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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역학의 설계자下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년 1월 4일 ~ 1727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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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8.06
그림 신로아

 1684년 1월 런던 왕립학회 3대 의장인 렌(Sir Cristopher Wren, PRS, 1632~1723), 올덴부르크가 죽은 후 간사가 된 훅(Hooke), 회원인 핼리9)(Edmond Halley, 1656~1742)가 중력 역제곱 법칙에 관해 논의했지만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다. 답답했던 핼리는 8월에 케임브리지를 방문하여 뉴턴에게 중력 법칙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뉴턴은 그 문제에 대해서 이미 오래 전에 계산한 바 있다면서 “중력 역제곱에 따르는 태양계 천체들의 궤도는 타원을 그리게 된다.”라고 즉답하여 핼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뉴턴은 옛날 원고를 뒤적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다시 계산해서 보내주겠다고 핼리에게 약속했다. 그해 11월 뉴턴은 약조한 대로 ≪물체의 궤도 운동에 관하여, De motu corporum in gyrum(1684)≫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핼리에게 보내 행성들이 타원 궤도를 그리게 되는 원리와 케플러 법칙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9) 핼리는 뉴턴의 후원자가 되어 훗날 ≪프린키피아≫ 출판 비용을 부담했고, 뉴턴의 법칙을 이용하여 핼리 혜성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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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체의 궤도 운동에 관하여, De motu corporum in gyrum≫ ⓒCambridge University Library

 

 아이작 뉴턴은 핼리가 다녀간 이듬해 여름부터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줄임말로 ≪프린키피아, Principia≫를 쓰기 시작했다. 

 소제목의 개수만 809개로 집계되는 프린키피아는 고전 역학의 거룩한 경전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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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키피아의 내용 구성 집계표

 

 프린키피아에서, 뉴턴은 관성력(intertiae), 구심력(centripetal), 중력(gravitas) 등 여러 가지 힘들을 정의하고, 법칙, 규칙, 문제, 보조 정리, 사례, 현상, 실험, 예제, 연산, 주석 등으로 내용을 세분화하여 운동 역학 이론을 전개했다. 그 방대한 내용은 총 3권으로 나뉘어 편집되었다. 제1권은 ‘물체의 운동’, 제2권은 ‘저항이 있는 공간에서의 물체의 운동’, 제3권은 ‘수학적으로 본 세계의 체계’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관성의 법칙, 힘과 가속도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 만유인력(중력)의 법칙, 유체의 운동 역학, 천체의 운동 법칙, 조석 현상…, 뉴턴이 기술한 내용과 증명들은 너무나 세세하고 치밀했다.(단, 제3권의 후반부에 담긴 조석 현상에 대한 내용은 조석력에 작용하는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잘못된 해석과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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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턴은 미적분법(유율법)을 개발했지만, 프린키피아에서는 주로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수학적인 증명을 했다. 그에게는 미적분이 더 쉬웠을 테지만, 당시에 미적분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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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키피아≫ 제1권 2장 명제1-정리1 (행성의 타원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구심력 증명 그림(좌), ≪프린키피아≫ 제3권 명제34-문제15 황도면에 대한 달 궤도 기울기의 시간당 변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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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키피아≫ 제3권 보조정리8 혜성의 궤도와 시간 비례 증명

 1687년 ≪프린키피아≫ 초판이 출판되자 영국을 중심으로 큰 파장이 일면서 차차 유럽 대륙으로 그 내용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한 학생이 뉴턴을 보고 “저기 가는 저 사람이 남들은 물론이고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쓴 사람이래.”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프린키피아 내용은 난해했지만, 그가 어려운 증명을 통해 이끌어낸 법칙과 원리들은 단순했기 때문에 더욱 놀라움을 주었다.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인간 지성론(1690)≫의 서문에서 ‘비교할 수 없는 뉴턴(the incomparable Mr. Newton)’이라는 문구를 넣어 존경심을 표했다. 프린키피아 내용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독일의 라이프니츠가 제기했다. 중력 법칙의 원인을 밝혀내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었다.(현대의 과학도 이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1688년에는 명예혁명이 일어나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영국 국왕으로 공동 즉위했고, 이듬해인 1689년에는 의회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권리장전이 선포되었다.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이작 뉴턴은 임시의회 케임브리지 대표 2인에 선출되었고, 세금징수위원회의 일을 맡았다. 1695년에 영국 주화의 개정에 관한 소논문을 쓴 뉴턴은 이듬해 조폐국 감독관에 임명되었다.

 1697년 1월 29일 프랑스에서 보낸 편지가 뉴턴에게 도착했다. 스위스 태생의 수학자 베르누이(Johann Bernoulli, 1667~1748)가 보낸 것이었다. 〈학술기요〉에 6개월 시한으로 게재된 미적분 문제와 추가 문제까지 합하여 두 문항10)에 대한 풀이를 부활절까지 제출할 수 있겠냐는 일종의 시합 제안이었다. 베르누이는 독일의 라이프니츠11)가 먼저 발명한 미적분법을 뉴턴이 훔쳐갔다고 의심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10) [문제1] 무거운 물체가 한 점에서 수직선상에 있지 않은 다른 한 점으로 갈 때 가장 빠르게 하강하는 경로를 구하라. [문제2] 점 P에서 임의의 직선을 긋고, 그 선을 자르는 점을 K, L이라 하고, 두 개의 선분 PK와 PL에 대해 어떠한 거듭제곱을 취하더라도, 그 합이 상수가 되는 곡선을 발견하라.(김한영, 김희봉 역)
11)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 라이프치히(Leipzig) 출생. 철학(형이상학 서설, 인간오성신론, 단자론, 합리주의), 수학(무한소 미적분 발명, 이진법 발명, 위상수학), 물리학(뉴턴의 절대공간 이론 반대, 시간과 운동 상대론 주장), 공학(기계식 계산기 발명, 프로펠러, 물 펌프, 잠수함, 시계 설계 등). 사회과학(공중위생학, 도서관학, 심리학, 경제학, 법률) 등의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뉴턴은 편지를 받은 그날 밤 곧바로 문제를 풀었고 바로 다음날인 1월 30일 왕립학회 의장에게 해답을 보냈다. 그런데 미적분 시험 문제는 누가 출제한 것일까? 베르누이가 시합을 제안하기까지의 과정에는 라이프니츠가 관여되어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이 불공평한 시합을 기획한 것으로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라이프니츠는 그 문제를 자신이 출제한 것이 아니라고 왕립학회에 해명의 편지를 보냈지만, 의구심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정작 뉴턴의 해답을 보게 된 베르누이는 “사자의 발자국과 같구나!(tanquam ex ungue leonem)”라고 감탄했다.

