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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 표기법을 만든 화학의 셋째 아버지 옌스 야콥 베르셀리우스(Jöns Jacob Berzelius, 1779. 8. 20 ~ 1848.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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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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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신로아

 과학의 역사에서 ‘화학의 아버지’가 적어도 3명은 된다. 영국에서는 ≪의심 많은 화학자, The Sceptical Chymist(1661)≫를 집필한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이, 프랑스에서는 ≪화학 원론, 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 Elements of Chemistry(1789)≫를 쓴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 1743~1794)가 화학의 아버지이다. 스웨덴에서는 베르셀리우스를 화학의 아버지로 추앙하는데, 연배로 볼 때 화학의 셋째 아버지인 셈이다.

 베르셀리우스가 화학 원소 표기법을 제안하기 이전에는 통일된 원소 표기법이 없었고, 연금술사들이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상징적인 기호들로 물질이나 원소를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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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들의 원소 표기 예  

 베르셀리우스는 스웨덴의 린셰핑(Linköping) 근처 베버순다(Väversunda)에서 태어났다. 

 그가 네 살이던 해에 교장이었던 아버지 사무엘(Samuel Berzelius)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아버지가 죽고 2년 3개월 뒤에 어머니 엘리자베스(Elisabet Dorotea Sjösteen)는 자녀가 다섯이나 있는 루터교 목사 에크마르크(Andreas Ekmarck)와 재혼했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새아버지 에크마르크는 훌륭한 교육자의 능력을 갖춘 모범적인 사람이었고 식구들을 행복하게 했다. 그러나 3년이 채 못 되어서 그의 어머니도 새로 잉태한 아들을 생산하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에크마르크는 두 개 지역의 교구 공동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는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을 보살피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어머니의 자매인 플로라(Flora Sjösteen)가 와서 에크마르크의 집안을 관리하고 아이들을 돌보았다. 

 1790년 에크마르크는 곤충학자인 하그룬트(Anders Haglund, 성직자가 된 이후의 이름은 하거트, Hagert)에게 자식들의 교육을 부탁했다. 하그룬트는 베르셀리우스를 열심히 가르쳐서 학문의 눈을 뜨게 했다. 에크마르크도 틈이 날 때마다 자녀들과 함께 책을 함께 읽었고, 들판을 함께 산책하며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는 베르셀리우스에게 “야콥, 너는 재능이 있다. 식물학자 린네처럼 될 수 있다”라고 격려했다.

 1790년 에크마르크 가족을 돌보던 플로라가 토지를 소유한 사람과 결혼하여 집을 떠나게 되자, 에크마르크는 이듬해 마리아 뷔스트란(Maria Elisabet Wistrand) 부인과 결혼했다. 그런데 새엄마가 된 마리아가 우리는 식구가 너무 많아서 머잖아 빈곤층이 될 것이라고 푸념했기 때문에 베르셀리우스는 의붓동생을 데리고 군인 중위인 외삼촌(Magnus Sjösteen) 집으로 갔다.

 외삼촌도 자식이 일곱 명이나 있는 처지였지만 베르셀리우스를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했다. 그렇지만 사촌형제들이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들의 엄마인 외숙모 또한 자기 자식들 편을 들었기 때문에 베르셀리우스는 눈칫밥을 먹으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베르셀리우스는 1793년까지 하그룬트에게 배운 후 린셰핑 김나지움에 편입했고, 15세부터는 노르코핑(Norrköping) 근처 마을에 입주 과외교사를 하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1796년 베르셀리우스는 웁살라 대학에 입학하여 의학, 화학 등을 공부했다. 약제사에서 실습하는 기간에는 유리를 불어 기압계, 온도계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메디비(Medivi) 스파(spa; 미네랄이 풍부한 샘물) 인근에서 견습 의사를 하던 기간에 그는 샘물의 광물 성분을 분석했고, 업자들과 광천수 사업을 제휴했다가 실패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800년 알렉산드로 볼타(Alessandro Volta, 1745~1827)1)가 아연판과 구리판을 번갈아 겹겹이 세운 후 황산 용액에 담가 볼타 파일(Voltaic pile)이라는 최초의 화학 전지를 만들었고 그 제작 방법을 세상에 알렸다.

