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잠든 아이를 일깨워주는, 마술 같은 초대장

마술은 트릭이다. ‘어떻게 한 거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 마술을 온전히 즐길 수 없다. 그저 마술사가 이끄는 대로 편한 마음으로 따라가는 게 좋다. 그러다 보면 믿을 수 없는 몽환적인 세상이 펼쳐진다. 잠시나마 팍팍한 현실을 잊고 기분 좋은 환상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게 마술의 매력이니까.

어린 시절에는 믿는 대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어른이 되어가며 맑은 눈은 점차 탁해지고 보이는 것조차 온전히 믿을 수 없게 됐다. 넷플릭스 시리즈 〈안나라수마나라〉는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선 누군가, 어른이 됐지만 아직 그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어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을 잇는 소재는 마술이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안나라수마나라〉는 흑백의 그림을 화려한 영상으로 전환해 볼거리를 더했다. 또 뮤지컬 장르를 접목, 인물들의 감정을 춤과 노래에 담아 뮤직 드라마란 장르로 탄생시켰다. 버거운 현실을 사는 ‘윤아이(최성은)’에게 특별한 순간을 선물하고, 꿈이 없는 ‘나일등(황인엽)’에게 마술을 가르쳐주는 마술사 ‘리을’은 지창욱이 맡았다.

지창욱은 드라마 〈무사 백동수〉 〈기황후〉로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한류 스타로 자리매김한 배우다. 〈힐러〉 〈수상한 파트너〉 〈THE K2〉 등에서 여전한 저력을 발휘하는가 하면, 뮤지컬 〈잭 더 리퍼〉 〈그날들〉 〈신흥무관학교〉 등을 통해 뛰어난 가창력까지 보여줬다. 〈안나라수마나라〉는 그동안 지창욱이 축적해온 매력을 집약적으로 담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연기는 두말할 것 없이 한류 스타로서 입지를 넷플릭스를 통해 더 다지고, 탄탄한 노래 실력을 자랑하는 무대로 삼았다. 특히 어른이 돼서도 아이의 천진함을 잃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살아가는 리을의 섬뜩함과 순박함을 지창욱 특유의 장난기와 소년미로 세밀하게 그려냈다.

누구나 마음속에 아이를 품고 있다. 꿈과 동심을 잃어버린 어른들에게 마술사가 된 지창욱이 초대장을 보낸다. 마음속에 희미해진 아이의 존재를 일깨울 시간이다.


〈안나라수마나라〉 출연 소식을 듣고 지금까지 필모그래피와는 사뭇 다른 결이라 놀랐습니다. 그동안 강한 인상의 배역이나 로맨스 주인공을 맡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대본을 받고 아이나 일등이 모습에 먹먹했어요. 이건 내 이야기,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어 공감이 많이 갔고요. 원작에 대한 부담, 음악적 어려움이 있었지만 감동이 커서 작품을 선택했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 가졌던 동심이나 꿈이 무엇이었는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내 이야기’라고 공감한 부분은 구체적으로 어떤 거죠?

“저 역시 돈에 허덕이고 학업 스트레스를 받은 시절이 있어요.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른 채 마냥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적도 있고요. 고3 때 진로를 배우로 정했는데 불현듯 ‘공부를 왜 하고 있지? 과연 즐거워서 하는 건가?’ 생각했거든요. 뚜렷한 목적이 있어 공부한 건 아니었던 거죠. 단지 적성검사에 나온 특성에 맞춰 진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게 맞나? 평생 할 수 있을까?’ 의심도 들었어요.”


그동안 〈잭 더 리퍼〉 〈그날들〉 〈신흥무관학교〉 등의 뮤지컬에서 가창력을 인정받았지만 〈안나라수마나라〉는 처음 시도하는 뮤직 드라마인 데다 마술까지, 보여줘야 할 부분이 많았어요. 부담되진 않았나요?

“처음에는 괜찮았어요. ‘마술이 어려워? 음악이 어려워?’라며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연습에 들어가니 쉽지 않은 작업이더라고요. 그다음부터는 연출의 힘을 믿고 동료들을 믿으며 하면서 갔어요. 노래 부르는 장면을 위해 수많은 리허설과 회의 과정을 거쳤기에 다른 작품보다 준비 기간이 길었어요.”


리을은 영원히 아이로 남고 싶어 하는 마술사입니다.
극중에도 여러 차례 마술 장면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직접 소화했다고요?


“이은결 일루셔니스트의 도움을 받아 3~4개월 정도 연습했어요. 다행히도 웬만한 건 제가 소화할 수 있는 마술 위주로 만들어주셨네요. 리을이 엄청난 마술사는 아니에요. 버려진 유원지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마술을 해서 숙련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죠. 다만 어색하거나 불편해 보이지 않도록 연습은 많이 했어요. 마술에 비법은 없거든요. 그냥 연습 또 연습, 손에 익을 때까지 연습하는 길뿐이었어요.”
 

원작인 동명 웹툰이 워낙 화제를 모은 작품이죠. 리을을 표현하기 위해 웹툰을 얼마나 참고했는지요?

“연기하는 데 큰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해 원작을 끝까지 보지 않았어요. 웹툰이 워낙 사랑을 많이 받아 부담이 된 건 사실이에요. 원작에서 전달하려는 본질을 흐리지 않길 바라면서도 원작의 리을을 똑같이 구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건 불가능했고요. 대신 저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하려고 노력했어요.”


