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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
이재인의 투유 그림 에세이
유쾌함과 유익함의 교집합에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자 하는 크리에이터. 책,빵,그리고 여행을 사랑하며 그에 대한 글과 그림을 많은 이들과 나누고자 한다.
할머니와 북토크를 1화.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 할머니에겐 코미디, 나에겐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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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하완, 출판사: 웅진 지식하우스

 

하마터면.jpg

 

"읽는 내내 네 생각이 나서 가져왔어."

지난 9월, 옛 회사 동기가 책을 하나 건넸다.

 

표지에는 다리에 털이 숭숭난 남자 캐릭터가 팬티만 입고 만사 귀찮은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내 생각이 났다고...?"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내 손을 막으며,

"아니, 겉모습이 닮았다는 건 아니고. 일단 읽어봐."

 

정신 없이 지내다 퇴사를 일주일 앞두고서야 여유가 생겨 책을 펼쳤다.

 

완독 소감.

나는 작가와 비슷한 종족(?)임에 틀림 없다. 아직은 어쩔 수 없이 열심히 살고 있으니, 내가 좀 덜 진화한 버전이려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의 첫인상은 할머니에게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 뭐야.. 징그럽게!"

표지를 바라보다 손으로 책을 대충 훑은 뒤 할머니는 말했다.

"안볼래."

 

'이런 트렌디한 책의 감성은 역시 2030세대만을 위한 것인가.'라고 생각한 지 일주일도 안되어 큭큭대며 책을 읽고 있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엥? 안 읽겠다며. 징그럽다더니!"

"어제 신문에 나왔어. 어디서 들어본 제목이다 했더니 이 책인거여. 막상 읽어보니까 재밌는거여."

 

할머니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신문을 구독했다. 그러니까, 60년 넘게 하루의 시작을 신문과 함께 해왔다.

 

그 세월 동안 쌓인 신뢰는 꽤 두텁다. 11월 6일자 조선일보에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의 하완 작가가 짧게 소개됐다. 그것을 보자마자 할머니의 책에 대한 진입 장벽이 단숨에 낮아졌다.

 

첫 번째 북토크는 일요일 낮에 맥주 두 캔을 앞에 두고 진행했다. '묘한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게 한다는 낮술(p117)'을 우리도 시도했다. 작가는 평일 낮을 이야기한 것이었겠지만 아직 난 열심히 살고 있으니 그건 불가능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40을 앞둔 반백수의 유쾌한 위로 에세이'다.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베스트셀러 작가에 등극했지만, 이 책을 집필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을 프리랜서라 쓰고 백수라 읽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이렇다 할 대책 없이 6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자신을, 열심히 살아도 제자리 걸음 중인 젊은 세대를 위로하는 내용이다.

 

'그렇게 너무 애쓰며 살아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토닥이며.

 

처음엔 괜한 반발심에, '그러다 뒤쳐지면 작가님이 내 인생 책임질거유?'라 생각했다. 근데 웬걸, 이미 난 열심히 보내지 않은 순간들이 많았다. 공부에 집중하지도, 신나게 놀지도 않은 그런 순간들.

 

작가는 '열심히 살지 말자'는 만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면 뭐 어때? 괜찮다니까!'며 독자들을 위로한다.

 


“난 늙은이인데도 재미 있던데?”

“그래? 할머니 세대랑은 너무 다른 가치관 아닌가?”

"나 때랑 지금이랑은 다르지. 나 때는 '자아 실현' 같은 건 고민도 안했어. 그냥 다들 흘러가는 대로 살았지. 꼭 맞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흠.. 그럼 요즘 젊은이들은 살만하니까 배부른 고민을 하는건가?"

"그건 아니지. 예전엔 회사에서 과장이면 다 자기 집이 있었어. 지금처럼 '내집마련'이 하늘에 별 따기 같진 않았다, 이 말이여. 어느 세대든 안 힘들다고 할 수 없어. 다 자기가 제일 힘든거야."

 

개인의 '힘듦'을 객관적인 지표로 평가할 순 없지만, 나보다는 할머니의 인생이 배로 고단했다 확신한다.