 1) 전압의 단위인 볼트(volt)는 알렉산드로 볼타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베르셀리우스는 볼타의 책을 보고 60쌍의 구리 동전과 아연판을 구입한 후 스스로 전지를 제작했다. 그리고 전지를 이용하여 직류 전기가 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여 졸업 논문으로 제출했다.-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직류 전기는 손 떨림 환자 한 명을 제외하고 치료에 별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1802년 웁살라 대학에서 의사 학위를 취득한 베르셀리우스는 스톡홀름에 있는 카롤린스카 연구소(karolinska institute)에서 의약학 조수로 일했다. 스톡홀름에서 그가 살던 집의 주인은 광산업자였는데 베르셀리우스는 그를 도와 광물의 전기 화학적 반응에 대해 탐구했고 1803년 화학 저널 2월호에 전기 화학 이론 에세이를 게재했다.

 1807년 28세의 베르셀리우스는 웁살라 외과 대학원의 약학 교수로 임명되어 안정적으로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1808년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된 그는 ≪화학 교과서≫ 발행의 필요성을 느끼고 집필을 시작했다.

 집필 과정에서 원소 표기법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그는 린네의 생물 분류법을 본뜬 원소 표기법을 고안했다. 산소(Oxygenium)는 O, 탄소(Carbonicum)는 C와 같은 형식으로 라틴어 머리글자를 따서 원소를 표기하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황(Sulphuricum)과 규소(Silicium)의 경우처럼 첫 문자가 같을 때는 각각 S와 Si로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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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합물을 명명할 때는 양이온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음이온의 이름에 ~ide(~화)를 붙여 Carbon dioxide(이산화 탄소), Hydrogen Sulfide(황화수소)와 같이 부른다. 원자 기호를 사용하여 분자나 화합물을 표시할 때는 원자의 결합 비율에 따라 위첨자를 붙여 이산화 탄소는 CO², 황화 수소는 H²S와 같은 형식으로 표기한다. 예를 들어, H²O로 표시되는 물은 수소(H) 2개에 산소(O) 1개가 결합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나중에 독일의 과학자 리비흐와 포겐도르프(Liebig & Poggendorff)가 위첨자를 아래 첨자로 바꾸어 오늘날 사용하는 CO₂, H₂O와 같은 표기 형식이 되었다.-

 영국 왕립 화학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베르셀리우스의 원소 표기 시스템은 1811년 프랑스에서 기고한 에세이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고, 1813년과 1814년 영국의 저널에 게재된 기사를 통해서도 알려졌다. 그러나 원자설의 창시자 존 돌턴은 베르셀리우스의 표기법을 쓸모없는 것이라고 폄하하였고, 다른 학자들도 처음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베르셀리우스는 돌턴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여러 원소들의 원자량 값을 매우 정확하게 알아내어 화학 발전의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여느 과학자와 달리 산소(O)의 원자량을 100으로 설정하고 다른 원소의 원자량을 계산했기 때문에 수소(H)의 원자량을 6.2398로 표기했다. 수소의 원자량을 1로 환산한 원소의 원자량 값은 아래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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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턴, 베르셀리우스, 현대의 원자량 측정치 비교 표   

 베르셀리우스가 측정한 원자량 값은 현대 과학이 측정한 값과 거의 일치한다. 그는 화학 교과서, Lehrbuch der Chemie에 비금속과 금속 원소의 원자량과 물질 특성을 수록하고, 식물성 및 동물성 유기물, 빛과 열, 전기와 자기를 비롯한 여러 물리 현상도 설명했다. 이로써 그의 화학 교과서는 화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여러 차례 개정을 거듭하면서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교과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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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셀리우스의 화학 교과서1831 프랑스 판, 1835 독일 판 속표지.

 원자를 볼 수는 없지만, 그 모습은 구형일 것으로 추측한 베르셀리우스는 성분이 다른 물질이라도 원자들의 결합 방식이 동일하여 형태가 똑같은 동형체(isomorphe Körper)2)가 될 수도 있고, 성분이 동일해도 원자들의 결합 구조가 다른 경우에는 형태와 성질이 다른 이성질체(isomerische Körper)3)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보았다.

