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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
뉴욕 변호사의 엑스팻 생활기
엑스팻(Expat)이란 외국에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엑스팻으로 반평생을 살아온 필자 이철재 변호사가 뉴욕에서의 엑스팻 생활을 풀어나가며 그곳의 일상적 모습 혹은 관광객들이 모르고 지나가는 곳들을 소개한다.
와인 컨트리로 떠난 나홀로 여행 上 뉴욕이 미국 2위의 와인 생산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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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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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캐나다인 샌드라 오. Ⓒ뉴시스

한국계 캐나다인인 샌드라 오(Sandra Oh)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날리는 배우이다. 그녀가 2019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아시아계 여자 배우로서 처음으로 텔레비전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탔다. 그녀가 트로피를 받는 순간 나의 전화에 수도 없는 뉴스 헤드라인이 다다닥 연달아 뜨기 시작했다. 샌드라 오의 역사적 수상을 알리는 헤드라인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녀의 감동적인 수상 소감은 단연 톱뉴스였다.

한 영국인 친구는 멀리서 전화까지 해왔다.
“샌드라 오의 감동적인 연설 중에서도 제일 감동적이었던 부분이 어딘지 아니? 한국말로 뭐라고 하고(이날 샌드라 오는 수상소감 맨 끝에 그 자리에 참석한 부모님께 한국말로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부모님께 고개 숙여 인사를 하던 장면이었어. 이야! 왜 우리는 그런 교육을 못 시키는 것일까? 정말 너희의 전통이 부럽다.” 

나는 속으로 ‘너도 한국 가 봐라. 요즘 애들이 어디 어른한테 인사하고 사는지…’ 하면서 그에게 “그렇지? 나도 우리 고유의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가 자랑스럽다”라고 속 다르고 겉 다른 소리를 했다. 

 

뉴욕의 모습 중 하나, 와인 컨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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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라 오가 별로 유명하지 않던 시절에 출연했던 영화 중에 2004년 개봉작 <사이드웨이즈(Sideways)>라는 영화가 있었다. 샌디에고에 사는 이혼남 마일즈는 대학시절 룸메이트였던 친구 잭의 결혼을 앞두고 캘리포니아주 산타 바바라(Santa Barbara) 근처에 있는 산타 이네즈 밸리 와인 컨트리(Santa Ynez Valley Wine Country)로 둘만 떠나는 로드 트립을 제안한다.

마일즈는 와인 광이다. 특히 산타 이네스 밸리의 유명한 피노 누아르(Pinot Noir) 와인을 좋아한다. 피노 누아르는 캘리포니아 산타 이네스 밸리처럼 낮에 거의 매일 해가 나고 따뜻하다가, 밤이 되면 하루 종일 둘둘만 양탄자처럼 수평선에 걸려 있던 구름이 시원한 바닷바람을 타고 쭉 펼쳐져 들어와 온도를 식혀주는 기후의 지역에서 잘 자란다.

잭은 피노 누아르건 뭐건 와인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결혼 전에 여자들이나 실컷 집적거릴 심산으로 따라 나선다. 그 집적거림에 속아 몸 주고, 마음 주고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 화가 나 새신랑 잭을 오토바이 헬멧으로 무차별 폭행해 코를 부러트려 놓는 와인 컨트리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 역이 샌드라 오가 맡은 역이었다.

이 영화는 대대적인 홍보도 없었고, 초특급 캐스팅도 아니었지만 평이 상당히 좋았고, 입소문을 타고 흥행 수입도 꽤 올렸다. 한 때 비디오로 가장 자주 빌려 보는 영화 혹은 보고 또 보는 영화로 꼽혔다. 코가 부러지는 새신랑 잭 역의 토마스 헤이든 처치(Thomas Haden Church)는 그 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때 처음 들어보는 샌드라 오라는 배우의 연기를 인상 깊게 봤다. 나뿐 아니라 헐리우드도 그녀를 주목했다.

