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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과거를 푸는 열쇠, 동일과정설의 창시자 제임스 허턴(James Hutton, FRSE 1726. 6. 3 ~ 1797.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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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9.17
그림 신로아

 지구는 둥글다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표면이 주름져 있어서 높은 산과 깊은 바다의 고저 차이는 최대 20킬로미터나 된다. 산과 바다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태초부터 육지는 육지였고 바다는 바다였던 것일까? 육지에서 발굴되는 화석들의 다수는 해양생물 화석이다. 8천 미터 이상의 고봉이 즐비한 히말라야 산맥에서도 암모나이트와 조개 화석이 무더기로 산출된다. 이를 두고 옛날에는 조개가 산에서 살았다고 해석해야 할까?

 허턴의 시대에는 위와 같은 일들을 성경과 연관하여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컨대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 전 세계가 물에 잠겼던 적이 있었으므로 육지에서 해양 생물의 유해가 나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는 논리였다.

 지구의 암석층을 제1기, 제2기, 제3기로 처음 구분(1756년)한 독일의 광물학자 레만(Johann Gottlieb Lehmann, 1719~1767)은 제1기 암석은 천지창조 때, 제2기 암석은 대홍수 때, 제3기 암석은 대홍수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이탈리아의 광물학자 아르뒤노(Giovanni Arduino, 1714~1795) 역시 레만과 비슷하게 지구의 암석을 제1기~제4기로 구분하였는데, 제1기 암석에 화석이 없는 이유는 생물이 등장하기 전인 천지창조 때 암석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6세에 광산학교(Freiberg School of Mines) 교수가 되었고 광물학 책을 출간하여 유명해진 독일의 베르너(Abraham Gottlob Werner, 1749~1817)는 ‘지구 전체가 완전히 보편 대양(Universal ocean)에 잠겼던 때가 있었고, 모든 암석이 물에서 퇴적되어 만들어졌다’라는 수성론(水成論, Neptunism)을 주장했다. 그는 산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1)도 보편 대양에서 침전된 제1기의 암석이라고 잘못 판단하고 있었지만, 많은 제자들을 육성했고 성경 친화적인 이론을 제시했으므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 화강암(花崗巖, granite): 화성암(火成巖)의 대표적인 암석으로 뜨거운 마그마가 지하에서 천천히 식어 형성된다.

 허턴은 베르너와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천지창조나 대홍수와 같은 격변에 의해 암석이나 지형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마그마가 지층을 뚫고 관입한 모습을 여러 곳에서 관찰하고 지하의 열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열에 의해 상승한 지층이 비바람에 침식되고, 침식· 퇴적된 물질이 다시 열에 의해 굳어지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여러 층의 암석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그 변화 과정의 속도와 양상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현재 지표의 변화 속도를 토대로 추정하면 지구의 나이가 까마득한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당시 성경을 토대로 지구 연대기를 쓴 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6천 년으로 계산했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었으므로 허턴의 생각은 권위와 통념에 대한 도발이었다.

 제임스 허턴은 1726년 영국 에든버러(Edinburgh)에서 윌리엄 허턴과 사라 허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 서열은 명백하지 않으나 전기작가들은 제임스가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버지 윌리엄은 상인으로 시의 회계 업무를 맡을 정도로 성실하고 수완이 있었지만 제임스가 두 살이 되었을 때 사망하였다. 또한 그의 형도 어릴 적에 죽었기 때문에 제임스 허턴은 집안의 유일한 아들로 키워졌다.

 허턴이 학교 교육을 받는 데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그는 10세에 에든버러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라틴어, 그리스어, 수학 등을 배웠고 14세에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했다.(당시의 대학 입학생으로는 평범한 나이였다.) 대학에서 허턴은 콜린 매클로린2)(Colin Maclaurin,1698~1746) 교수의 자연철학 강좌에서 뉴턴의 이론을 배웠다.

2) 콜린 매클로린은 뉴턴의 전도사라고 자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보충 설명하는 책 ≪유율(미적분)에 대한 논문≫을 집필했다.

 1743년 에든버러 대학을 졸업한 허턴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잠시 도제 수업을 받았지만 포기하고 1744년 가을 에든버러 의과대학에 등록했다. 그러나 이듬해 8월 스튜어트 왕조(House of Stuart)의 왕세자 찰스(Charles Edward Stuart, 1720~1788)가 하일랜드(Highland, 스코틀랜드 북부 지역)의 족벌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면서 길목에 있던 에든버러는 혼란에 휩싸였고 대학은 휴교에 들어갔다. 왕세자 찰스는 명예혁명3)으로 축출된 제임스 2세의 손자였다. 

