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맞지 않는 옷은 벗어던져요”

“You never Know.”

뉴요커들이 하는 말 중 유나양(본명 양정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인생은 아무도 모른다.” 뉴욕 패션계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 그는 오렌지 슈트케이스에 7피스의 샘플을 들고 다녔다. 행운이 깃들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생산업체, 세일즈, 바이어, 프레스 등을 만나러 가면 열 곳 중 아홉 군데는 “또 저런 아이군. 오늘도 뉴욕에서 브랜드 론칭하겠다고 몇 명이 왔다 갔어”라며 무심을 넘어 무시의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꼭 한 군데 정도에서는 “You never know” “그래 모르는 일이지. 네가 또 성공적인 브랜드를 론칭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그의 인생의 변곡점은 사람에서 시작된다.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난 78년생 유나양은 이화여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어학연수차 밀라노로 떠난 그는 그곳에서 또 ‘한 사람’을 만났다. 단골로 다니던 카페에서 만난 할머니다. 밀라노의 명품 브랜드 발렌티노에서 일했던 그는 자신이 근무하던 ‘하이엔드 공방’을 구경시켜주었고, 이 경험이 유나양을 패션학교인 마랑고니 디자인코스로 이끌었다. 유나양은 마랑고니를 졸업하고 밀라노의 마르티니에서 첫 직장을 얻었다. 이후 영국 런던의 패션 명문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에서 여성복을 전공했다.

아시아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경력을 쌓고 뉴욕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한 유나양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6개월 후에 만나자”며 이민 가방을 들고 떠났던 20대의 양정윤은 20년 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이자 할리우드 스타와 상위 1%가 사랑하는 하이엔드 브랜드 ‘유나양(YUNA YANG)’을 이끄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어 돌아왔다.


밀라노에서 런던으로, 뉴욕에서 한국으로

‘유나양’은 하이엔드 브랜드다. 일론 머스크의 어머니이자 모델인 메이 머스크, 모델 킴 카다시안의 패밀리 멤버인 켄달 제너, 가수 캐리 언더우드, 배우 줄리안 허프 등이 즐겨 입는다. 잘 알려진 흔한 명품이 아닌 ‘나만 아는 고급 브랜드’를 입고 싶은 이들이 ‘유나양’을 찾는다. 명품 위의 명품 같은 존재다. 그가 이런 고가 브랜드를 만든 건 선택과 집중을 한 때문이다. 대세에 순응하기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집중해서 잘해내는 고집은 유나양이 뉴욕에서 인정받게 된 비결이기도 하다.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동양 여성에 대한 편견을 자주 마주합니다. ‘순종적’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 같은 선입견입니다. 아닌 걸 아니라고 끝까지 따지면 ‘너 같은 동양 여자애 처음 봤다. 왜 이리 시끄럽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럼 전 반박하죠. ‘도대체 몇 명의 동양 여자랑 일해봤니?’ 하고요.”

그가 부딪힌 또 하나의 편견은 “한국은 카피나 제조는 잘하지만 창의적이고 유니크한 명품은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활동하며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한국은 카피천국’ ‘한국 디자이너들은 기술은 좋지만 창조성은 부족하다’는 편견을 품은 사람들이요. 그럴 때마다 제가 남들과 다른 백그라운드를 가졌기 때문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서양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함과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의심을 품게 하는 남다른 시각을 줬고,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시절 배운 스무 과목 넘는 교육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게 했어요. 저만의 비밀병기인 셈이죠.”

그는 뒤늦게 어학연수를 떠나서 외국어를 현지인처럼 유창하게 하진 못한다. 하지만 이를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옷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이니까.

“초·중·고를 모두 서울에서 나왔고 열심히 공부해서 치열하게 입시시험을 치르고 원하던 대학에 입학해 평범한 대학 시절을 보냈어요. 엄마는 쿨하지만 또 한국 엄마세요. ‘멋지게 네 인생을 살아라’ 하다가도 종종 ‘좀 안정적으로 편안하게 살면 안 되겠니’라고 말하시죠.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여자라고 손해 보지 말고 어디 가서든 당당하게 너의 주장을 말해라’ ‘기죽지 말아라’ 같은 말씀도 자주 해줬어요. 싫은 걸 싫다고 말하고, 좋은 걸 좋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엄마의 영향이 크죠.”

브랜드 이름 ‘유나’도 어머니가 그를 부르던 애칭 “윤아”에서 따왔다. 유나양의 부모는 그가 뉴욕에서 성공한 디자이너가 되고 나서도 딸의 쇼에 단 두 번밖에 방문하지 않았다. 주변에 딸의 성취를 호들갑스럽게 알리지도 않았다. “어디서든 너 하고 싶은 걸 해라”는 가르침과 “너의 성취에 우리가 숟가락 얹지 않겠다”는 부모의 쿨한 태도는 유나양이 뉴욕 컬렉션에서 일찌감치 주목을 받고도 ‘스타병’에 걸리지 않고 꾸준한 성취를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뉴욕 사교계 성공의 기준 세 가지
북촌 한옥마을에서 연 유나양의 2021 컬렉션 〈피어리스 - 두려움 없이〉.

