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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역학의 설계자上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년 1월 4일 ~ 1727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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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8.06
그림 신로아

 아이작 뉴턴을 검색하면 'Sir Isaac Newton, PRS'라고 소개되어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Sir(경)는 1705년 영국 여왕 앤(Anne)이 뉴턴의 공로를 치하하여 훈작사1)를 수여함으로써 붙게 된 경칭이고, 이름 뒤의 PRS는 1703년 영국 왕립학회 의장(President of Royal Society)에 선출되면서 붙게 된 직함이다. 뉴턴은 죽을 때까지 24년 동안 왕립학회 의장2)을 맡았다. 

1) 훈작사(Knight Bachelor)는 영국의 2등급 훈장에 준하는 서훈. 훈작사를 받은 경우에 남자는 Sir(경), 여자는 Dame(여사, 귀부인)라는 칭호가 붙으며, 준남작(Baronet) 지위가 인정된다. 
2) 영국 왕립학회 의장의 임기는 19세기 후반부터 5년으로 정착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임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의장을 가장 오래 역임한 사람은 식물학자 조지프 뱅크스 준남작(Sir Joseph Banks, 1st Baronet Banks, 1743~1820)으로 41년(1778~1820) 동안 그 지위를 유지했다.

 

 뉴턴은 질량, 속도, 힘, 운동, 중력 등 물리학 전체의 기틀이 되는 개념을 정의하고 수학적인 증명을 통해 법칙을 세웠다. 물리학 교과서에서 그의 이름을 빼버리면 책 껍데기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Physicist)로 불리지만, 동시에 미적분학3)을 발명하고 많은 수학 법칙을 증명한 천재 수학자(Mathematician)였다. 또한 그는 거울을 이용한 최초의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고, 케플러의 법칙과 천체들의 운동 궤도를 수학적으로 증명하고 예측한 위대한 천문학자(Astronomer)이기도 했다.

3) 미적분학의 발명에 관해서 영국의 뉴턴과 독일의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의 우선권 논쟁이 있었지만, 후대의 학자들은 그들이 비슷한 시기에 각각 독자적으로 발명한 것으로 인정하는 편이다. 라이프니츠는 20190805_141923.jpg의 형식으로 미분 기호를 썼고, 뉴턴은 방점을 사용하여 ÿ과 같은 형태로 표현했다.  

 

 그렇지만 뉴턴을 전형적인 과학자(Scientist; 19세기에 만들어져 쓰이기 시작한 용어)로 한정할 수는 없다. 그는 신학자(Theologian)요, 연금술사(Alchemist)이기도 했다.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그가 남긴 기록은 100만 단어로 추정되지만, 신학과 종교 분야에서는 140만 단어, 연금술 관련해서는 55만 단어의 글을 남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신재식, 2004 ≪아이작 뉴턴의 종교와 과학의 상호관련성 연구≫ 종교연구, 34, 99-140).

 아이작 뉴턴에게 가장 어울리는 포괄적인 직함은 자연철학자(Natural Philosopher)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국회의원으로 세금징수위원회 일을 했고, 화폐 개혁에 기여하고 조폐국장을 역임한 정부의 관료이기도 했으니 그의 인생 경력에 정치인(Politician)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아이작 뉴턴의 출생지는 영국 콜스터워스(Colsterworth)에 위치한 울즈소프 장원(Woolsthorpe manor)이다. 그는 생부가 죽고 3개월 뒤에 미숙아로 태어났다. 3년 후에는 어머니 해나(Hannah Ayscough)가 나이 많은 목사와 재혼하여 집을 떠나 버렸다. 뉴턴은 외가에 맡겨졌다. 뉴턴이 열 살이 되었을 때, 계부가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해나는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 명의 자식(아들1, 딸2)을 거느리고 울즈소프 장원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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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출생지 울즈소프 장원(Wolsthope manor). 1810년 판화. 작자 미상. ⓒWellcome Collection

 

 2년 후, 뉴턴은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북쪽의 도시 그랜섬(Grantham)의 무료 문법학교에 보내졌다. 뉴턴에게 학교생활은 즐거운 편이었다. 라틴어로 교육을 받았으며, 풍차, 호롱등, 해시계를 제작하여 소년 발명가로 불렸다. 그런데 17세가 되기 전에 어머니가 그의 학업을 중단시키고 집으로 불러들였다. 공부는 그만 두고 농장 일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뉴턴은 반항심에 시키는 일은 하지 않고 9개월 동안 농땡이를 피웠다. 다행이 그의 비범함을 알아본 외삼촌 윌리엄 목사가 어머니를 계속 설득하였고 학교장인 스톡스 교장도 복학을 적극 권유하여 1660년 가을 학기에 뉴턴은 문법학교로 복학했다.