리을이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라 알 수 없는 표정, 제스처 등을 실사로 구현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도 같아요.

“감독님이 톤 앤 매너를 전체적으로 봐주셨어요. 좀 더 개구지게, 신나게 혹은 이번에는 감춰보자, 드러내보자, 조율을 해주셨죠. 저는 신비로움이나 미스터리함을 연기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일부러 그런 인물로 비치기 위해 연기하면 더 이상해지겠더라고요. 그냥 솔직하게 가져갔죠. 그러다 보면 장면이 쌓여서 자연스럽게 신비로운 분위기가 전달되리라 생각했어요.”


원작자인 하일권 작가는 뭐라고 하던가요?

“덕분에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고 매력적인 리을을 연기해서 감사하다고 제가 먼저 작가님에게 연락을 드렸어요. 그다음은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데, 작가님도 감동했고 몇 번이나 연기를 보면서 좋았다고 칭찬해주셨어요. 원작 팬 층이 두터워서 평가에 대한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원작자가 좋다고 하니 위안이 되더라고요.”


“머릿속 숫자를 지운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만큼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대사가 현실에서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어른이 될수록 더 그렇고요.

“그렇죠. 머릿속에서 숫자를 지우고 사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다만 하기 싫은 일을 하는 만큼 하고 싶은 일도 하라는 말은 리을이 가장 전하고 싶은 메시지 같아요. 그만큼 현실에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마음의 안정을 취하는 일이 분명 필요해 보여요.”


어른이 돼서도 변하지 않고 지키길 바라는 면들이 있나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면서 두려움이 생겨 점점 나를 숨기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어요. 어릴 때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최대한 솔직하고 싶은데 이미 많이 잃어버렸겠죠. 사람들 시선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못 하고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면서 포장하고 살아가니까요. 그래도 저를 솔직하게 드러내며 살고 싶네요.”


윤아이를 어린 시절로 데려가 위로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는데요,
자신을 지난 시간으로 데려가 위로를 건네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어릴 때의 나를 만난다?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떤 얘기를 하는 게 과연 도움은 될까요? 물론 힘들었던 순간, 실수했던 순간이 있지만 저에겐 소중한 경험이자 과정이어서 굳이 다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몰래 멀리서 지켜보라고 하면 그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럼 어린 시절이 아니라 신인 시절 지창욱을 만난다면요?

“음… 그냥 잘하고 있다고 말해줄래요. 실수해도, 틀려도 괜찮으니 하고 싶은 걸 해도 된다고.”


어느덧 데뷔 14년 차가 됐습니다.
배우 생활을 돌아봤을 때 가장 마술 같은 순간을 꼽아보겠어요?


“공연영화학과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아직도 기억나요. 버스 안에서 합격 문자를 받았는데 저도 모르게 바로 버스에서 내려 엄마한테 전화했어요. 목적지까지 좀 더 가야 하는데 문이 열리니 저도 모르게 내려버린 거예요. 또 매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할 때가 마술 같은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어른들로 인해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이 작품 주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주변에 좋은 어른 한 명만 있었어도 현실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겠죠.
과연 좋은 어른이란 무엇일까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물론 끊임없이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누구도 정답을 알려줄 수 없을 것 같아요. 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맞는 해답을 주기란 쉽지 않을 거예요. 설령 정답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정답에 맞출 수는 없을 것 같고요. 그냥 재미있게 놀아줄 수 있다면 좋은 어른이지 않을까 싶어요.”


재미있게 놀아주는 어른이요? 하하.
그럼 후배도 많이 늘었을 텐데 어떤 선배이고 싶나요?


“문득 보니까 스타일리스트, 헤어, 메이크업 담당자가 다 동생이더라고요. 감독님과 술 마시면 편하게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가 됐고요. 그렇다고 어떤 선배가 돼야겠다는 건 없어요. 그냥 같이 일하면 재밌는 사람, 편한 사람이고 싶어요. 다만 좀 더 연장자로서 해주고 싶은 건, 나이가 어리다고 눈치 보며 일하지는 않게 해주려고요. 후배 연기자가 더 표현할 수 있는데도 그걸 못 하게 막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현장이 따뜻하고 즐거운 곳이란 걸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요.”


주변 사람들에게 ‘인간 지창욱’은 어떤 사람으로 남길 바라나요?

“제 외모 때문에 첫인상이 까다롭고 차가울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김성윤 감독님조차 저한테 가진 편견이 있었다고 했어요. 저 그런 사람 아닌데. 그냥 편하고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안나라수마나라〉 마지막 부분에서 리을은 자취를 감춘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지창욱은 잠시 상상했다. 유원지를 탈출한 리을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먼지를 툭툭 털며 나타난 모습을. 그러고는 마음이 힘든 또 다른 아이들 앞에 마술처럼 등장해 묻지 않았을까. “당신, 마술을 믿습니까?”라고. 잠시나마 팍팍한 현실을 잊고 믿는 대로 펼쳐지는 세상을 보여주는 리을을 응원하는 마음에서 희망적인 상상이 돋아났다.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솔직하고 순수함을 잃고 싶지 않은 지창욱의 바람과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