3) 명예혁명(名譽革命, Glorious Revolution): 1688년 네덜란드의 오렌지(William of Orange) 공이 잉글랜드 의회와 연합하여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킨 혁명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예롭게 이루어졌다고 해서 명예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렌지 공은 제임스 2세의 딸인 메리 2세와 결혼하여 영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고 스코틀랜드를 합병했다. 명예혁명으로 1689년 작성된 권리장전(權利章典. Bill of Rights)은 절대왕정을 퇴진시키고 의회정치의 기틀을 세운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자코바이트(Jacobite)’라고 불리는 제임스 2세의 지지 세력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정통 왕가를 복원하려 여러 차례 봉기(1차 1689년, 2차 1715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1745년 왕세자 찰스가 주도한 봉기는 3차 자코바이트 난에 해당한다. 그는 에든버러를 장악하고 런던 근처까지 진격했지만 1746년 4월초 컬로든 전투(Battle of Culloden)에서 대패한 후 도피했다. 이후 잉글랜드 군대는 자코바이트 반란의 씨를 없애고자 하일랜드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이때부터 스코틀랜드의 북부 전통 문화는 복구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훼손을 입은 것으로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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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코바이트의 난이 평정되자 에든버러는 정상을 회복했고 대학도 문을 열었지만, 허턴은 1747년 고향을 떠나 프랑스로 건너갔다. 한 해 동안 파리 대학에 머물면서 화학과 해부학을 공부한 뒤에 또다시 네덜란드 레이든 대학(Universiteit Leiden, 네덜란드어) 의학부로 학적을 옮겼다.

 1749년에 레이든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귀국한 허턴은 런던에 거처를 잡았다. 그리고 에든버러 대학동창인 제임스 데이비와 함께 석탄 검댕을 이용하여 염화암모늄(NH₄Cl)을 값싸게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 당시 염화암모늄은 금속과 가죽 세공에 쓰이는 재료로 낙타오줌을 원료로 만든 이집트산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허턴은 1750년 에든버러로 돌아와 염화암모늄 제조업을 일으키는 데 주력했고 재정적인 안정도 얻기 시작했다. 

 에든버러에서 남동쪽으로 6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허턴의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농장이 있었다. 그는 에든버러를 떠나 노퍽(Norfolk)에서 2년 동안 존 디볼드(John Dybold)라는 농부에게 농사일을 배운 후 1754년부터 자신의 농장에서 13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농장에 머무는 동안 허턴은 광물과 암석, 토양과 지층을 관찰하며 연구했고 지역 농업의 근대화에도 기여했다. 목재 쟁기를 금속 쟁기로 교체하여 밭갈이의 효율성을 높이고 윤작법으로 수확량을 늘렸으며, 석회를 섞어 산성 토양을 중화시키는 방법과 깜부기병의 원인균을 제거하는 방법도 알아냈다. 

 1764년 허턴은 친구인 조지 맥스웰4)과 하일랜드로 답사를 떠났다. 맥스웰은 ‘몰수합병 재산관리위원회’의 일원으로 정부의 일을 맡아 토지감정평가를 해야 했으므로 지질학에 조예가 깊은 허턴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토지의 가격은 농사짓기에 적합한지의 여부와 경제가치가 있는 광석 함량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었다. 

4) 조지 맥스웰(George Clerk Maxwell)은 제임스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의 증조부이다. 제임스 맥스웰은 전자기 방정식을 세운 과학자로 21세기 물리학자들의 투표로 뽑힌 위대한 과학자 3인에 속한다. 

 허턴은 1767년부터 7년 동안 에든버러와 글래스고를 잇는 포스-클라이드 운하 공사를 감독하는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허턴은 운하 굴착 과정을 관찰하며 지질학적 자료를 수집하였고 운하 건설에 투자하기도 했다. 1770년부터는 솔즈베리 크랙(Salisbury Crags) 암벽이 잘 보이는 전망 좋은 저택으로 이사하여 미혼인 누이 3명과 함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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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즈베리 크랙(Salisbury Crags): 40미터 높이의 석벽으로 에든버러 동쪽에 있다.
백운암과 현무암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되며, 육각기둥 형태의 주상절리가 발달해 있다. ⓒwikipedia

 

 당시 에든버러는 북부의 아테네라고 불릴 만큼 지성인들이 많았고 근대 문명으로의 발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인성론≫과 ≪영국사≫로 유명한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이 명성을 날리고 있었고, 흄의 친구이자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가 정치경제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었으며, 공기에서 이산화 탄소를 발견하고 잠열과 비열의 기초를 세운 조지프 블랙(Joseph Black, 1728~1799)이 과학계를 이끌고 있었다.

