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p 로고
칼럼진
염은영의 다행의 기록
책과 영화,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살아갑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저 또한 누군가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자기만의 방을 찾아서
topclass 로고
입력 : 2018.12.28
도움 : 영화 <제인>, 중고책 판매자 A, 에세이 <자기만의 방>
영화 제인 스틸 1.jpg
영화 <제인> 스틸

 

 

영화 제인 스틸 2.jpg
영화 <제인> 스틸

 

지난 8월에 열린 EBS 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된 <제인>은 당연히 못 보는 게 맞았다. 보고 싶었는데, EBS 방영 시간이나 상영시간표를 꼼꼼히 챙기질 않았거든. 그 와중에 상영일 이후로 일주일간 D-box를 통해 볼 수 있다는 꿀팁을 알아내기도 했지만, 웬일인지 접속하는 데 애를 먹어 볼 수 없었다. 이 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이렇게 영영 놓치는구나 생각하니, 나로 말미암은 한심함에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매사 간절함이 부족한 탓에 일을 또 그르치는 나. 그래, 내가 그렇지. 

이 대사를 뱉고 나면 그때부터는 지옥이다. 평소에는 기억하지 않았던 오래된 한심함을 길어 올리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데 빠지고 만다. 나라는 인간이 써 온 한심함의 역사를 되짚다 보면, 아 나는 진정 무쓸모한 인간이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고, 대체 왜 영화 한편 보는 일로 이토록 고통스러워지고 마는지 정신이 아득해진다. 
나는 또 다시 미쳐갈 거예요. 그 끔찍한 고통을 또 겪을 순 없어요. 이번엔 회복도 못 할 거예요. 그래서 최선의 선택을 하기로 했어요.
- 영화 <디 아워스> 중 버지니아 울프의 유서 부분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주머니에 돌을 가득 채우고 강물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과 불화하는 불행을 끝내기 위해 결단한 것이다. 그런 울프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이유로, 거의 매순간 그를 생각하는 나는 이토록 간단한 노력을 이행하지 못해 삶을 절망하면서도 이내 '오늘 저녁에 뭐 먹지'하며 핸드폰을 뒤적이고…… 그럴 때면, 진정한 용자는 결국 내가 아닌가 하는 생명 연장의 씁쓸한 생각에 젖고 만다.
얼마 전, 정확히 2주 전. 놀랍게도 나는 영화 <제인>을 보게 된다. 영영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이 영화는, 그러니까 앞으로 유료로도 보기 어려울 거라던 이 영화는, 맥 빠지게도 내가 구독 중인 유료 스트리밍 채널에서 ‘새로운 콘텐츠’로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정말 맘 같지 않은 일투성이다.
도움 1.
<제인>은 동물학자 제인 구달 박사가 1960년 탄자니아 곰베에서 침팬지 연구를 시작할 무렵의 모습을 담은 기록 영상을 중심으로 구성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구달 박사가 스물여섯의 나이에 동물학 학위가 없는 연구원으로 발탁된 파격 일화에서부터 침팬지 연구가 전무했던 당시 그의 연구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을 내려쓰는 이 영화는 ‘사료’로서 아름답다. 더불어 구달 박사가 이 일에 얼마나 완벽한 적임자인지 확인하는 것은, 열망과 의지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인생의 경의를 체험케 한다. 곰베에서의 그는 확고한 행복과 함께, 완벽하게 혼자이면서도 결코 외롭지 않은 삶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자기만의 방-책 커버.jpg그의 삶이 기우뚱하기 시작한 것은 그에게 가족이 생기면서부터다. 남편과 아들이 생기면서 그는 더 이상 ‘학자 제인 구달’이기 힘들다. 그의 삶에는 여러 가지가 요구된다. 그 중에서 가장 가혹한 요구는, ‘자기만의 방’이었던 곰베를 잃는 것. 휴고를 사랑해서 결혼했고, 자연스럽게 아들 그럽을 낳았는데, 그 일들은 ‘곰베의 제인’이 한 일이었지만 ‘아내로서의 제인’, ‘엄마로서의 제인’이 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는 난데없이 자기 삶에 끼어든 ‘사랑’과 ‘가정’이라는 선물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릴 것이라고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가 곰베로 떠나기 전, 인류 중 그 누구도 침팬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듯 말이다.

