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p 로고
칼럼진
공부하고 싶은 사람만 읽는 인물 과학사
인류의 과학 문명을 만든 과학자들의 발상과 과학 원리를 공부하는 곳입니다. 논문처럼 어렵지는 않지만 아주 쉽게 술술 읽히는 글도 아닙니다. 시간이 있고 걱정거리가 없을 때 천천히 읽으면 좋습니다.
산소는 누가 발견했을까? 上 프리스틀리‧셸레‧라부아지에
topclass 로고
입력 : 2019.10.09
그림 신로아

 나무에 불을 붙이면 연기와 불꽃이 피어오르고 뜨거운 열도 발생한다. 공기만 잘 통한다면 불붙은 나무는 계속 타오르다가 결국엔 재만 남게 될 것이다.
 물질이 탈 때, 즉 연소(燃燒, combustion)할 때는 열과 빛이 난다. 그런데 물질이 연소하면 질량은 어떻게 변하는 것일까? 나무를 태웠더니 재만 남았다는 관찰 사실로 질량이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무가 탈 때 피어오른 연기는 연소 과정에서 탈출한 물질이다. 연기는 수증기와 검댕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기체의 혼합물이다. 그 물질들은 가열된 상태에서 빠르게 진동하며 공기 중으로 손쉽게 흩어져 날아간다. 어디론가 날아간 물질은 소멸된 것이 아니다. 단지 장소만 이동했을 뿐이다. 연소 전후의 질량을 따지려면 날아간 물질들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물질이 연소할 때 질량의 변화는 쉽사리 단정할 수 없는 까다로운 문제에 속한다.

연소의 과정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소수의 초기 학자들은 연소가 일어날 때 물질의 질량이 줄어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독일의 의사이자 화학자인 베허(Johann Joachim Becher, 1635~1682)와 그의 제자 슈탈(Georg Ernst Stahl, 1659~1734)은 물질이 연소할 때 뜨거운 열을 가진 성분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슈탈은 그 성분에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연소와 관련된 여러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 적용1)했다.

1) 예를 들어 촛불을 켜고 적당한 크기의 플라스크로 덮어 공기를 차단하면 얼마 후에 촛불이 꺼진다. 왜 꺼지는 것인가? 초가 타면서 흘러나온 플로지스톤이 플라스크 내부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우게 되면 더 이상 플로지스톤이 흘러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플라스크 속에 촛불과 쥐를 함께 넣어두면 초도 꺼지고 쥐도 죽는다. 왜 죽는 것인가? 쥐가 플로지스톤을 너무 많이 흡입했기 때문이다.

 플로지스톤 가설은 17~18세의 학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 조지프 프리스틀리도 그 중의 하나였다.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FRS, 1733. 3. 13 ~ 1804. 2. 6)

1.jpg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1733년 영국 잉글랜드 북부의 작은 마을 필드헤드에서 4남 2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 지 얼마 후 농부인 할아버지에게 맡겨졌으나, 6년 후 어머니가 막내를 출산한 직후에 사망하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3년 후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프리스틀리는 고모네 집에 맡겨졌다. 프리스틀리는 총명하여 어릴 때부터 교리 암송을 매우 잘했다고 한다. 그는 12살부터 문법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언어 학습 능력이 출중하여 히브리어, 아랍어, 시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어 등 여러 나라의 말을 익혔다.

 프리스틀리 일가는 칼뱅주의 개신교를 믿었다. 당시 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와 같은 대학에 입학하려면 국교(The Church of England, 성공회)를 믿어야 했으므로, 프리스틀리는 비국교도들이 설립한 데번트리 신학교에 입학(1752)했다. 그는 신학교에서 철학, 역사, 과학 교육을 받았는데 신앙적으로는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아리우스주의를 택했다.