 1661년,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University of Cambridge)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4)에 준급비생5) 자격으로 입학했다.

4) 1209년 설립된 케임브리지 대학은 수십 개의 칼리지로 구성되어 있다. 트리니티 칼리지는 1546년 헨리 8세에 의해 설립되어 현재까지 3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급비생(Sizar): 급비생은 학장이나 평의원의 시중을 들고, 특별자비생(기부금을 많이 낸 학생)이나 자비생(학비를 전액 내는 학생)들이 하지 않는 청소와 허드렛일을 하며 남은 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준급비생(Subsizar)은 급비생과 같은 처지이지만 자신의 식대를 납부한다는 점에서만 다르다.(Richard S. Westfall. 2016. ≪Never at Rest A Biography of Isaac Newton≫ 알마출판사)

 
 뉴턴의 집이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친부가 남긴 장원과 토지, 가축의 재산 규모는 보통 농민들보다 열 배나 많은 것이었고, 계부가 남긴 재산도 있었다. 그런데도 다른 학생들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준급비생으로 입학한 것은 뉴턴의 어머니가 학비를 아까워했기 때문이었다. 뉴턴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어머니의 수입은 연간 700파운드 정도였는데, 맏아들인 그에게 1년에 10파운드 이하의 용돈만 주었다고 한다. 

 뉴턴이 19세에 작성한 ‘내가 지은 죄 고백록’ 중에는 ‘설교를 잘 안 듣고 저질렀다, 어머니 지시를 차단하고 거부했다, 어머니와 계부 스미스와 그들의 집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했다, 죽음을 희망하고 원했다’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당시의 그는 나이 많은 급비생의 처지에 친구도 거의 없는 외톨이로 고독감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뉴턴은 독학으로 수학식 (a+b)ⁿ의 답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이항정리를 알아내어 교수들의 주목을 받았고, 특별장학생에 선발(1664)되어 식비와 의복비를 포함한 약간의 급료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 유율법(流率法, Method of Fluxions; 흐름에 대한 방법, 미적분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1665년 여름부터 1666년 말엽까지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 페스트)이 창궐하여 런던 시민 10만 명(당시 런던 인구의 25%) 정도가 목숨을 잃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대학은 문을 닫았고, 뉴턴은 고향인 울즈소프로 몸을 피했다. 18개월 동안 시골에 머무르며 사색과 탐구의 시간을 가진 뉴턴은 장차 과학 업적의 토대가 되는 많은 생각들을 이 시기에 정리했다. 급수, 이항식, 유율법(미분법), 유율의 역관계(적분법), 색채론, 중력….(어린이 책에 곧잘 소개되는 뉴턴의 사과나무는 이 시절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흑사병이 진정되자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온 뉴턴은 석사 학위(1668)를 받은 후 케임브리지대학 평의원이 되었다.

 뉴턴은 세상이 빨갛거나 파랗게 보일 때까지 뚫어지게 태양을 쳐다보거나, 뜨개바늘을 자신의 눈 밑으로 찔러 넣어 안구를 찌그러뜨리는 위험한 실험도 하면서 광학 연구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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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바늘로 안구를 찌그러뜨려서 눈에 나타나는 밝고 어두운 서클 무늬를 관찰함.
그림 출처 : Cambridge University Library, MS Add.3975, p15

 그의 집요한 탐구정신은 놀라운 발명품을 개발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1668년 뉴턴은 오목 거울로 빛을 집광시켜서 볼 수 있는 최초의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다.

 1669년에는 케임브리지 루카스좌 수학 교수(Lucasian Chair of Lucy)로 발탁되었다. 루카스 강좌는 아이작 배로(Isaac Barrow, 1630~1677) 교수가 맡고 있었으나 뉴턴의 뛰어난 재능을 보고 자리를 물려준 것이었다.

 1671년 런던 왕립학회가 뉴턴에게 망원경 실물 전시를 요청했다. 그는 두 번째 망원경을 새로 제작하여 왕립학회에 보냈다. 그의 반사 망원경은 왕립학회를 흥분시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이듬해 1월 11일 뉴턴은 만장일치로 회원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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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년 뉴턴이 왕립학회에 보낸 반사 망원경. ©The Royal Society, RS.8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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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광학: Opticks, 1704≫에 실린 반사 망원경 원리도.