제인 구달 박사는 그래서 선택했다, 곰베를.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을. 만일 구달 박사가 곰베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을 것 같다. 내게 얼마의 돈, 넉넉한 방과 넘치는 책들이 있다고 해도 나는 자기만의 방을 누리는 삶에 대해 영원히 회의적이었을 것이다. 구달 박사의 결정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해석이 천차만별이겠지만, 나에게는 해방이요, 희망이다. 쟁취고, 승리다. 이 영화를 끝내 보게 된 것이 그래서 더 없이 기쁘고 감동적이다.

도움 2. 
품에 안고 다니던 책들을 자주 선물하곤 한다. 친구와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다가 가방에 있던 책을 자주 들려 보내곤 했는데, 그렇다 보니 같은 책을 여러 권 사야 했다. 그런 책은 늘 내게 필요한 것이었으므로 품에 두었던 것이었으니까. 당장 급한 대로 같은 책을 주문하려고 하니 품절, 또는 절판이란다. 아끼던 판본의 절판 소식을 들으면 조금 아찔해진다. 그 책은 알맞은 주인에게로 전해진 것이 분명하지만 나와는 영영 이별한 것이 되니 말이다. 아무렴, 사물과의 인연이라는 것이, 책과의 인연이라는 것이 영원하겠는가. 저 아름다운 장정에 담긴 글들은 책이라는 물성으로 가둬둔 공기다. 시간이다. 흐르는 물이다.
아쉬움은 끝을 모르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온라인 중고서점에 이제는 내게 없는 책을 검색한다. 이제 더는 출판하지 않는 책의 형태. 몇 개의 검색 결과가 뜬다. 대여섯 명의 판매자가 내가 원하는 책을 아주 좋은 상태로 판매한다고 한다. 고마운 마음. 나는 그 중 판매자 A의 책을 골라 주문한다. 설레고, 실실 웃음이 나고, 순간 행복의 기척을 느낀다.
도움 3.
펭귄클래식 시리즈로 출간된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을 손에 넣었다. 수년만의 일. 내게 <자기만의 방>이 없는 것이 아니다. 국한 혼용으로 쓰인 범조사 판의 <나만의 방>이 있고,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쓴 이민경 작가의 글이 담겨 있는 민음사 판의 <자기만의 방>도 있다(현재로서 가장 좋은 번역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시절 나를 지탱해주었던 위로의 추억은 그 물성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소중한 친구들에게 내가 받았던 위로를 있는 그래도 건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위로의 말이 무엇이었냐면,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한 주제라도, 아무리 거대한 주제라도 주저하지 말고 모든 종류의 책을 써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고 여러분 스스로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에 대해 사색하며, 책을 구상하며 길모퉁이를 어슬렁거리고, 사유의 낚싯줄을 강물 깊이 담글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중략) 나는 여러분에게 이 강연 도중에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누이를 시드니 리 경이 쓴 시인의 전기에서 찾지는 마십시오. 그녀는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엘리펀트 앤 캐슬 맞은편 버스가 정차하는 곳에 누워 있습니다. 이제 나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고 교차로에 묻힌 이 시인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습니다. 그녀는 여러분 안에, 내 안에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재우느라 이곳에 오지 않은 수많은 다른 여성들 안에도 살아 있습니다. 그녀는 살아 있습니다. 위대한 시인은 죽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계속해서 현존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기회는 여러분이 능력을 발휘하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후략)”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펭귄클래식코리아, 2015) 中)

 

염은영 에디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