 

학창시절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었고, 성인이 되자마자 한 제조업 회사에서 경리로 일을 시작했고, 30대와 40대는 홀로 두 딸을 키우느라 고군분투하며 보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질 즈음에서야 할머니는 가장의 무게를 벗었다.

 

"어쩔 수 없지. 그냥, 그런 시대에 태어난 걸 어쩌겠어. 근데 또, 뉴스 보면 요즘 젊은이로 사는 것도 힘들어. 뉴스고 신문이고 맨날 얘기하잖아. 입시난이다, 취업난이다.."

"맞아. 게다가 직장인이 된다고 해서 마음 편하게 살 수도 없어. 이 책의 작가도 그렇잖아. 나도 그렇고."

 

책임질 가족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돈을 못 벌면 큰일나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수십 가지의 이유로 방황 중이다.

 

10대 시절을 되돌아보면 치열하게 공부한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깨어 있는 시간의 반 이상을 책상 앞에서 보내며 매일 생각했다.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 갈 수 있댔어.'

 

그 '좋은 대학'은 딱 2년만 좋았다. 노트북에 입사 지원서를 띄워놓고 커피를 포션 삼아 마시며 생각했다. '스펙 잘 쌓고 자소서 열심히 쓰면 좋은 회사 갈 수 있댔어.'

 

그렇게 좋은 회사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나는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평범한 월급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미래를 위해 인내하며 돈을 벌었다. 내게 돈을 번다는 건, 곧 무언가를 참고 버티는 것이었다. (p.216)”

 

10년을 달린 ‘열심 마라톤’의 결과가 이것이라니.

"나는 참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생을 바랐길래 이처럼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p.278)"

작가님, 즐거운 직장 생활을 바라는 게 SF적인 기대일 줄은 몰랐습니다.

 

안되겠어요, 저도 열심히 안 살렵니다. 그래도 괜찮다면서요!

 

 

퇴사 후 한동안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속 삽화였다.

 

아무리 바다 같은 이해심을 소유하고 있다지만 우리 할머니는 80세, 기성세대 안에서도 고참이다. 

안정적인 삶이 최고라는 생각이 아주 굳건하다.

“작가가 6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잖아. 돈 때문에 자유를 계속 미루기만 하다간 한번도 자유롭지 못한 채 늙어 죽게 생겼다는 위기감이 덮쳐왔다(p.214)잖아. 할머니는 이런 작가의 행동이 이해돼?”

“솔직히 아니지.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월급도 나쁘지 않았다며. 책이 잘됐으니 다행이지만, 무명으로 끝났으면 어쩔 뻔했어.”

“할머니 근데, 나도 두 달 전에 대기업 그만뒀잖아. 그 때 쟤 왜 저러나 싶었겠네?”

“좀... 그렇지?”

“엥? 그런 얘기 없었잖아!”

“네가 오죽했으면 퇴사한다고 했을까, 싶어서 가만 있었던 거지. 그렇게 힘들게 들어간 좋은 회사를 나온다는 게, 늙은이 입장에선 이해가 안되지.”

 

죄송해요, 할머니. 손녀는 새 회사에서도 프리랜서가 될 타이밍을 노리고 있답니다.

 

작가의 생각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는데도 할머니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웃기니까.

“센스가 있어. 그림도 처음엔 숭하다 싶었는데, 자꾸 보니까 아주 재미있어.”

“작가가 이해가 안 되는데도 이 책이 좋다는 거네, 그러면?”

“응. 좋아. 요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싶어서 흥미롭기도 하고.”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할머니에게 한 편의 코미디 영화 같은 책이었다. 반대로 나에겐 재미 요소가 많은 다큐멘터리였다.

 

사회인이 되고 나서부터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고민들이 책에 너무나 현실적으로 담겨 있었고,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거리는 나와 달리 ‘안전하다고 유혹하는 남들이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선택 (p.130)’을 한 작가의 모습이 감명 깊었다.

 

시무룩해지지 않았다. 작가가 그랬다. 사람은 각자의 속도가 있다고 (p.222). 나는 과거의 ‘열심 마라톤’은 잊고 또 다른 마라톤을 위해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있는 중이라 생각한다.

 

마라톤 이름은, ‘아무도 안 시켰는데 그냥 혼자 좋아서 뛰는 마라톤’ 정도가 괜찮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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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이재인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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