 1755년 신학교를 졸업한 프리스틀리는 장로교에서 목사직을 시작했지만 비국교도였으므로 신도들과 마찰이 생겼다. 결국 목사직을 잠시 접고 서른 명 정도의 학생을 모아 작은 학교를 열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수업에 쓰기 위해 ≪영문법의 기초, The Rudiments of English Grammar(1761)≫를 저술했다. 이 책은 낡은 형식의 라틴어 문법에서 탈피하여 시대에 맞는 실용적인 영어 문법을 세운 것으로 평가되면서 영국 작가들의 호평을 받았고, 이후 50년 동안 거듭 출판되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프리스틀리는 워링턴 아카데미(Warrington Academy)의 문학 교수로 채용되었고, 이듬해인 1762년 제철업자의 외동딸인 메리 윌킨슨(Mary Wilkinson)과 결혼했다. 1765년에는 역사와 교육과정에 대한 책들을 집필했고 워링턴 아카데미의 교육과정을 역사, 과학, 예술 중점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프리스틀리에게는 말을 더듬는 증상이 있었다. 그는 1765년부터 런던에 한 달씩 머물면서 치료를 받았다. 런던의 커피하우스 모임에 참석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7~18세기 영국의 커피하우스(English coffeehouses)는 철학과 사상을 토론하고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지식인들의 문화 공간 역할을 했다. 정치철학자인 리처드 프라이스(Richard Price), 제조업자 매튜 볼턴(Matthew Boulton), 도자기 사업가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 의사이자 시인인 이래즈머스 다윈(Erasmus Darwin)2), 증기기관 특허를 낸 제임스 와트(James Watt) 등의 진보적인 사상가들은 목요일마다 커피하우스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 미국에서 건너온 벤저민 프랭클린도 합류했다. 프랭클린은 스무 살이나 연장자였지만 그들과 친구처럼 어울리며 그 모임을 ‘정직한 휘그 클럽(The Club of Honest Whigs)’이라고 불렀다.

2) 조사이어 웨지우드와 이래즈머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출판하고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의 외할아버지, 친할아버지이다.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식민지 미국(독립 전의 미국) 보스턴 출생으로 17세에 빈손으로 가출하여 20대에 필라델피아에서 인쇄업자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25세에 펜실베니아 대학에 도서관을 설립하고,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 Poor Richards Almanac, 1732》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인기 작가가 되었으며 30세에 하원의원이 되었다.

 과학에 관심이 많던 그는 사업이 번창하자 운영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40대부터 과학 탐구에 열중했다. 그는 정전기 유도 실험을 통해 전류는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는 전류 가설을 세웠고 전하량, 배터리, 충전, 전도체라는 용어를 만들었으며, 스토브 난로, 피뢰침, 다초점 렌즈를 발명했다. 1752년 번개가 전기와 같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번개가 치는 날에 연을 띄움으로써 과학사에 회자되는 일화를 남기도 했다. 프랭클린은 1753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고 코플리 메달을 받았다.

 또한 식민지 미국의 체신장관을 맡았던 그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외교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프랭클린은 1764년부터 십 년 정도의 기간을 영국에서 보냈지만 각료 사이에 오고간 편지 다발을 유출하여 영국 정부를 곤란하게 만들었고, 1774년 탄핵을 받게 되어 장관직을 박탈당했다. 여론이 험악해지고 신변의 위협마저 느낀 프랭클린은 1775년 3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오고 한 달 후에 미국 독립 전쟁3)이 발발했다.

 프랭클린은 외교력을 발휘하여 프랑스와의 동맹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고 이에 힘입은 미국 식민지 연합이 독립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1776년 7월 4일 공포된 미국 〈독립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한 5인의 한 명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는 영예로운 칭호도 얻었다. 훗날 프랭클린은 대통령을 지내지 않은 인물로는 유일하게 미국 달러 지폐에 초상이 실리는 영광도 얻었다. 미국 100달러 지폐에서 그는 오묘한 미소를 머금은 현인 특유의 표정을 짓고 있다. 

3) 미국 독립 전쟁(1775년 4월 19일~1783년 9월 3일):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13개 식민지 연합 사이에서 발발한 전쟁. 영국의 패배로 〈파리 조약(1783)〉이 체결되어 미합중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noname02.jpg
벤저민 프랭클린 초상이 그려진 100달러 지폐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정직한 휘그 클럽’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친구들의 과학 업적을 책으로 펴내겠다고 제안했고 이를 실천했다. 프리스틀리는 1767년 출간한 ≪전기의 역사와 현 상태와 초기 실험들, The History and Present State of Electricity≫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벤저민 프랭클린의 업적을 소개했고 전기 발견의 역사에 대해 기술했다. 이 책은 인기 있는 대중서가 되었으며, 훗날 예일대학의 자연과학 교재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프리스틀리는 휘그 클럽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탐구 실험에도 뛰어들었다.

 그는 프랭클린이 수행한 전기 컵 실험을 보고 전기력에도 중력처럼 역제곱 법칙이 적용될 것이라고 직감으로 추측했다.4) 프리스틀리는 전기 실험을 하면서 미래의 라디오 기술에 활용되는 전기의 떨림 방전 현상을 관찰하기도 했으나 이와 같은 현상을 물리학적으로 해석할 지식의 토대는 없었다.

4) 전기력이 거리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은 1785년 오귀스탱 쿨롱(Charles-Augustin de Coulomb, 1736~1806)이 실험으로 입증했다. 쿨롱의 법칙.