 블랙의 조수였던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는 증기기관을 개량하여 산업발전에 추진력을 제공했다. 조지프 블랙은 흄의 주치의이기도 했는데 제임스 허턴과는 친한 친구 관계였다. 허턴은 잉글랜드 남서부와 웨일스의 지질을 탐사하러 가는 길에 제임스 와트와 길동무가 되기도 했다. 당시 에든버러를 중심으로 활동한 학자들을 일컬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상가라고 한다. 

 에든버러 수학교수로 허턴의 전기를 쓴 존 플레이페어(John Playfair, FRS, FRSE 1748~1819)는 허턴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넘치는 쾌활함과 솔직함과 소박함으로 존경을 받았다고 전한다.

 1783년에는 조지프 블랙을 비롯한 여러 명의 학자들이 에든버러 왕립학회(Royal Society of Edinburgh)를 출범시켰다. 당시 전체 회원(FRSE)은 허턴을 포함하여 60명 정도였다.

 허턴은 지층이 끊어져서 생긴 단층이나 힘을 받아 뒤틀린 습곡 구조, 암맥이 지층을 관통한 모습을 관찰하고 열에 의한 어떤 힘이 지층을 밀어올린다고 생각했다. 60세 무렵 허턴은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탐사를 통해 스코틀랜드 중북부 글렌틸트(Glen Tilt)에서 화강암이 관입하며 암석을 녹이고 편암이 만들어진 증거를 찾았고, 스코틀랜드 남서쪽 갤러웨이(Galloway)과 애런 섬(Isle of Arran)에서도 화강암이 관입한 증거를 찾아냈다. 허턴은 결과를 종합하여 에든버러 왕립학회에서 발표할 논문을 썼다. 

 1785년 3월 7일 에든버러 왕립학회에서 처음 열린 허턴의 강연은 본인이 참석하지 못했다. 병이 났기 때문이었다. 대신 조지프 블랙이 논문 요약본5)을 낭독했다. 

5) ≪지구의 존속과 안정성에 관한 지구의 시스템에 관한 논문 요약, Abstract of a Dissertation, Concerning the system of the Earth, its Duration and Stability≫

 약 한 달 후 4월 4일에 열린 두 번째 강연은 허턴이 직접 발표했다. 그는 화강암이 퇴적암층을 뚫고 나온 관입암이라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이는 수성론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수성론 학자들은 화강암도 퇴적 작용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턴은 지표가 침식· 퇴적· 융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인간의 관찰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지구가 오래되었다는 견해도 밝혔다.  

 지표의 침식· 퇴적· 융기의 결정적인 증거 수집은 1788년 시카포인트(Siccar Point)를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시카포인트 탐사에는 수학교수 존 플레이페어 교수와 지질학자 제임스 홀(Sir James Hall of Dunglass, 4th Baronet FRS, FRSE 1761~1832)이 함께했다.

 시카포인트에는 시간의 단절을 보여주는 부정합(不整合, unconformity) 구조가 잘 발달해 있다. 부정합은 지층의 시간적 불연속 관계를 의미한다. 어떤 지역에서 퇴적1-융기-침식-침강-퇴적2-융기의 과정이 진행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퇴적1과 퇴적2의 지층은 오랜 시간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 바다였던 지역이 육지가 되었다가 다시 가라앉아 바다로 변했다가 다시 융기하여 육지로 변해야 하니 장구한 세월이 필요한 것이다.

 시카포인트 부정합은 퇴적층이 거의 수직으로 융기했다가 다시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융기함으로써 형성된 대표적인 부정합 구조이다. 제임스 허턴의 시대에는 암석층의 연대를 정확하게 측정할 방법이 없었지만 20세기에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법이 개발되면서 암석층의 연대와 형성 과정이 보다 자세하게 밝혀졌다. 시카포인트 부정합 형성 과정의 개요는 아래 그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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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5년의 강연 내용을 보완하여 새로 작성한 허턴의 논문6)은 1788년 에든버러 왕립학회지에 실렸다. 