작년 겨울 내 주위에 나를 포함 혼자 사는 남자, 이혼 소송 중인 남자, 별거 중인 남자 넷이 모여 와인 마시며 저녁을 먹다 우연히 사이드웨이즈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다 “우리도 와인컨트리 여행을 가자”로 발전했다. 결혼해 잘 사는 남자들에게 적대심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가정이 있으면 함께 계획 세우는데 복잡한 이슈들이 자주 생겨 제외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사이드웨이즈에 나오는 캘리포니아로 갈까 하다 그건 좀 일이 커질 것 같아 여름에 우리 집에서 1시간 반쯤 가면 있는 핑거 레이크스 와인 컨트리를 자전거로 2박 3일 정도 돌기로 했다.

 

나홀로 떠난 핑거 레이크스 와인 컨트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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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물든 이타카 폭포 주변. Ⓒ이철재

사람들이 잘 모르는 뉴욕의 모습 중 하나가 바로 와인 컨트리이다. 뉴욕은 미국 내에서 캘리포니아 다음으로 와인을 많이 생산하는 주이다. 물론 캘리포니아가 미국 와인의 90%를 생산하고, 나머지 주 들이 10%를 놓고 경쟁을 하는 것이지만, 뉴욕은 어쨌든 2위권의 와인 생산지이다. 그리고 핑거 레이크스 지역은 뉴욕에서도 알아주는 와인 생산지이다. 종류별로 여러 가지 와인이 골고루 나오는데 레드 와인은 솔직히 말해 정말 아니다.

특히 와인의 황제라는 카베르네 소비뇽은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타는 목마름을 견디며 뙤약볕을 받고 자란 포도로 담가야 특유의 검붉은 와인이 나온다. 고기와 함께 먹으면 그 와인 안의 수많은 풍미가 입에 닿는 순간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여러 모습으로 스쳐 지나가며 고기의 맛과 어우러져 목구멍을 타고 식도를 지나 위까지 코팅 해준다. 이것이 미국 사람들이 줄여서 “캡”이라 부르는 캘리포니아 카베르네 소비뇽이다.

뉴욕 캡은 색깔부터가 검붉기는커녕 잘 익은 홍시처럼 맑디맑은 색으로 입에 닿는 순간 허무하게 사라진다. 하지만 핑거 레이크스와 기후가 비슷한 알자스 지방 포도인 리슬링으로 만든 와인들은 유명하다. 꽃향기와 과일 맛, 거기에 드라이 와인답지 않게 달달한 맛이 도는 게뷔르츠트라미너(Gewurztraminer)도 핑거 레이크스의 대표적 와인이다.

네 남자들의 계획은 2박 3일 자전거로 돌면서 저녁 때 와인 테이스팅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올 5월 그 네 명 중 한 명이 나이도 잊고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다 강풍을 만나 고꾸라지면서 하마터면 전신 마비가 될 뻔했다. 천만다행으로 척추 뼈 하나가 골절되는 것에 그쳤으나, 척추 골절도 가벼운 부상은 아닌지라, 두어 달 꽉 끼는 보기에도 매우 불편한 조끼 같은 것을 24시간 착용하고 있었다.

그는 워낙 의사 말을 잘 듣는 사람이라 빨리 회복하여 여름이 가기 전 코르셋처럼 꽉 끼는 조끼를 벗었지만, 3일씩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는 건 무리일 듯싶어 와인 컨트리 자전거 여행은 올해 하지 못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아쉬워 나 혼자 핑거 레이크스 와인 컨트리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단풍이 물든 포도밭을 나 혼자 운전하고 지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핑거 레이크스는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아 흐르다 막힌 물이 그대로 고여 생긴 11개의 호수를 묶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들은 남북으로 가늘고 길게 손가락처럼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이 중 가장 면적이 넒은 호수는 세네카 호수(Seneca Lake)이고 면적은 세네카 호수에 이어 두 번째로 넓지만 남북으로 뻗은 길이가 가장 긴 호수는 카유가 호수(Cayuga Lake)이다. 카유가 호수를 끼고 있는 한 도시가 있는데 아마도 핑거 레이크스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일 것이다. 바로 이타카(Ithaca)이다. 

