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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
정부장의 독서일기
누군가의 인생 책을 알게 되면 조용히 찾아 읽고 상대의 마음을 상상하는 버릇이 있다. 금융 분야에서 일을 시작해 조금은 특이한 이력의 편집자다. 책 읽는 게 일이자 즐거움인데 책 못지않게 사람도 좋아한다. 일하는 사람들이 읽어두면 좋을 책을 소개한다.
모범생은 모르는 ‘파괴적 혁신’ 잘못 사용되는 대표적인 경영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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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5.17

어떻게 편집자가 방증반증도 구분 못합니까?”

부끄럽지만 편집자 1년차에 들었던 힐난이다. 교묘하게도 두 단어는 매우 비슷해 보이고 실제로도 많이 혼용되는데 뜻은 전혀 딴판이다. 누군가 투명망토를 뒤집어 쓴 채 토르의 망치를 들어 올렸다면, 그가 토르라는 방증이다. 반대 증거인 반증이 아니다. 나만 착각하는 건 아닌지, 이 두 용어는 우리말 바로 쓰기같은 칼럼에 자주 등장한다.

경영 개념 중에서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 대표적으로 잘못 사용되는 단어다. 오죽하면 그 개념을 주창한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가 파괴적 혁신의 오용을 여러 차례 지적했다. (최근 출간된파괴적 혁신 4.0에 그 내용이 자세하고 쉽게 정리되어 있다.) 혁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기존 상태를 부수고 변화한다는 뜻이니까, 앞의 수식어 파괴적은 혁신을 강조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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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기업의 딜레마> 한국어 번역서(왼쪽)와 영문 원서.

 

모범생이 하는 존속적 혁신

크리스텐슨은 성능을 개선하고 이전보다 발전되는 과정을 존속적 혁신’(sustaining innovation)이라고 따로 구분지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혁신에 해당한다. 이것은 모범생의 길이다. 수업 시간에 더 집중하고 주어진 문제를 연구해서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인데, 이 경우에는 교사를 뛰어넘기가 어렵다. 이를테면, 이제는 사라져 버린 휴대용 CD플레이어에서 이런저런 기능을 탁월하게 개선하는 것은 존속적 혁신이다.

물론, 존속적 혁신도 중요하다. 그러나 좋은 기업들은 존속적 혁신을 지속하며 계속 조금씩 나아지다가 급작스럽게 쇠락을 길을 걷게 된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아주 다른 제품인 MP3가 나타났을 때, 아무리 뛰어난 CD플레이어도 대항마가 되지 못했다. MP3의 초기 버전은 음질이 떨어지고 기능 버튼이 조잡했을지 모르지만, CD플레이어가 불편해 사용하지 않았던 비사용자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바로 파괴적 혁신이다.

 

파괴적 혁신의 딜레마

사실 파괴적 혁신은 매우 당혹스럽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개념이다. 추측과는 달랐던 그 진짜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약간 불편한 기분마저 들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격언처럼 노력을 강조하는 일에 우리는 대체로 익숙하다. 오늘날 모든 일하는 사람들은 외부에 귀를 열어두고 끝없이 향상하라는 주문을 받는다. 그런데 오히려 성능을 계속 개선하는 좋은기업들이 그 행동 때문에 몰락한다는 말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크리스텐슨은 1997년에 혁신 기업의 딜레마라는 책에서 파괴적 혁신을 최초로 언급했다. 크리스텐슨은 스티브 잡스부터 말콤 글래드웰까지 뛰어난 기업가와 경영 이론가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가장 탁월한 경영 이론가로 손꼽힌다. 경영계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워낙 석학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인슈타인이 밝혀낸 상대성이론의 세계, 즉 시간여행이 가능해지는 시공간의 왜곡이라는 개념만큼이나 일반의 상식과 부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기존 소비자와 시장에 헌신하고 스스로 개량하는 모범생기업들은 자신의 고객을 제외한 더 넓은 시장을 보지 못하는 맹점에 빠지기 쉽다. 카페의 공간을 아늑하게 꾸미고 바리스타 실력을 향상해도 매출이 제자리걸음인데, 옆 골목의 더 작은 카페는 디저트 메뉴를 개발해서 배달 위주로 판매를 시작해 매출을 늘리고 있다면? 배달을 선호하는 새로운 소비 트렌드와 소비자의 심리에 재빨리 대응한 파괴적 혁신 사례다.