6) ≪지구의 이론; 또는 지구 상의 대지의 조성, 분해, 회복에서 관찰할 수 있는 법칙의 탐구, Theory df the Earth; or an Investigation of the Laws Observable in Composition, Dissolution, and Restoration of Land upon the Grobe≫

 허턴은 논문 발표 이후 ‘말도 안 되는 이론’, ‘거칠고 자연스럽지 못하며 불신앙과 무신론으로 마감되는 이론’, ‘모세 5경의 역사와 이성과 방침에 반하는 이론’ 등의 쏟아지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60대 중반에 그는 요폐증으로 고생하다가 1793년 수술을 받은 후 점점 더 쇠약해졌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론을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1795년 ≪지구 이론, The Theory of Earth≫을 출간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서였는지 책의 문장은 어수선하고 내용은 난해하여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다. 이후 광물학 명명법을 만들려고 시도하던 제임스 허턴은 지병이 도져 1797년 3월 26일 71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공동묘지에 묻혔다.

 허턴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고 친구들도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3주일 후 50세가 된 숨겨졌던 아들(이름도 제임스 허턴)이 찾아옴으로써 과거가 드러났다. 1747년 에든버러 의대생이었던 허턴은 젊은 여인을 임신시켰고, 당시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향을 떠났던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모자를 런던 어디에 정착시켰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자세한 사연은 땅속에 묻혀 알 길이 없다.

 1802년 플레이페어는 ≪허턴의 지구 이론 실례들, Illustrations of the Huttonian theory of the earth≫을 펴내어 허턴의 이론을 널리 알렸고, 개정판을 쓰기 위해 17개월 동안 유럽 전역을 조사하며 6,400 킬로미터가 넘는 탐사여행을 했다. 그렇지만 브리태니커 사전 집필 때문에 미루다가 개정판을 쓰지 못하고 1819년에 사망했다.
 제임스 홀은 현무암을 녹인 후 천천히 냉각시켜 결정체를 만드는 실험7)에 성공함으로써 베르너의 수성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오류를 밝혔다.  

7) 아이스크림을 녹였다가 다시 냉동실에 넣어 빠르게 얼리면 원래의 아이스크림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얼음처럼 굳는다. 이와 마찬가지 원리로 현무암을 녹인 후 빠르게 냉각시키면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고 유리질 형태의 덩어리로 변한다. 수성론 학자들은 빠르게 냉각시킨 실험을 근거로 현무암은 용암이 굳어서 된 암석일 수 없고 바다에서 퇴적된 암석이라고 주장했다. 제임스 홀은 현무암을 천천히 냉각시켜서 작은 알갱이 조직을 재현하는 실험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임스 허턴의 사상은 그가 사망한 해에 스코틀랜드 앵거스(Angus)에서 태어난 찰스 라이엘(Sir Charles Lyell, 1st Baronet, FRS, 1797~1875)에 의해 계승되었다. 라이엘은 옥스포드 대학에서 베르너를 신봉하는 교수들에게 지질학을 배웠으나 그들의 허술함에 실망했고 허턴의 이론이 적합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는 탐사여행 중에 원로학자가 된 제임스 홀(63세)을 방문했고, 홀은 라이엘을 시카포인트로 안내하여 현장을 견학하게 했다. 

 라이엘이 1830~33년에 세 권의 책으로 출간한 ≪지질학의 원리, Principles of Geology≫는 지질학의 교본이 되었다. 그는 ‘현재는 과거를 푸는 열쇠(The present is the key to the past)’라는 함축적인 표현으로 허턴의 사상을 널리 알렸다.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 1794~1866)은 허턴의 원리에 ‘동일과정설(同一過程說, Uniformitarianis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동일과정설은 지구의 역사를 연구하는 지사학(地史學)의 제1원칙이 되었고 ‘동일 과정의 원리(Doctrine of Uniformity)’라고도 불린다.

 1756년 제1기, 제2기, 제3기로 처음 분류되었던 지질시대 체계는 고생물(화석)의 번성과 멸종, 암석층의 변화, 기후의 변동, 대규모 부정합(지층의 시간적 단절) 등을 고려하려 정하는 층서학 분류 기준에 따라서 그 연대와 명칭이 조금씩 달라져 왔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작업들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며 국제층서위원회(ICS; 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의 주도로 매년 수정되고 있다. 2019년 5월 기준 지질시대 연대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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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편집 원본: INTERNATIONAL CHRONOSTRATIGRAPHIC CHART v2019/05
ICS: 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
각 시대를 표시하는 색깔은 원본과 동일함

 

 

신규진 경성고 과학교사 《너무 재밌어서 잠못드는 지구의 과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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