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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
뉴욕 변호사의 엑스팻 생활기
엑스팻(Expat)이란 외국에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엑스팻으로 반평생을 살아온 필자 이철재 변호사가 뉴욕에서의 엑스팻 생활을 풀어나가며 그곳의 일상적 모습 혹은 관광객들이 모르고 지나가는 곳들을 소개한다.
엑스팻이 가슴에 품고 사는 것들上 또 한국을 떠나며...이별은 결코 쉬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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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스톡

“Good-bye never gets easy no matter how frequent or brief(작별은 결코 쉬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일상처럼 자주 일어나고, 아주 짧은 기간이라 하여도).”며칠 전 한국을 떠나며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어린 시절 나의 꿈은 외교관이었다. 외교관이 뭘 하는 것인지 잘 몰랐지만 여러 나라로 이사를 다니며 산다기에 되고 싶었다. 그 뒤에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세계를 돌며 연주를 하고 싶었다. 나의 바이올린 실력이 세계를 돌며 연주할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달은 뒤로는 셰프가 되어 세계 여러 나라의 호텔 주방에서 일을 하는 꿈이 있었다.

음식은 꽤 만들지만 재료를 예쁘게 썰고 음식을 예쁘게 담는 재주가 꽝이라 주방장의 꿈을 포기한 뒤로는 한국과 미국을 3주씩 오가며 일을 하는 꿈을 가졌다. 그 꿈을 이뤘는지 지난 2년 정도 한국에 웬만한 물건은 가져다 놓고, 옷도 몇 벌 가져다 놓고 3~4주에 한 번씩 오가며 살았다. 이제는 하도 왔다 갔다 하니 한국에 있는 분들은 나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한다. 곧 또 올 것이라 이미 짐작을 하는가 보다.   

 

집벌레가 집 떠나는 순간

어려서부터 내 안에는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욕구와 회귀의 본능이 동시에 있었다. 어디를 가도 해 떨어지기 전에 집으로 들어가는 집벌레였으면서 늘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일하는 꿈을 꿨다. 청운의 꿈을 품고 유학을 떠나던 날 부모님과 공항에 나가 수속을 마치고 탑승객만이 들어가는 입구 앞으로 갔다. 집벌레가 집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나만 혼자 그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어머니는 눈물이 글썽글썽하고, 나는 눈물이 고이려는 것을 새로운 세상으로 나간다는 설렘으로 억눌렀다. 부모님과 다시 한 번 작별 인사를 하고 ‘저승 문이 저렇게 생겼을까?’ 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문을 통과해 들어가 버렸다.

처음 3년 정도는 그렇게 휙 들어가 버렸던 것 같다. 김포공항, 인천공항, 다시 인천공항 제2청사를 거치는 사이 몇 번이나 뒤돌아 손을 흔들며 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여유가 생겼지만, 아직도 서울을 떠날 때는 곧 다시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쓸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지만, 한편 외국에 나가 살고 외국을 돌아다니는 것은 아직도 내 꿈이다. 꿈을 이뤄 좋다. 하지만 꿈을 너무 나이 들어 이뤘는지 몸이 고달픈 것도 사실이다. 장거리 여행을 하면 가장 힘든 것이 비행기를 타고 내린 뒤 시차 적응까지 그 기분 나쁘고 멍한 상태이다. 이런 것을 영어로 제트래그(Jet Lag)라고 한다. 앞으로도 영원히 적응하지 못 할 것 같다.