 

이타카와의 작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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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카 시내 옆 카유가 호수 Ⓒ이철재

호머의 『오디세이』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라틴어식 이름은 율리시스이다. 그리고 율리시스가 『오디세이』에서 10년의 항해 끝에 마침내 돌아가는 고향의 이름이 이타카이다. 카유가 호숫가에 있는 이타카는 물론 율리시스의 고향이 아니다. 오디세이에 나오는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일 뿐이다. 카유가 호숫가의 이타카라는 작은 도시가 유명한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사학의 명문 코넬대학교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타카와 이타카를 꿰뚫고 고인 카유가 호수는 주변의 산에 둘러싸인 계곡이다. 이타카도 수억 년 전에는 강이었다고 한다. 운전을 하다 이타카 입구 신호등에 걸려 서면 천길 아래로 이타카 시내가 보이고 그 옆에 카유가 호수가 반짝거리고 있다.  

이타카는 나와 작은 인연도 있다. 텍사스에서 대학을 졸업하던 해 이타카에서 자기네 동네 공립학교에 교사로 오지 않겠냐는 편지를 받았다. 이미 뉴욕시에서 대학원 공부를 더 하기로 진로를 정해서 재고도 해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누군가 나를 원한다는 것이 참 기뻤다. 그게 벌써 30년 전이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다.

30년 전의 작은 인연이 돌고 돌아 이제 시라큐스에 사는 나와 이타카는 이웃이 되어 만났다. 30년 전에는 이타카가 어디에 붙었는지도 몰랐는데. 이래서 “침 뱉고 간 우물에 물 마시러 다시 온다”는 속담이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다시 만나 얼굴 마주보며 살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이타카에 자주 간다. 그곳에 나의 카이로프랙터 닥터 댄 베일리(Dan Bailey)가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 일이 생각보다 컴퓨터에 앉아 글 쓰는 시간이 많다보니 늘 어깨와 목이 뻐근하다. 이를 풀어주는 고마운 분이 닥터 베일리이다. 원래는 시라큐스에서 개업을 했는데 한 10년 전 고향 이타카로 이사를 갔다.

나는 한번 인연을 맺으면 새 사람에게 잘 적응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10년째 한 시간 넘게 운전을 하고 이타카로 가서 닥터 베일리에게 진료를 받는다. 이소룡이 적을 소리 없이 죽일 때 하듯 내 목을 우두둑 소리가 나게 비트는 사람이 카이로프랙터이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내 목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친해져 그냥 댄이라고 부르고 코넬 대학에 교수로 오거나 유학 오는 사람을 만나면 목이 뻐근할 때 닥터 베일리를 찾아가라고 광고도 열심히 한다.

댄에게 진료 받으러 이타카 가는 날을 핑거 레이크스 와인 컨트리 여행의 디데이로 잡았다. 행선지는 이타카 폭포(Ithaca Falls), 탁카낙 폭포(Taughannock Falls), 왓킨스 글렌(Watkins Glenn) 그리고 끝으로 글레노라 와인 농장(Glenora Wine Cellars)이다. 와인 농장 내 숙박시설에서 하루 자고 시라큐스로 돌아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사실 하루에 다 돌 코스는 아니고 한군데 골라 며칠 캠핑이라도 할 수 있는 곳들이지만, 바람 쐰다는 기분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수억 년의 역사를 손으로 만지다


댄이 나를 테이블에 엎어 놓고 여기저기 우지직 소리가 나게 누르면서 구경거리들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특히 탁카낙 폭포를 볼 때 꼭 정상에 전망대(Overlook)로 가서 폭포를 위에서 보고, 운전을 하고 내려와 차를 밑에 주차장에 세우고 거기서 걸어 들어가 폭포 밑으로 가라고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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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서 바라본 이타카폭포 Ⓒ이철재

댄 덕분에 가뿐해진 몸으로 우선 이타카 폭포로 갔다. 늘 댄에게 진료를 받고 시라큐스로 가기 전에 코넬 대학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언덕에 차를 세우고, 잠시 낭떠러지 밑에 폭포를 바라보다 간다.

이날은 주변이 완전히 가을 색으로 물들어 더없이 아름다웠다. 게다가 근자 비가 많이 와 폭포의 물도 힘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물이 흘러내려가는 계곡 위로 난 다리에 서서 폭포의 사진을 찍고 돌아서서 물이 흘러내려 가는 것을 찍으려 찻길을 건너 다리 반대편으로 가니 계곡으로 물이 흘러가고 멀리 울긋불긋 색이든 이타카 시내와 카유가 호수가 넓게 펼쳐진 것이 사진 한 컷에 모두 들어왔다. 이타카 폭포는 조촐한 것이 그냥 이걸로 끝이다. 하지만 시내에 자연폭포가 있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큰 여유를 준다.

