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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
권정은의 아이 그림 토크
아이 그림을 통해 아이와는 물론 어른과도 소통하고 싶은 권정은입니다.
아이들의 그림은 단순히 보여지는 그림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명화 뒷이야기만큼이나 재미난 것이 많습니다. 아이와 나눈 이야기를 어른들과 나누어 그 순수함의 힘으로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 저자
색채 화가 훈데르트바서를 닮았구나! 열다섯 살 서영이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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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0.09
15세. 심서영作

“네 그림을 보면 오로라가 생각이 나. 근데 내가 아직 못본 것 중에서 제일 보고 싶은 게 오로라야.”
“저도요! 저도요! 전 오로라가 제일 보고 싶어요.”

오로라같은 색채에 취할 것만 같은 열다섯 살 서영이의 그림을 보고 나눈 대화다.
서영이의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색채 그 자체였다.

서영이를 처음 만난 날. 간단한 토끼 얼굴을 그릴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색채를 쓰고 장식적인 패턴을 그렸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화실의 풍경을 색연필로 꼼꼼히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서영이는 그림을 그리기 전, 휴대전화로 화실 안을 사진부터 찍더니 그 사진 위에 이런저런 붉은 색과 노란색의 마크를 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냐 물어보니, '화실 천정의 등에서 나오는 빛이 등만 감싸는 게 아니라, 벽에 걸린 그림이나 매달려있는 조형 작품들을 함께 감싸고 있는 것이 보여서 그 빛을 그려야 할 자리들을 붉은색으로 표시한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노란색 표시는 자기가 패턴으로 바꿔 그릴 곳을 표시한 것'이라 했다. (벽면에 가득 있는 낙서는 패턴으로 바꿔서 그렸다.) 

색연필로 꼼꼼하게, 온 정성을 다해 색칠하고 완성한 그림은 그야말로 색채의 향연이었다. 색의 눈부심 때문에 알코올에 취한 느낌이었다.

서영이가 바라본 대로 전등에서 나오는 빛은 그 주변뿐 아니라 천정의 파이프 아래 매달린 조형물 주변과 벽에 걸린 그림 가장자리, 그리고 벽 위의 낙서를 패턴화시킨 이미지 가장자리까지 전부 비추어, 주변이 네온 빛의 색으로 둘러싸여 있다.

또한, 자칫 무시되기 쉬운 가장자리도 그랬다. 왼쪽 가장자리 아래는 노란빛이 뚝뚝 맑게도 떨어진다. 이 아이의 눈은 특별한 필터를 가지고 있어서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이 필터를 거쳐 이렇게 색으로, 색으로 계속 불타오르게 보이나보다.

도화지 안에서는 이토록 다양한 색들이 춤추고 있지만, 내게 제일 먼저 들어온 색의 인상은 붉은색에 가까운 주홍빛이다. 마치 초록이나 파랑은 이 주홍빛을 강조하기 위해 쓰여진 보색처럼 보인다. 붉은 잎에게 자리를 내준 초록 잎들이 나뭇가지에 남아 붉은색을 더 돋보이게 해주듯이 말이다. 우아한 깊이의 가을 색이 그들만의 파티를 연다면 딱 이런 분위기일 것 같다.

나는 "많은 색채 속에서도 유독 주홍빛이 인상에 남는다"고 말했다. 서영이는 "자기가 자연에서 좋아하는 빛이 있는데, 그게 노을"이라고 답했다. "노을의 붉은 빛이 참 아름다워서 그림에 색을 칠할 때는 자주 그 노을빛을 떠올린다"고 했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도 그 빛을 떠올려서 천정의 흰 전등갓을 붉은색으로 바꾸고, 벽의 패턴 주위나 미술작품 주위의 빛들을 그런 빛나는 밝은 붉은색으로 입힌 것이란다.

“와! 너의 의도와 선생님이 감상이 잘 통했구나! 색으로 통하는 마음이네?”
“헤헤.”
“그런데 이렇게 색을 화려하게 칠하는 이유는 뭐니?”
“그냥 뭔가를 보면 색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그냥은 없어. 너의 내면에 잘 귀 기울여봐. 그냥이 아니라,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나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서영이는 이렇게 말했다.

“색을 칠하지 않으면 그것은 마치, 아무 맛이 없는 푸딩이나 식빵을 먹는 느낌인 것 같아요. 거기에 맛난 쨈을 발라야 그것이 정말 맛있어지는데, 그렇게 식빵에 제가 좋아하는 쨈을 올리듯이 색을 올리는 거예요.”

아이에게 색 없는 그림은 앙꼬 없는 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 뭐 이런 것인가보다.

“그런데 색을 올려도 부드러운 색들도 있잖아. 굳이 이렇게 선명하고 화려한 색채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니?”
“부드러운 색보다는 화려하고 강한 색이 기억에 남고, 남에게도 기억에 남게 하기 때문이예요. 개성 있는 색이 눈에도 잘 들어오고, 계속 그 색의 잔상이 나와 타인 모두에게 기억에 남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저를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관심이 크지 않지만, 제가 바라보는 세계는 화려했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바라보는 세계는 화려했으면 좋겠다는 아이, 그 화려한 세상을 위해 아이의 그림에서 열심히 그 역할을 또 하는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기하학적인 패턴 장식이다. 벽에 가득한 패턴을 하나하나 그리느라 아이는 무척 오랜 시간을 공을 들였다. 이 그림 외에도 모든 그림마다 나름의 패턴 장식을 늘 넣곤 한다. 그림에서 패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뭔지 물었다.

“제 생각에 각자가 갖고있는 색이 패턴을 넣으면 더 잘 드러나게 되는 것 같아요. 색 위로, 어떤 패턴을 씌워주면, 색이 흐트러지지 않고 생기를 낸다고 할까요?”

또한, 패턴 자체가 주는 눈을 사로잡는 느낌도 좋은가 보다.

“제가 토끼 외에 좋아하는 동물이 더 있는데, 그게 얼룩말이거든요. 얼룩의 패턴은 이 말이 검은 말인지, 흰말인지 알 수가 없게 만들어요. 그래서 패턴이 재밌어요.”

왜 패턴을 많이 쓰는지, 왜 색이 그림에서 중요한지, 자신도 잘 모른다고, 그냥 좋다고 했던 서영이가 나와 이런저런 대화 끝에 자기 맘속 깊이 있던 무의식을 끄집어내게 되고, 대화 속에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것을 보았다.

서영이의 그림을 보고 생각난 화가가 있었다.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라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화가다. 화려한 색과 패턴이 춤추는 그림을 그린다는 점에서 이 화가의 그림과 열다섯 살 아이의 그림은 놀랍게도 많은 공통점을 보여준다. 서영이에게 훈데르트바서의 그림을 보여주니, “와! 너무 좋아요!” 하며 기뻐했다.

그림이 자기 생각을 하나씩 풀어나가며 그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시각적인 행위가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거꾸로 돌아보는 경우도 있다. 어떤 순서이든, 자기의 마음이, 세상에 대한 자기만의 인식과 인상이 손끝에서 흘러나와 타자와 소통을 하게 된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제법 공기가 차가워졌다. 곧 붉은색, 노란색의 화려한 색채로 물들 가을의 입구에서 열다섯 서영이가 만든 색채에 취하며 짙은 가을을 기대해본다.

 

권정은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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