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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영의 언어탐험
일상을 탐험으로 만드는 언어 탐험가이자 언어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사회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인문학자. 베이스캠프는 고려대학교.
언어의 세계를 탐험하며 발견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젊은 사람이 여긴 왜 앉아? 비켜요! 탐험대원 '하릅'의 언어탐험
입력 : 2020.02.04

 

오전 9시부터 출근해 공복 상태로 알바만 하다 돌아오던 밤이었다. 지하철에 앉아 빨리 집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문이 열리더니 한 할머니께서 들어오셔서 내 앞에 자리하셨다.

 ‘여긴 일반석이니까, 양보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어딘지 양심에 찔려 눈을 내리깔고 앉아있었다. 두 정거장 즈음 지났을까, 내 옆 사람이 내렸고 그 자리에 할머니께서 앉으셨다.

내가 탄 열차는 곧 목적지에 도착했고, 할머니께서도 이곳에서 내리시는지, 우리는 동시에 일어났다. 그때, 할머니께서 갑자기 내가 있는 쪽으로 잰걸음으로 달려오셨다.

“왜, 계속 가만히 있지 그랬어?”

내게 툭 한 마디 던지시더니 문이 열리기 무섭게 내리신 할머니. 나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지나간 그 말은 아직도 나의 기억에 남아있다.

여기서 두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할머니는 왜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나를 비꼬시고 가신 걸까? 그러고 왜 나는 할머니를 앞에 두고 앉아 있던 것에 양심에 가책을 느꼈던 걸까?

 

지하철 객실 끝 3인석은 ‘교통약자석’이다. 그런데 실제로 지하철을 타면 이곳을 이용하는 승객의 대부분이 고령자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이다. 서울교통공사는 ‘교통약자석’의 ‘교통약자’를 ‘어르신, 임신부, 몸이 불편한 승객, 어린이를 동반한 승객’ 등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통약자석’에서 ‘어르신’을 제외한 교통약자를 찾기는 어렵다.

이 기이한 현상의 단서를 발견하려면 ‘교통약자석’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원래 대중교통 객실 일부에 마련된 양보석을 부르는 말은 따로 있었다. 바로 ‘경로석’이다. 이는 노인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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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한국 공익 광고. 광고 속에 ‘경로석’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경로석’이라는 말은 이내 ‘노약자석’으로 대체된다. ‘노약자석’은 아마 우리에게 익숙할 것이다. 이 명칭은 ‘경로석’과 달리 ‘노인과 약자’를 총칭할 수 있다. 그러나 ‘老(늙을 노)’가 단어 가장 앞에 위치하여 자칫하면 노인을 위한 자리라고 오인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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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스칼렛의 Life style 네이버 블로그>

 

‘노약자석’의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채택된 명칭이 바로 오늘날의 ‘교통약자석’이다. ‘교통약자석’은 ‘노인과 약자’와 더불어 ‘교통을 이용하기에 취약한 승객’ 전체를 아우른다.

지하철 방송에서도 교통약자가 ‘고령자, 장애인,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승객 등’임을 주기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교통약자석에 붙인 스티커에도 다양한 유형의 교통약자들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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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 6호선의 교통약자석>


우리는 여기서 앞서 던진 질문 두 개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던 필자의 경험은, ‘경로석’과 ‘노약자석’이라는 명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할머니께서는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양보할 것을 기대하셨지만, 그렇지 않았던 나에게 따끔한 소리를 남기고 가신 것이다.

필자 역시 고령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고령자를 눈앞에 두고 나이 어린 본인만 앉아있다는 사실이 썩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교통약자임에도 교통약자석을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단적인 예시로 2016년 지하철 교통약자석에 앉은 임산부에게 70대 남성이 임산부가 맞냐며 옷을 들추고 폭행을 가하는 사건이 있었다.

‘경로석’이 ‘노약자석’으로, ‘노약자석’이 다시 ‘교통약자석’으로 바뀌게 된 이유와 각 명칭의 미묘한 변화를 예민하게 관찰해보자. 각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누군인지 고민해본다면, 진정한 ‘교통약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교통약자석’. 오늘 하루 지하철을 타게 된다면 그곳에는 누가 자리하고 있는지 살펴보길 바란다. 그곳은 ‘경로석’인가, ‘노약자석’인가, 아니면 ‘교통약자석’인가?

하릅(필명)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 18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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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zzag   ( 2020-02-06 )    수정   삭제 찬성 : 2 반대 : 8
“ 오전 9시부터 출근해 공복 상태로 알바만 하다 돌아오던 밤” 힘들었겠네요. 하지만 노인빈곤율과 노인자살율이 매우 높은 현실을 놓고보면 댁 앞에 서있던 노인이 팔자좋아 마실로 시간때우는 노인이 아니었을수도 있죠. 행여 그 노인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대잎에 섰던 또 서게될 노인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다시말해 당신처럼 혹은 더 피폐한 하루를 보낸데다가 체력과 기력마저 허약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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