눈이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권정은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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