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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
정부장의 독서일기
누군가의 인생 책을 알게 되면 조용히 찾아 읽고 상대의 마음을 상상하는 버릇이 있다. 금융 분야에서 일을 시작해 조금은 특이한 이력의 편집자다. 책 읽는 게 일이자 즐거움인데 책 못지않게 사람도 좋아한다. 일하는 사람들이 읽어두면 좋을 책을 소개한다.
미드에는 있고, 영화 <기생충>에는 없는 것 나만 알고 싶은 '인생 책' 두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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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7.11

읽다 보면 뼈에 사무치게 맞는 말이라 저절로 탄식이 나오는 책이 있다. 때로는 진실이라 아프다. 그런 책은 내 소박한 책꽂이의 한 줄을 차지하는 인생 책들 옆으로 보내진다. 절대로 아무한테도 인생 책의 인증샷 따위는 보내지 않는다. 너무 솔직한 정신세계까지 평가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찾았다. 내 인생 책!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밤의 도서관>.

알베르토 망구엘은 언제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한 짝처럼 말해진다. 시력을 잃어가던 보르헤스가 한 서점을 찾았고, 고등학생 망구엘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소설가는 서점 점원에게 따로 시간을 내서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는 이 일화는 유명하다. 그 뒤로 책과 사랑에 빠진 평범한 소년. 아무쪼록 교육적 냄새가 다분히 풍기는 이 에피소드는 나 같은 회의주의자의 호기심을 꺾어놓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이토록 소문이 무성한 책들을 만나는 데 많은 우연과 행운과 시간이 필요했다.

<독서의 역사><밤의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중증과 경증의 책벌레가 분명할 테고, 이 책들의 첫머리에서 약간의 충격을 받았으리라 예상한다. <독서의 역사>는 젊은 날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 현대까지, 책을 읽는 다양한 인종, 직업의 남녀를 사진과 함께 묘사한다. 그러더니 망구엘은 난데없이 그러므로 난 외롭지 않다라고 선언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끝없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자. 왜 읽는지 답하지 못할 것이다. 배고픔을 채우려는 본능처럼 호기심에도 땔감이 필요하다. 책이 거기 있으니 바늘에 실 따라가듯 독서가 있을 뿐, 독서가들은 대부분 별 고민 없이 책을 읽는데 망구엘의 한마디가 세상의 숨어 있는 독서가들을 단번에 연결해 주었다. 혼자 책을 읽던 독서가는 그 말이 반가우면서도, 눈앞의 친구보다 갖가지 책의 저자들에게 더 깊은 친밀감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그래도 외롭지 않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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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너의 모든 것>.

 

미드와 독서가

미국 드라마에는 독서가가 빈번히 등장한다. 미드는 영화나 스포츠처럼 한 사회의 집단 기억을 인용해서 상황을 풍성하게 빚어내길 좋아한다. 영화 <대부>의 대사를 인용하거나, 경이로운 기록을 낸 야구 시합을 복기하는 식이다. 책도 빠질 수 없는 도구여서 백악관과 검찰청 집무실을 꾸미는 최고의 장식품은 고급 양장본 세트가 꽂혀 있는 책꽂이다. 정치 사회 드라마뿐 아니라 스릴러에도 책은 주인공의 지적 수준을 드러내는 요소로 작동한다.

온통 IT기술로 범벅이 된 암울한 미래를 그려낸 드라마 <블랙 미러>. ‘베타테스트편에서는, 처음 만난 여자의 집에 방문한 남자가 칸막이 겸 서재를 둘러보다가 말한다.

싱글이 보는 책인가 봐?”

“<싱귤래리티(Singularity한국판 제목: 특이점이 온다)>IT 전문가(래즈 커즈와일)가 미래에 대해 쓴 거야.”

이 장면에는 숨어 있는 맥락이 여럿 있다. 남자는 미국 배낭여행객이고 여자는 영국의 게임 프로그래머이다. 멍청한 질문을 한 미국인을 놀려대는 것도 같은데, 책 한 권으로 여자의 지적 수준과 함께 이 에피소드의 철학이나 전개 방향까지 암시한다.

이례적으로 서점 직원이 남자 주인공으로 나오는 끔찍한 치정 스릴러에서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특정 작가와 책을 언급하며 사람들의 취향을 가늠한다. 오늘날 부와 권력의 대결을 보여주는 드라마 <빌리언스>에서 헤지펀드 대표는 검찰청장을 열 받게 하려고 그가 중고서점에 임시변통으로 맡긴 처칠이 쓴 세계대전 회고록을 비싼 가격에 냉큼 사들인다. 아니, 도대체 남의 책 한두 권 샀다고 공격에 성공했다며 기뻐하는 기업가나, 거기에 울화통 터지는 검찰청장이나. 독서광 중에서도 상위 레벨이라 할 수밖에.