나처럼 매일 시계바늘 움직이듯 움직이는 사람들은 몸 안에 시계가 하나 있어 알람 없이도 매일 같은 시간에 잠을 깨기 때문에 다른 시간대로 여행을 가면 생체 리듬을 바꾸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미국에 있는 나의 집은 칠도 해야 하고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많은데 거의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시차 적응이 될 만하면 옮겨 다니며 살다보니 몸은 몸대로 피곤하고, 집은 집대로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

 

풀냄새, 라일락 향이 진동하는 오월의 시라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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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서울을 떠났다. 이번에는 가을이나 되어야 다시 서울을 찾을 것 같아 더욱 아쉬웠다. 더 있고 싶었지만 미국에 일도 많고, 나의 애견 부도를 돌봐주던 사람이 여행을 가야 해서 출발 날짜를 연기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가장 훌륭한 선물은 비행기에서 참 잘 잔다는 것이다. 하도 자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이면 허리가 아플 지경이다. 이번에도 잘 자고 깨니 어느덧 비행기는 디트로이트 근처까지 와 있었다. 마지막 기내식은 배가 고프지 않아 건너뛰었는데 디트로이트공항에 내려 수속 마치고 나오니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터미널A 35번 게이트 근처 소라(Sora)라는 일식집에 앉아 일본식 생라면을 사 먹었다. 그간 한국 오갈 때마다 눈독을 들이다 늘 비행기 시간이 촉박해 그냥 지나쳤던 신발도 기어코 한 켤레 샀다. 무료로 배송까지 해준다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웃집 아저씨 모리스가 시라큐스 공항으로 나를 마중 나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웨그만즈 슈퍼마켓에 들러 저녁에 먹을 것들을 조금 샀다. 집에 도착해 보니 3주 전 떠날 때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연녹색 잎이 막 돋아나던 나무들은 모두 울창하게 우거졌다. 어느 집에서 잔디를 깎았는지 풀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하고, 라일락의 달콤한 냄새가 섞여 나오고 있었다.

시라큐스도 시골이 아닌 도시이지만 빌딩 숲 서울에 있다 오니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 1악장 도입부가 머리를 스쳤다. 전원에 도착 했을 때 베토벤이 맡은 냄새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음악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퇴비 냄새는 분명 아니다. 

오래 집을 비우고 있다 돌아오면 문을 열 때 집 안에 뭔가 큰 사건이 벌어져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특히 겨울에는 어딘가 동파된 곳은 없을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집안 히터 온도 조절기와 전등을 모두 와이파이에 연결시켜 한국에서도 늘 실내 온도가 내가 맞춰 놓은 온도보다 밑으로 떨어지는지 체크하고 집에 쉴 새 없이 이곳저곳에 전등이 들어와 빈집처럼 보이지 않도록 한다.

어떤 때는 혹시라도 도둑이 들어오다 귀신 나오는 흉가로 알고 도망가라고 한국에 앉아 미국 집의 이 방 저 방 전깃불을 켰다 껐다 하며 혼자 킥킥 대고 웃은 적도 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니 다행이도 집은 멀쩡했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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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들여놓고 앞마당과 뒷마당을 돌아보았다. 내가 매년 정성껏 가꾸는 화단을 살펴보기위해서이다. 나의 외할머니는 배화학당 시절  문학소녀였다. 금강산 수학여행 가서 아무도 무서워 오르지 못하는 최고봉을 혼자 올라갔다 내려와 쓴 기행문이 배화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는 전설이 서울 용산구에 전해진다.

할머니는 이화여전에 진학해 글을 쓰는 신여성이 되고 싶었지만, 할머니의 조부님의 극렬한 반대로 이전을 중퇴하고 외할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 할머니는 요즘 말로 철저한 전업주부로 사셨다. 하지만 살림하는 틈틈이 할머니의 이루지 못한 꿈을 화초 가꾸기에 쏟아 붓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마당의 꽃과 나무를 가꾸셨다. 지금도 생각나는 할머니 댁에는 큰 대추나무와 앵두나무가 있었고, 그 밑으로 할머니가 그 전 해에 손수 씨를 받아 파종한 페튜니아, 팬지 등이 널브러져 한가득 피어 있었다.

영어로 화초를 잘 가꾸는 사람들을 두고 ‘녹색 엄지손가락(Green Thumb)을 가졌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도 물려받지 못한 할머니의 녹색 엄지손가락을 내가 물려받았다. 뭐든 내가 만지면 시들시들 하던 화초도 살아난다. 특별히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비결도 없다.

