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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
권정은의 아이 그림 토크
아이 그림을 통해 아이와는 물론 어른과도 소통하고 싶은 권정은입니다.
아이들의 그림은 단순히 보여지는 그림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명화 뒷이야기만큼이나 재미난 것이 많습니다. 아이와 나눈 이야기를 어른들과 나누어 그 순수함의 힘으로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 저자
우리에게 멍때리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 고교생 윤영이가 그린 <멍때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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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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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 <멍 때리는 눈>

“눈이 왜 칼라 바야?”
“제가 멍 때리는 눈이에요.”
“멍 때리는 눈?”

고등학생인 윤영이가 작은 노트에 색연필로 그린 그림이다.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두 눈에 눈동자 대신, 칼라바만 잔뜩 칠한 자화상이다. 매일같이 일상의 단편을 메모처럼 그림으로 기록해온 윤영이다.

그림 속 윤영이는 몸은 작고 얼굴은 아주 크게 그려, 마치 인형 같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쳐 들고 있는 모습인데 눈은 책이 아닌 앞을 보고 있다. 눈동자도 없어 칼라 바만 있으니 책을 본다 해도 내용이 읽어질지 의문이다.

아이가 앉아있는 책상 앞, 방바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컵에선 물이 쏟아져 흐르고, 두루마리 휴지도 길게 널브러져 있다. 그뿐 아니다. 자세히 보면 방바닥에는 돗자리 펴고 누워 하늘을 보며 여유를 즐기는 작은 사람과 아이스크림을 옆에 두고 뒹굴뒹굴하는 사람도 보인다. 이들 옆에 놓인 책들은 분명 만화책이나 재미있는 잡지이리라.

그나저나 이 상황은 도대체 뭘까?

“아휴! 선생님, 전 취미가 멍 때리기인가 봐요. 중간고사 기간인데도 공부 안 하고 멍 때리고 있다가 문득 제가 너무 한심해서 그냥 그려본 거예요. 하도 멍 때리니까 눈에서 '삐'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요.”

TV에서 화면 조정 시간에 칼라 바(조정화면)가 나오던 것을 기억하는가? '삐'하는 소리가 함께 나오는데, 그게 아이는 TV가 넋 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자신도 시험공부 안 하고 넋을 놓고 있으니, 눈에서 삐 소리가 나는 것 같아 아예 자화상 눈을 칼라 바로 만들어 버렸다는 말이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아이가 그린 칼라 바로 가득 찬 두 눈은 정말로 뇌가 이완할 때 나온다는 뇌파인 세타파가 넘쳐 흘러나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삐' 소리와 함께 말이다.

아이는 자기를 탓하는 심정으로 이 그림을 그렸지만, -물론 시험 때 공부 안 하고 넋 놓아 시간을 보내는 게 그다지 칭찬할 일은 아니지만- 멍 때리는 것 자체는 사실 비난받을 일만은 아니다. 우리가 보통 멍 때리는 사람을 보면 “왜 이리 멍때리고 있어?” 이렇게 말하곤 하지만, 사실 멍 때리기는 우리가 고상하게 생각하는 정신의 이완훈련인 명상의 친척쯤 되기 때문이다.

뇌파를 보면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 나오는 뇌파는 베타파라고 해서 초당 14~100Hz라고 한다. 그런데 이 뇌가 계속된 긴장으로 쉬지 못하면 초조함도 나타나고 판단능력도 점차 떨어지고 한다. 즉, 뇌는 쉬어줘야 제 기능을 한다는 말이다. 수면 상태야 말로 뇌가 완전히 이완된 상태이다. 다만, 뇌를 이완시키되 집중하고, 집중하되 이완시키는 작업을 하는 상태가 있는데, 그게 바로 명상이다. 이때는 초당 8~14Hz의 알파파가 나온다.

명상 때는 알파파뿐 아니라 세타파도 나온다고 한다. 세타파는 우리가 보통 넋 놓고 있을 때 나오는 뇌파로 4~8Hz이다. 이것은 명상보다 좀 더 느슨한 상태로 우리가 선잠이 들었을 때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가끔 하는 멍 때리기는 어쩌면 우리의 지친 뇌에 제공하는 휴식 처방일 것이다.

명상하려면 호흡에 집중하고 한 곳을 지긋이 바라보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하는 멍 때리기는 그런 노력 없이 뇌의 휴식으로 가는 지름길인 셈이다. 그림을 그린 아이의 표현대로 멍 때리기를 하는 동안은 눈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릴지 모르지만, 뇌에도 휴식이 없다면 뇌에서 '삐'하는 경고음이 들릴지도 모른다. 

윤영이가 이 그림을 그렸을 때가 몇 해 전이다. 기발한 표현의 그림을 본 후 정확히 일주일 뒤인가 TV에서 멍 때리기 대회를 한다는 뉴스를 봤다. 그만큼 이제 많은 이들도 멍 때리기의 긍정적 효과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멍 때리기 대회에 이 그림을 포스터로 추천하고 싶었다)

멍 때리기로 아이는 그림을 만들어냈고, 그로 인해 난 멍 때리기의 긍정적 효과를 바라보는 시선이 생겼다. 아이는 시험을 망쳤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이런 명작을 낳았으니, 어쩜 시험 한 번 더 잘 본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시간이지 않을까? 여러분도 가끔 멍 때리기를 하시지 않는가? 우리는 어쩌면 본능적으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멍 때리기를 하는지 모른다. 생각의 진공상태를 통해 내 안의 더 빛난 것들을 채워 넣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이제 옆에서 멍 때리는 사람을 보고 왜 그러고 있냐 핀잔주지 말자. 스스로에게도 말이다.

우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고 있다. 그러니 너무 과거의 안 좋은 기억, 미래의 불안으로 현재를 낭비하진 말아야겠다. 현재를 충실히 살기 위해선 열심히 뇌 운동을 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시원한 물 한 잔 마시고 호흡 고르는 것처럼 멍 때리기도 필요하다. 당신의 뇌에 윤영이의 그림처럼, 휴식을 주기 바란다. 당신 안에 더 빛나는 것들을 다시 채워 넣고 싶다면 말이다.

 

 

권정은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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