미드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상당히 수다스럽다. 저렇게 책 얘기를 많이 해도 시청자들이 질려하지 않는다는 건 그걸 즐기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해, 뉴욕의 스트랜드 서점에 방문했을 때,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두 소녀가 볼이 발갛게 상기되도록 어떤 신작 소설을 자기가 왜 좋아하는지 상대에게 쉴 새 없이 떠들어대던 장면이 떠오른다. 이 역시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남아 있다.

이쯤에서 영화 <기생충>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저택에 사는 4인 가구의 가장은 잡지 표지를 장식할 만큼 성공한 사업가다. 고급 소재의 수트를 입고, 고급차의 뒷좌석에 앉았으며, 아마도 손목에는 명품 시계가 둘러졌을 것이다. 친구들을 정원에 모아 놓으면, 각자 클래식 음악을 악기나 목소리로 연주한다거나, 집 자체가 유명 건축가의 작품으로 우아한 그림을 곳곳에 배치하는 등 고급문화를 누리는 하이클래스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영화 어디에서도 그의 서재나 책장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

책을 한 줄 인용했다면 어땠을까? 비현실적이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능력과 운의 절묘한 조화(Fooled by Randomness, 한국에 처음 소개될 때 제목이다)>라도 잠깐 뺐다가 꽂았으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즐겁지만, 실상은 지하에 숨어 사는 인물의 한때 중산층이었음을 나타내는 지표로 책 몇 권이 시커먼 책꽂이에 꽂혀 있을 뿐이었다. 그것마저도 반갑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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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초판(1997).

 

도시 속 밤의 도서관

알베르토 망구엘의 또 한 권의 명작 <밤의 도서관>은 매우 낭만적이다. 자기만의 서재이자 도서관을 갖고 싶었던 저자는 프랑스의 시골에서 무너진 옛 성터를 지나다가 문득 마음이 쏠려서 도서관을 짓기 시작한다. 역시 이 책도 첫머리에서 독자를 아연실색하게 하는데, 도서관은 인간이 벌이는 아주 무모한 시도로서 세상의 지식을 논리적으로 분류하려는 행위이지만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쓰여 있다. 무모한 일인지 알면서도, 그는 지식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무작위의 위로와 공상을 주는 책들에 온전한 자리를 주기 위하여 돌을 쌓아 도서관을 지었다. 현실감 없이 철저히 낭만적이다. 낮의 도서관은 체계적인 분류에 젠 체하고 엄정한 지식을 나눠주는 곳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밤의 도서관은 무작위한 발견의 기쁨과 인생의 낙을 조용히 품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망구엘은 사실 주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멋지게 차려 입고도 책을 평소에 읽지 않는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이 거리와 도시에서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들. 주인의 기호에 따라, 때로는 애정에 이끌려 한 권씩 그러모아 만들어진 도시의 개인 도서관들은 독서광들의 숨구멍이다. 독립서점들은 망구엘의 도서관을 지지하는 낭만적인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독서가에게는 대단히 관대해진다. 무표정하고 사나운 얼굴이라도 그가 책을 들고 있다면, 당장 대화를 시작할 용기가 생긴다. 앞에서 말했던 나심 탈레브의 책을 2002년 아마도 여의도의 한 서점에서 동시에 집으려던 순간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첫 저서였고, 통찰의 왕 탈레브도 아직 무명이었다. 그때 나는 금융계에 막 들어간 신입 여직원이라 불렸을 테고, 상대는 넥타이를 숨 막히게 맨 과장 정도의 남자였다. 나도 그처럼 무표정했지만, 내 속엔 이야기가 있었다.

당신도 이 책을 어제 신문 서평에서 눈여겨봤군.’

세상에 등판하자마자 내가 바로 알아봤다고, 혼자 기분에는 세상에 대고 외치고 싶은 저자가 지식인들의 지식인으로 자리 잡는 걸 보면, 또 얼마나 흐뭇한지. 그런 대열에 알베르토 망구엘이 애석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제야 합류했다. 앞으로 영원히 함께 하리라. 그렇지만 나의 다른 인생 작가들은 절대로 밝힐 수 없다.

그때 그 과장님도 여전히 책을 많이 읽으시겠지. 독서가여, 영원하라.

 

참고한 책:

<독서의 역사> by 알베르토 망구엘

<밤의 도서관> by 알베르토 망구엘

<행운에 속지 마라> by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정소연 세종서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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