 1699년 왕립학회 평의원 38인에 포함된 뉴턴은 학회에 참석하여 항해 관측기구인 육분의를 회원들에게 소개했지만 로버트 훅 때문에 기분이 잡쳐서 돌아왔다. 훅이 30년 전에 자신이 발명했던 것이라고 김새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해 크리스마스 다음날 뉴턴은 큰 선물을 받았다. 조폐국 감독관의 신분에서 조폐국장(종신직)으로 발탁되는 파격적인 인사의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뉴턴은 케임브리지 평의원과 석좌교수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701년에 두 직위를 사퇴했다.

 1703년 왕립학회 간사였던 로버트 훅이 사망했고, 뉴턴은 왕립학회의 투표를 거쳐 12대 의장12)으로 당선되었다. 이전까지 참석률이 저조했던 뉴턴이었으므로 찬성표는 적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장으로 당선된 이후 그는 평의원회의에 20년 동안 거의 빼놓지 않고 참석했다.

 12) 11대 의장은 소머스 남작(John Somers, 1st Baron Somers, 1651~1716)이다.

 

 1704년 뉴턴은 ≪광학, Opticks: Or, A treatise of the Reflections, Refractions, Inflexions and Colours of Light≫을 출간했다. 책의 서문에서 그는 ‘이 책에서 다룬 내용이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려고 지금까지 인쇄를 미루고 있었다.’라고 밝혔다.(로버트 훅을 의식해서 출판을 미룬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광학≫은 수학식이 없이 프리즘과 같은 광학 도구를 이용한 실험과 관찰 내용을 산문체로 적은 것이어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1판에서는 광학과 관련이 없는 수학 논문 ‘곡선의 구적법’과 ‘3차 곡선의 요약’을 부록으로 집어넣었는데, 2판에서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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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학, Opticks≫ 1권 2부 명제11-문제6 색깔이 있는 여러 가지 빛의 혼합 그림
 

 1705년 아이작 뉴턴은 케임브리지에서 여왕 앤(Anne)으로부터 훈작사 작위를 받았다. 1707년 스코틀랜드가 완전히 영국에 병합되자 조폐국장으로서 뉴턴은 일이 많아졌지만 재산도 많아져서 1710년 첼시의 고급 주택으로 이사했다. 1711년부터 몇 년 동안은 라이프니츠가 왕립학회에 편지를 보내 미적분 우선권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이에 뉴턴은 우선권 논쟁에 관한 보고를 〈철학회보〉에 익명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1716년 라이프니츠가 죽은 후에는 베르누이가 라이프니츠를 옹호하며 논쟁에 합세했다. 그들 모두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발명보다는 옛 것에 집착하며 명예를 다투고 싶었던 모양이다. 뉴턴 역시 세월을 비켜갈 수 없었다. 요실금과 기억감퇴, 기침, 폐렴 등의 증상으로 고생하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하자 재산을 처분하여 친척들에게 기부했다. 

 1727년 3월 2일 마지막으로 왕립학회 의장석에 앉았던 아이작 뉴턴 경은 방광담석으로 고생하다가 3월 19일 의식을 잃고 이튿날 새벽 한 시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다.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는 뉴턴의 업적을 기리며 묘비명을 썼다. 종교계의 반대로 묘비에 새겨지지는 못했지만, 포프가 쓴 명문은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자연과 자연 법칙은 밤의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다. “뉴턴이 있으라!” 신이 말하자 모든 것이 밝아졌다.)」

 아이작 뉴턴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뉴턴은 이복동생들과 친밀하게 지냈는데, 특히 조카(여동생 해나 스미스의 딸)인 캐서린 바턴(Catherine Barton, 1679–1739)을 친자식처럼 아껴서 오랜 기간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캐서린은 ≪걸리버 여행기≫를 쓴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와 친구였으며, 작가 볼테르(Voltaire, 1694~1778)도 인정한 재치 있고 매력적인 미녀였다. 그녀는 화폐 개혁을 주도한 몬태규 백작(Charles Montagu, 1st Earl of Halifax)의 부인이 죽은 후에 안주인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아이작 뉴턴이 조폐국장이 되고, 여왕으로부터 훈작사 작위를 받는 과정에는 몬태규 백작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과학사는 전하고 있다. 조카 캐서린이 뉴턴의 실질적인 후원자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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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경의 묘지, 웨스트민스터 사원
그림 출처: daff.net.au/euro

  

신규진 경성고 과학교사 《너무 재밌어서 잠못드는 지구의 과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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