이타카에서 차를 몰고 20분 정도 가면 탁카낙 주립공원이다. 입구에 입장료 받는 곳이 있기는 한데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고, 차들이 그냥 무시로 드나들었다. ‘뭐, 안 받겠다는데 굳이’하는 마음으로 나도 그냥 들어갔다. 탁카낙 폭포에 가보니 왜 댄이 내 목을 비틀면서 전망대부터 올라가라고 말해 줬는지 알 것 같았다. 전망대에서 폭포까지 걸어가려면 5Km 넘게 가파른 산길을 걸어 내려갔다가 다시 차가 있는 산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지만, 위에서 보고 밑에 내려와서 차를 세우고 걸어가면 평지 길로 1.5Km 정도만 가면 폭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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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 올라서니 말발굽 모양의 절벽에 울긋불긋 물이든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그 한가운데 좌우로 시종을 거느린 여신처럼 한줄기 폭포가 쏟아지고 있다. 나이아가라 강에 있는 세 개의 폭포 즉 우리가 뭉뚱그려 나이아가라 폭포라 부르는 폭포들에 비해 훨씬 작은 규모지만, 낙폭은 그들보다 10m 이상 높다. 나이아가라 폭포 셋 중 가장 큰 캐나디언 폭포의 높이가 167피트인데 비해 탁카낙 폭포의 낙차는 215 피트(약 65m)이다. 로키산맥 동쪽에서 가장 높은 폭포이기도 하다. 

전망대는 1800년 중반부터 관광지로 개발되어 1850년에는 유명한 호텔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제 그 호텔은 역사 속에 묻혀 사라지고 탁카낙 폭포 지역 전체가 주립공원이 되었다. 왜 이곳에 그렇게 일찍 관광지 호텔이 들어섰는지 알 수 있었다. 폭포와 경치가 바로 선 자리에서 그대로 한눈에 들어왔다. 차를 몰고 내려와 다시 차를 대고 걸어 들어가 폭포 바로 밑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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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적물이 굳어 만들어진 협곡의 암벽. Ⓒ이철재

가는 길에 푯말이 있어 읽어봤더니 신기한 사실이 적혀 있었다. 탁카낙 폭포는 뉴욕주의 내륙에 위치한 곳이지만 주변에 암반은 모두 바다 속 깊은 곳에서 생기는 석회암(Limestone)층이다. 알지(Algae)라는 바다 식물의 죽은 찌꺼기와 다른 미생물체의 시체들이 쌓여 돌이 된 것이다.

뉴욕주의 대부분이 바다 물속에 잠겨 있던 시절, 천길 바다 물속에서 수억 년 쌓인 퇴적물이 돌이 되고, 3억 8천만 년 전쯤부터 땅위로 올라와 산이 되었고, 다시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깎인 곳이 깊은 골짜기가 되어 폭포가 생기고 물이 흘러가는 협곡, 영어로 고지(Gorge)가 되었다.

날씨가 매우 화창했지만, 폭포 옆으로 가야 해서 우비를 입고 신발도 겨울에 눈 쌓인 산속에서 지도 한 장 들고 길을 찾아 나오는 스노우슈잉(Snowshoeing)이라는 겨울 등산 비슷한 놀이를 할 때 신는 방수 신발을 신고 왔는데 잘한 일이었다. 물이 사방에서 튀고, 진창길이 한동안 계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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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카낙 폭포. Ⓒ이철재

폭포로 걸어 들어가면서 여기저기 사진을 계속 찍었더니 한 40분가량 걸려 폭포까지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슬슬 구경만 하며 걸어 나와 20분 만에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걸어 나오며 굽이굽이 물에 쓸려 칼처럼 날카롭게 동강 난 협곡의 양옆을 손으로 만져보며 ‘내가 지금 수역 년의 역사를 손으로 만지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탁카낙을 나와 20분 정도 운전을 해 왓킨스 글렌으로 갔다. 글렌(Glenn)도 역시 고지처럼 협곡이라는 뜻이다. 뭐가 다른 건지는 그리 확실치 않다. 그냥 이름이 글렌이면 글렌이라 부르면 되고, 고지이면 고지라 부르면 된다. 탁카낙 폭포는 산 위에서 걸어 내려가는 입구와 평지로 걸어 들어가는 길 두 가지가 있었지만, 왓킨스 글렌은 입구가 하나 밖에 없다. 게다가 왓킨스 글렌은 그 입구가 탁카낙에 비해 훨씬 비좁은 길을 내려간다.