 

 입사한 빛이 큰 오목거울(주경)에 반사된 후 작은 평면거울(부경)에서 90도 방향으로 꺾여 관측자의 눈에 들어오므로 관찰이 편리하다. 볼록렌즈로 빛을 모으는 굴절 망원경에 비해 가볍고, 경통의 길이를 짧게 만들 수 있으며, 광선의 색깔마다 굴절률이 달라 생기는 색수차가 없는 장점이 있다.

 뉴턴은 왕립학회에 색채론(Of Colors) 논문과 반사 망원경에 대한 설명서도 보냈다. 그의 논문이 왕립학회 회보에 게재되자 뉴턴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색채론은 프리즘에 빛을 쏘아 무지개 색으로 분리시켰다가 볼록렌즈로 다시 빛을 모아 흰색의 빛을 합성하거나, 여러 개의 프리즘으로 분산된 빛을 겹쳐서 흰색의 빛을 만드는 관찰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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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왕립학회 회보(1672.2.19)에 실린 뉴턴의 색채론 p12/13 ⓒTHE ROYAL SOCIETY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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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4년~1696년 기간에 작성한 뉴턴의 노트 Of Colors의 p12 이미지 ⓒCambridge University Library

 다수의 학자들은 뉴턴의 색채론을 호평했지만,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은 예외였다. 그는 뉴턴의 빛 입자설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색채론 실험에 문제가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거부감을 느낀 뉴턴은 훅의 공6)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모욕감을 느낄 만한 답신7)을 보냈다.

6) 훅은 그의 책 ≪마이크로피아, Micrographia(1665)≫에서 빛은 몸체가 없고(no luminous body)  움직임만 있는 파동(pulse)이라는 의견을 명백히 밝혔으며, 운모 유리를 비롯한 박막에서 일어나는 광선의 굴절과 반사를 비롯한 다양한 광학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실은 바 있다.
7) 회보에 게재될 글을 쓸 때에는 특정인의 이름을 거명하지 말아달라는 간사 올덴부르크의 부탁을 거부하고, 오히려 훅이라는 이름을 25회 이상 반복적인 후렴구처럼 넣어 답변서를 보냈다.(Westfall, "Reply Hooke")

 뉴턴은 유명세를 타면서 생기는 피곤한 일들을 참다못해 「나는 회원임을 명예롭게 생각하지만, 아직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별 도움이 못 되는 것 같고, 학회까지 거리8) 멀어서 별 이점도 없으니 탈퇴하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1673.3.8)를 왕립학회로 보냈다. 이에 간사였던 올덴부르크(Henry Oldenburg, 1619~1677)는 4개월분 회비를 면제시켜 주면서 그를 달랬다고 전해진다.

8) 뉴턴이 있는 케임브리지와 왕립학회가 있는 런던의 직선거리는 약 80km 정도이다.

 결국 왕립학회를 탈퇴하지는 않았지만, 뉴턴은 삼십 세 이후 십여 년이 넘도록 학회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연금술(鍊金術)과 신학(神學)에 심취했다.

 마법과 주술, 신비주의로 상징되는 연금술(alchemy)의 뿌리는 고대 이집트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턴은 선대의 연금술 책들을 섭렵하며 요약하고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을 상징하는 도형을 그리기도 했다. 현자의 돌은 값싼 금속을 귀금속으로 바꿀 수 있고, 미지의 힘으로 정신과 육체를 통합하여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설의 물질이었다. 그는 수은, 유황 등을 이용하여 다양한 연금술 실험을 하였고, 보일(Robert Boyle, 1627~1691)과 서신으로 의견을 나누었으며, 상당한 분량의 기록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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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턴의 신학 연구는 1670년 이후 평생에 걸친 작업의 하나였다. 그는 그리스도론을 요약정리하고, 교회사와 성경 계시록을 연구했다. 그가 작성한 신학 관련 기록물의 양은 연금술보다 더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 히브리어로 된 성서를 독해하여 솔로몬 신전의 도면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건축물의 기하학 속에 상징적이고 수학적인 지혜의 코드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신전의 도해는 ≪수정된 고대 왕국 연대기, The Chronology of Ancient Kingdoms Amended≫에 실렸고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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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사원의 묘사도(A Description of the Temple of Solomon)
≪수정된 고대 왕국의 연대기, The Chronology of Ancient Kingdoms Amended≫ 삽입 그림
Isaac Newton, (London: 1728).
출처: newtonproject.ox.ac.uk, Newton Catalogue ID: THEM00183

  

 

 

신규진 경성고 과학교사 《너무 재밌어서 잠못드는 지구의 과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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