 

 프리스틀리는 우연히 맥주 양조장에 들렀다가 양조 통에서 거품이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거품은 다름 아닌 이산화 탄소로 당시에는 ‘고정된 공기’라고 불리고 있었다. 프리스틀리는 고정된 공기를 물에 통과시켜서 톡 쏘는 산뜻한 맛의 탄산수를 만들었고 ≪고정된 공기로 물에 활기를 되찾게 하는 법, Directions for Impregnating Water with Fixed Air(1772)≫을 출간하여 탄산수 제조법을 공개했다. 이것이 탄산음료의 시초가 되었다.

 기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 프리스틀리는 1771년 밀봉한 유리병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했다. 밀봉한 유리병 속에 초를 넣으면 촛불이 머잖아 꺼진다. 그 속에 생쥐를 넣으면 몇 초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죽는다. 프리스틀리는 식물도 마찬가지로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박하를 집어넣어 관찰했다. 그러나 박하는 며칠이 지나도 시들지 않고 멀쩡했다. 또한 박하를 넣어두었던 유리병 속에 촛불을 넣으면 잘 타올랐고, 생쥐를 투입하면 십 여분 동안 활기를 띤 채 죽지 않았다. 프리스틀리는 발삼, 개쑥갓, 시금치와 같은 종류를 넣고 실험을 거듭한 후 식물이 공기를 원상태로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결론을 얻었고, 왕립학회 의장을 맡기로 예정되어 있던 존 프링글(Sir John Pringle) 경을 데려와 공기 복구 실험을 재현해 보였다.

 프리스틀리는 금속과 산을 반응시키는 실험을 통해 이산화 질소, 일산화 질소를 발견하고 연이어 암모니아, 염화 수소와 같은 여러 종류의 기체도 발견했다. 가장 극적인 실험은 1774년 8월 1일에 이루어졌다. 그는 밀폐된 용기 속에서 산화 수은을 볼록렌즈로 가열하여 태웠을 때 기체가 발생하는 것을 관찰했다. 그 기체는 밀폐 용기 속에서 촛불을 활활 타오르게 했고 쥐가 장시간 살아있도록 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프리스틀리는 그 기체에 ‘탈(脫) 플로지스톤 공기(dephlogisticated air)5)’라는 이름을 붙였다.

5) ‘탈 플로지스톤 공기’는 ‘플로지스톤이 없는 공기’라는 뜻이다. 플로지스톤 가설에 의하면, 플로지스톤으로 꽉 찬 공기에서는 촛불이 꺼지고 생쥐도 금방 죽는다. 그러나 산화 수은을 태워 발생한 기체는 촛불과 생쥐를 오래 살도록 만들었으므로 플로지스톤 이론을 믿었던 프리스틀리는 그와 같은 이름을 붙였다.

 

 프리스틀리는 자신이 수행한 실험의 결과들을 정리하여 1774년 ≪다른 종류의 공기에 대한 실험과 관찰,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different Kinds of Air≫을 출간했다. 

noname03.jpg

 ≪다른 종류의 공기에 대한 실험과 관찰≫에 실린 실험 도구 그림과 속표지
출처: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different Kinds of Air≫ archive.org

 

 1776년 왕립학회는 탄산수 제작 및 공기의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프리스틀리에게 코플리 메달6)을 수여했다.

6)코플리 메달(Copley Medal): 코플리(Sir Godfrey Copley, 2nd Baronet) 경이 영국 왕립학회에 기부한 기금을 토대로 1731년부터 매년 물리학 또는 생물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보인 연구자 1명을 선정하여 메달을 수여하는 과학 분야의 가장 오래된 상.

 프리스틀리는 화학뿐만 아니라 전기, 광학에 대한 책을 집필했고, 철학과 신학, 정치에 관한 다수의 책도 펴냈다. 1768년 출간한 ≪통치의 제1원리들에 관한 에세이, An Essay on the First Principles of Government, and on the nature of Political, Civil, Religious Liberty≫에서 프리스틀리는 ‘개인은 정치적 자유, 시민의 자유, 종교적 자유를 누려야 하며, 정부의 정책은 다수의 이익과 행복을 따라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이 책은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에게 큰 영향을 주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를 이끌어 낸 것으로 평가된다. 

 1780년 프리스틀리는 가족(아내, 딸1, 아들3)을 데리고 버밍엄으로 이사하여 목회 활동과 연구 활동을 병행했다. 그는 연구비 충당을 위해 책이 출판되면 우선적으로 증정할 것을 약속하고 후원자들을 모았다. 이는 오늘날 리워드 펀딩(reward funding)이라 불리는 모금 방식과 동일한 것이었다.