산 위에서 계곡을 걸어 내려가 폭포가 보이는 곳에서 부터는 돌산을 깎아 만든 계단을 거쳐 한없이 내려간다. 그리 가파른 길은 아니지만 걷는 거리가 꽤 된다. 산 위로 차를 몰고 올라가 차를 세우고 등산로를 따라 산을 내려가다 보면 릴리 폰드(Lily Pond)라는 아주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주위로 울긋불긋한 나무들이 둘러 서 있다.

“떡갈나무 숲 속에 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냇물 있기에…” 하는 노래가 흥얼흥얼 나온다. 냇물은 물소리 때문에 ‘아무도 모르기’가 그리 쉽지 않지만, 릴리 폰드는 물소리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숨어 거울처럼 하늘과 나무를 그 안에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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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 용트립 틀 듯 나가는 왓킨스 글렌 Ⓒ이철재    

릴리 폰드를 지나 한참 가다 보면 그때부터 돌산으로 꽉 막힌 아주 좁은 지역이 나오고 밑에 물이 흐르며 폭포와 글렌이 보인다. 폭포 앞에서 서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 탁카낙과 달리 왓킨스 글렌은 폭포 뒤로 돌아가 떨어지는 물 뒤에 서서 협곡이 구불구불 용트림을 틀 듯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곳도 탁카낙의 협곡처럼 빙하기의 얼음이 녹아 할퀴고 지나간 자리이다. 물의 힘이 얼마나 강했으면 산이 조각나 골짜기가 되었을까? 폭포 뒤로 돌아 들어가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왔다. 

정신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폭포를 올려다보기도 하고, 폭포 뒤로 들어가 내려다보기도 하다 다시 내려온 길을 되올라가 자동차까지 갈 생각을 하니 한심했다. 그때가 벌써 오후 2시가 넘어 배도 무척 고팠다. 그래도 걷는 것 하나는 자신이 있는 나는 작심하고 쉬지 않고 골짜기를 단숨에 걸어 올라가 자동차로 갔다. 차에 앉아 보온병에 가득 담아온 케냐 가투부 압(Kenya Gatubu Ab) 커피와 삶은 달걀 두 개 그리고 사과 한 알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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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들은 모두...  

다음 행선지는 최종 목적지인 글레노라 와인 농장(Glenora Wine Cellars)이었다. 운전을 하고 가며 생각했다. 수억 년 바다 속 식물의 죽은 조각이 쌓여 돌이 되고 그것이 물위로 올라와 산이 되고, 산에 얼음이 산보다 높게 쌓여 있다 그것이 녹아내리며 산을 동강 내는 시간은 과연 어떤 시간일까? 주변의 전화기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힘차게 외치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여섯 시!” 바다가 육지가 되고, 산이 동강나는 시간은 과연 그 “여섯 시!” 하는 시간과 같은 시간 체계일까? 그 세월도 “다섯 시,” “여섯 시”가 차곡차곡 모여서 된 시간일까?

대학시절 봤던 영화 중에 내 평생 잊지 못할 영화가 오리지널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이다. 마지막에 인조인간 로이가 죽기 직전 비를 주룩주룩 맞으며 이렇게 독백한다.

“이 순간들은 모두 시간 속에 사라질 것이다. 빗속에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다(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

그는 기계이지만 그 마지막 순간만큼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단지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수십 억 년 걸려 이 자리에 산이 생기고 협곡으로 물이 흐르던 이 순간도 언젠가 빗속에 흐르는 로이의 눈물처럼 시간 속으로 사라질까? 그때쯤이면 나라는 존재가 잠시 이 땅을 걸어 다녔다는 것은 로이의 눈물보다도 하찮은 이야기가 되어 있겠지.  

 

 

 

 

글·사진 이철재 미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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