 2) 방해석(CaCO₃), 능철석(FeCO₃), 능망간석(MnCO₃), 마그네사이트(MgCO₃)는 성분이 다르지만 동일한 형태의 광물이다. 광물학에서는 유질동상(類質同像, isomorphism)이라고 한다.
 3) 흑연(C)과 다이아몬드(C)는 성분이 같지만, 형태와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 흑연이나 다이아몬드가 만들어지는 지하의 온도와 압력 조건이 달라서 원자들의 결합 구조가 달라진다. 광물학에서는 동질이상(同質異像, polymorphism)이라고 한다.

 1814년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의 간사로 임명된 베르셀리우스는 영국의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4), 프랑스의 화학자 베르톨레5)를 비롯하여 독일의 여러 과학자와 교류하면서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를 크게 활성화했다.

4) 험프리 데이비(Sir Humphry Davy, PRS. 1778~1829): 일산화이질소(N₂O)가 마취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감미로운 향기와 단맛을 가진 일산화이질소는 흡입하면 얼굴 근육이 마비되어 웃는 표정처럼 변하기 때문에 ‘웃음 가스’라고 불렸다. 험프리 데이비는 탄광에서 폭발하지 않는 안전등을 개발했으며, 전기분해를 통해 나트륨, 칼륨, 마그네슘, 칼슘, 스트론튬, 바륨 등을 발견했다. 1819년 준 남작의 작위를 부여받았고 영국왕립학회 의장을 역임했다. 데이비는 베르셀리우스를 초청하여 학문적 논의를 했으나 서로 다른 의견과 오해가 겹치면서 점차 베르셀리우스를 멀리했다.
5) 베르톨레Claude Louis Berthollet(1748~1822); 라부아지에의 ≪화학 명명법≫ 공동 저자.

 베르셀리우스는 세륨(Ce), 셀레늄(Se), 지르코늄(Zr), 티타늄(Ti), 토륨(Th) 등의 원소를 발견하고, 사불화 규소와 칼륨을 반응시켜서 순수한 규소를 처음으로 분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1835년 독일판 화학 교과서에 기록된 규소(Si) 원자량의 경우 44.37 6)로 실제 규소의 평균 원자량 28.085와 약 16의 차이를 보인다. 16은 산소 원자 하나의 무게에 해당하는 값이다. 이와 같은 오차로 인해 그가 순수한 규소를 분리하는 데 정말로 성공한 것인지는 석연치 않다.

6) 교과서 원문에는 규소의 원자량을 277.312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산소(O)의 원자량을 100으로 잡았을 때의 값이다.

 베르셀리우스는 자신의 연구와 과학의 발견 사실들을 엮어 연례 보고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1840년 튀빙겐에서 출간한 ≪물리 과학의 진보에 대한 연례 보고서, Jahres-Bericht über die fortschritte der physischen Wissenschaften≫는 물리학, 화학, 광물학, 식물 화학, 동물 화학, 지질학 6개 분야7)로 분류한 과학적 발견을 서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용 면에서는 물리학보다는 화학에 관한 내용이 훨씬 많다. 그는 연례 보고서에 화학 물질을 분석하는 다양한 방법을 설명하고 산화물, 산, 염류, 금속, 비금속 등의 무기물 74종, 광물 55종, 포도당, 알코올, 식물성 단백질, 전분, 효모, 오일, 왁스, 자일리톨, 나프탈렌 등의 식물성 물질 110여 종, 담즙, 결석, 콜레스테롤, 요당, 헤마틴8) 등 30여 종의 물질을 소개했다.

7) 물리학(소리, 빙, 열, 전기 장치, 자기학) 127쪽 분량, 57주제
   화학(일반화학, 무기물, 유기물) 563쪽 분량 316주제
   광물학 42쪽 분량 55개 광물, 지질학 33쪽 분량, 10주제
8) 헤마틴(Hämatin): 위출혈 시에 위산과 혈액이 반응하여 만들어지는 검은 색의 물질

 1835년 56세의 베르셀리우스는 남작의 작위를 받고 내각 장관의 딸인 24세의 엘리자베스 포피우스(Elisabeth Poppius)와 결혼했다. 자녀는 낳지 못했지만 평화로운 말년을 보낸 베르셀리우스는 1848년 8월 69세의 나이로 스톡홀름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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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젤리우스와 결혼한 엘리자베스 포피우스 Elisabeth Poppius (1837년)
출처: 스웨덴 문화 아카이브(arkivkopia Arkiv över svensk kulturell allmänning) 

 

신규진 경성고 과학교사 《너무 재밌어서 잠못드는 지구의 과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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