남의 생각을 내 말로 표현하고 쓸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것이 된다고 하니, 내가 하는 일에 적용해보자. 무릎을 치는 기획 아이템, 아름다운 표지 디자인, 유려한 문장을 구현하는 일은 존속적 혁신인가, 파괴적 혁신인가? 제목을 아주 매력적으로 붙였다고 해도 기존 방식의 개량일 뿐인 존속적 혁신이다. 반면, 매월 1~2만 원만 내면 신간 도서까지 무제한 읽기가 가능한 구독 서비스는 비소비자도 끌어들이는 파괴적 혁신이 분명하다. 종이책이라는 제품과 그 독자를 소중히 여기는 대다수 출판인에겐 이런 매체 전환이 마음 아프고, 기존 독자를 저수익 서비스로 넘기는 것 같아 탐탁지 않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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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기업의 딜레마> 저자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비즈니스스쿨 교수. Ⓒ조선일보 DB

 

중진국 함정과 연결돼

국가 차원에서도 혁신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에 고착되어 있다는 얘기를 끊이지 않고 듣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도 중진국 함정에 빠졌다고 거론되는데, 지금 미중 무역 갈등이 고조되고 있지만 중국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을 펼친다. 확실한 사실은 4차 산업혁명의 주요 분야에서 중국은 지나쳐 보일 정도로 투자를 쏟아 붓고 있다는 점이다. 유전자 조작이나 개인 데이터 사용 등에도 거침이 없어 위태로울 정도다.

국가 단위에서 파괴적 혁신이라면, 국가가 신규 산업 투자의 길을 닦아야 할 테고, 대기업은 신규 사업을 별도 법인으로 차리는 형태여야 성공 확률이 높다.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에 과감한 투자가 이뤄지면서 인수합병도 활발해지면 기존 기업이 활력을 얻을 수도 있다. 혁신 기업의 딜레마보다 6년 뒤에 출간된 책인 성장과 혁신에서 크리스텐슨은 파괴적 혁신을 실행할 때 반드시 신규 조직에서 책임과 권한을 갖고, 제한된 예산으로 실행하라고 여러 차례 간곡하게 당부했다. 원래 조직에서는 해왔던 대로 하려는 관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사장이 본부장에게 아무리 혁신하라고 응원의 이모티콘을 보내면 뭐하나. 한 울타리 안에서는 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크리스텐슨의 책을 읽어 보니, 우리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독립적인 미국의 분위기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갑자기 며칠 전 점심 때 아무 말 대잔치라고 이름 붙인 부서 회의에서 결국 또 코멘트가 적잖았던 정 부장이라는 나 자신이 떠오른다. 미팅 시작할 때 저는 말 적게 할 겁니다라는 말이나 하지 말지.

 

파괴적 혁신만 능사가 아니다
경영의 제1 금언은 어디서나 ‘성과’

지향점이 분명하다고 해서 다른 하나가 오답은 아니다. 파괴적 혁신을 유념하고 실행해야 하지만, 현재의 주요 사업과 존속적 혁신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천재는 곧 괴짜라는 공식이 통용되고 추앙 받는 면도 있지만, 현실은 조용한 실행가들이 안정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새로운 일은 벌여야 하지만 별도로 떼어 두어서 리스크를 관리해야 한다. 윗선의 기분에 따라 저지르고 볼 일은 아니다.

클래식을 요약이 아닌 원전으로 다시 읽었을 때, 종종 신선한 느낌을 받게 된다. 만화가 아닌 원작 소설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는 허수아비에게 충분히 설명할 지면을 가졌다. “인간의 아기에겐 뇌가 있지만 아직 아는 게 없어요. 오직 경험만이 진짜 지식으로 남으니까요. 시간이 흐를수록 당신은 틀림없이 더 지혜로워질 거예요.”

피터 드러커와 마찬가지로 크리스텐슨이 자신의 저서에서 가장 먼저 상술하는 대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경영)에서는 성과를 내야 한다. 결과가 우선이다."
혁신과 변화를 유행 따라잡기에 그치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아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정소연 세종서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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