 1782년 그는 용감하게도 ≪기독교 부패의 역사, An History of the Corruptions of Christianity≫를 출판했다. 반발과 비난이 솟구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성토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의 과학 업적까지 폄훼하는 비난도 이어졌다. 프리스틀리는 비판에 대한 응답 형식으로 ‘자유로운 탐구와 그 정도’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제작하고 설교도 했다.

 그는 설교문에 「우리는 말하자면 오류와 미신이라는 낡은 건물 밑에 화약을 하나씩 설치하고 있는 것이며, 여기에 불꽃 하나만 튀면 불타올라 즉각적으로 폭발하게 될 것이다.(스티븐 존슨 ≪공기의 발명≫ 비즈엔비즈, 2010. 본문 인용)」라고 썼다. 이 연설은 ‘화약 설교’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는 ‘화약 조(Gunpowder Joe)’라고 불리며 극우 세력의 표적이 되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Révolution française)이 일어났다. 미국 독립전쟁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된 상황에서 프랑스 절대왕정의 횡포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이 쌓이다가 흉년으로 민생이 더욱 피폐해지자 일어난 혁명이었다. 프리스틀리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며 기고문을 게재하였고, 간행물을 통해 ‘권력은 오로지 국민에게만 귀속된다’라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프리스틀리와 뜻을 같이 하는 철학자 프라이스도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며 열정적으로 설교하고 다녔다.

 1791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을 축하하는 사람들이 호텔에 모여서 만찬회를 했다. 그들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이 호텔로 몰려와 난동을 부릴 수도 있다는 호텔 측의 의견을 듣고 만찬 시간을 앞당겨서 서둘러 끝마쳤다. 극우 노동자로 구성된 폭도들의 습격은 실제로 일어났다. 그들은 호텔로 몰려왔다가 허탕을 치자 호텔에 불을 지르고 프리스틀리의 집으로 몰려가 집을 점령했다. 폭도들은 그곳에서 밤새 술을 마시고 집을 불태웠는데 화재로 약해진 집이 무너져 그들의 무리도 열 명이나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습격 때 피신했던 프리스틀리는 버밍엄을 떠나 해크니로 이사하였고 낡은 교회의 목사로 집무를 보았다. 1792년 프랑스 의회는 프리스틀리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했는데 이 일로 그는 반역자라는 소리마저 들어야 했다. 결국 프리스틀리 부부는 1794년 봄에 고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가는 여객선에 올랐다. 그의 사부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4년 전에 타계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프리스틀리는 아메리칸 예술 과학 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의 명예회원이었고, 펜실베니아에 토지를 분배받아 정착한 아들 조지프 주니어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막막한 도피는 아니었다. 

 프리스틀리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명사들의 환대를 받았다. 신문사들도 앞을 다투어 환영의 기사를 실었다. 그는 아내가 조용한 시골에서 살기를 원했으므로 펜실베니아 중부에 있는 노섬벌랜드를 택해 정착했다. 1795년 2월 그의 교회 설교 때에는 부통령 존 애덤스(John Adams, 미국 1대 부통령, 2대 대통령)도 찾아와 참석했다. 그런데 그해 12월에 막내아들 헨리가 열병으로 사망했고, 충격을 받은 엄마 메리도 시름시름 앓다가 이듬해 9월에 죽고 말았다. 

 이후 프리스틀리는 종교적으로 천년왕국설에 심취했는데, 부통령 애덤스는 점차 그를 멀리 했다. 대신에 애덤스의 정적인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과 친해졌다. 1797년 애덤스가 2대 대통령이 된 후에 프리스틀리는 어떤 급진주의자의 서신을 받았는데 이것이 영국 언론이 유출되어 프랑스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곤욕을 치렀다. 그의 스승 프랭클린도 편지 유출 사건으로 고난을 겪었는데 그도 똑같은 일을 당한 것이다. 프리스틀리는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 애덤스 정부에 대한 항의 서한을 보내는 등 분개했지만, 애덤스가 서명한 ‘외국인 규제법’ 7) 에 따르면 프리스틀리는 추방을 당할 수도 있었다. 

7) 외국인 규제법(Alien and Sedition Acts): 1798년 대통령 존 애덤스가 서명한 법으로 “대통령은 위험한 것으로 여겨지는 외국인을 투옥하거나 추방할 수 있다. 비판적인 허위 진술을 범죄로 취급할 수 있다”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악명 높은 법.

 1801년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한 제퍼슨은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평온을 찾은 프리스틀리는 이후 교회를 비판하는 책을 몇 권 더 출간했고, 1804년 2월 6일 사망했다. 그는 임종 직전에도 출판할 서적의 수정할 부분을 아들에게 구술한 후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진다.

 

신규진 경성고 과학교사 《너무 재밌어서 잠못드는 지구의 과학》 저자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