앞마당에 딱 한 그루 그것도 집 바로 앞에 심어놓고 목숨 걸고 사슴들로부터 사수하는 장미는 몽우리를 잔뜩 머금고 훌쩍 자랐다. 모란은 내가 떠날 때 이미 싹이 나고 있어 올해는 꽃을 보지 못하려나 했는데 이제 막 몽우리가 열리기 시작했다.

시인 김영랑은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고 했다. 내가 모란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왜 삼백예순날인지 알게 되었다. 모란은 그 화려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꽃이다. 그 대신 화려하게 딱 5일 피고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 허망함에 ‘찬란한 나의 봄’을 하염없이 ‘기둘리며’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국을 오가며 몽우리 맺히는 것 보고 한 열흘 다녀왔는데, 돌아오니 다 지고 없어진 적도 많았다.

 

내 안에서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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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뒷마당에 영어로 스프루스(Spruce)라고 하는 나무 씨가 날아와 조그맣게 자라기 시작했다. 우리말로는 가문비나무라고 사전에 나와 있는데 크리스마스트리로 많이 쓰는 나무이다. 3~4년 전 내 무릎만큼 자랐을 때 그걸 앞마당으로 옮겨 심었다. 올해도 새 잎이 나고 키가 커 이제 내 가슴팍까지 올라왔다.

7월쯤 꽃이 피기 시작해 한 달 넘게 사발만한 꽃을 끝없이 피워 올리는 히비스커스는 겨울이 되기 전에 가지를 모두 잘라 주는데 그 밑동에서 새순이 돋고 있었다. 늦여름에 이 꽃이 피기 시작하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 집 문을 두드리고 꽃 이름을 묻고 가기도 한다.

작년 여름에는 히비스커스의 꽃이 피기도 전에 폭풍우가 몰아쳐 가지 하나가 꺾였다. 자르려다 보니 아직 가지가 살아 있어서 나무젓가락을 부러진 곳에 대고 반창고를 말아 세워줬다. 그 가지는 여름 내내 하얀 반창고를 훈장인 양 둘둘 감고 구부정하게 서서 꽃을 잘 피웠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와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이 들며 내 안에서 아버지가 불쑥불쑥 나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부러진 나뭇가지를 나무젓가락을 사용해 일으켜 세워 꽃을 피우게 만드는 내 모습에서 아버지를 봤다.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는 피가 돌지 않아 썩어가는 다리에 인조혈관을 넣어 살려내셨고, 나는 부러진 가지를 반창고로 이어 부쳐 양분이 흘러들어 꽃이 피게 했다.

짐을 다 풀고 나니 저녁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났다. 서울에서 가지고 온 홈메이드 약과를 몇 개 꺼냈다. 부모님 댁에 오는 도우미 아주머니는 45세에 우리 집에 오기 시작해 지금 72세이시다. 이제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아니라 숙모님쯤 되는 느낌이다. 아주머니의 약과는 우리 집안의 자랑이었다. 나는 늘 아주머니께 전에 약과 만드는 생과방 상궁이었냐고 농담을 했다. 맛도 좋지만 밤, 대추 등 고명을 순식간에 극세사보다 더 가늘게 썰어 올리시는데 그 모양이 일품이다. 이제는 손이 아파 약과를 잘 만들지 않으신다. 

내가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는데 나에게 주고 싶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들었다”며 저녁시간에 일부러 약과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주고, 어머니랑 앉아 드라마 보며 못된 주인공에게 함께 삿대질을 하고 소리를 지르다 가셨다. 그 약과 두 개 먹고 더 이상 다른 것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일찍 누웠다.

시간은 바뀌었지만 그래도 몸이 피곤하니 잠이 스르르 들었다. 

 

 

 

이철재 미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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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서호상   ( 2019-06-12 ) 찬성 : 23 반대 : 1
글을 읽으면서 맘이 참 편안해졌습니다. 저는 해외에 자주 다니면서 업무와 건강만 신경썻거든요. 이번 주말에는 한번 찬찬히 주변을 돌아봐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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