2010년 유나양이 《WWD(우먼즈웨어데일리)》에서 “확실한 승리자”라는 평을 받으며 뉴욕패션위크에 데뷔했을 때 그의 삶을 태운 롤러코스터는 가파른 능선을 타고 출발했다. 리즈 위더스푼의 〈워터 포 엘리펀트〉 영화 홍보 의상 제작을 제안한 폭스영화사 부사장 줄리아 페리는 그에게 물었다.

“평생 롤러코스터 탈 준비 됐어?”

“그 순간 ‘아! 그렇구나 내가 브랜드를 포기하지 않고 컬렉션을 발표하는 한 내 인생은 롤러코스터구나,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인생의 불안정함을 즐기기로 했어요. 뉴욕 사교계에는 성공의 세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 명사들만 입장이 허용되는 클럽에 초대받아야 한다. 둘째, 영화 프리미어에 초청받아야 한다. 셋째, 메트 갈라에 참여해봐야 한다. 안정적인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재미있는 조건들이죠.”

유나양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경험해 뉴요커 기준의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메트 갈라는 패션계의 오스카라 불리는 가장 큰 행사다. 유나양은 이 무대에서 일론 머스크의 어머니이자 시니어 모델인 메이 머스크에게 직접 디자인한 옷을 입혔다. 메이 머스크는 자신을 세상에 알린 세 가지 중 한 요소로 유나양을 꼽기도 했다. 유나양의 디자인에는 항상 메시지와 뮤즈가 있다. 그를 세상에 알린 첫 번째 컬렉션부터 그랬다.

“저는 패션은 ‘인간과 사회의 대화’라고 믿습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호흡하고 사회 이슈를 컬렉션으로 풀어내는 사람이 패션디자이너죠. 항상 세상의 변화에 촉을 세우고 패션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2010년 데뷔쇼의 뮤즈였던 메리 루이스 브룩은 1920년대 산업혁명기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 아이코닉한 여성입니다. 뱅헤어를 처음 시도했고, 배우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댄서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어요.”
북촌 한옥마을에서 연 유나양의 2021 컬렉션 〈피어리스 - 두려움 없이〉.

데뷔 무대로 주목받기도 쉽지 않지만, 이후 꾸준히 컬렉션을 지속하는 건 더 어렵다. 유나양은 10년간 이어온 자신의 컬렉션을 ‘여성을 위한 컬렉션’이라고 설명한다. 시대를 상징하는 뮤즈들도 컬렉션의 주제이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주제도 컬렉션 무대에 올린다.

2011년 컬렉션에는 1960년대 미국의 주부들을 주제로 〈마이 블랙 웨딩드레스〉를 선보였다. 여성 운동이 일어나기 전, 사회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슬픔을 그렸다. 2015년 컬렉션은 무기 소지 반대를 주제로 〈Hunting without guns〉를, 2016년에는 냉전시대 이후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인 한국의 평화를 기리는 주제로 〈No Borders-Peace Collection〉을, 2018년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파리기후조약 탈퇴에 반대하며 아름다운 지구를 지켜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한다는 주제로 〈Save the Earth〉 컬렉션을 발표했다. 2020년에는 〈You’re beautiful〉 컬렉션을 올려 “인종, 출신 등에 관계없이 우리는 모두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2021년 한국에 돌아와 〈피어리스(fearless)〉 컬렉션을 올렸다.

“아시아 혐오 문제가 심각하잖아요. 차별과 편견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은 마음을 담았죠.”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피어리스〉 컬렉션은 그에게도 난산이었다. 매번 컬렉션의 목표는 하나, “이전보다 나은 컬렉션을 만들자”는 것. 때문에 그의 최고의 컬렉션은 항상 ‘다음’ 컬렉션이다.

“한국 출신이라 그런지 한국을 주제로 한 컬렉션을 발표하려니 유난히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정말 잘하고 싶었고요. (동명의) 에세이도 출간했는데 못하면 어쩌지 걱정도 많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국의 미, ‘백자’의 아름다움인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을 컬렉션에 담아내고 싶었어요. 명상과 독서를 통해 욕심을 버리고 비워내는 훈련을 몇 달간 하고서야 컬렉션 디자인을 시작할 수 있었죠.”

디자인을 구상하는 동안은 세상과 단절돼 지낸다. 극기의 시간이다.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와인도 마시지 않는다. 오직 정신을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 숨바꼭질 같은 시간 동안 자기 최면을 건다. ‘결국엔 나타날 거야, 지난 시즌도 그렇게 나왔지. 이번에도 잘할 수 있을 거야’ 하고. 그러다 보면 분산되었던 아이디어가 하나의 그림으로 합쳐진다. 구상이 끝나면 디자이너 유나양은 팀을 이끄는 리더 유나양이 된다.

“신은 모든 인간에게 적어도 꼭 한 가지의 재능을 주셨다고 믿어요. 누구나 능력이 있고 자신만의 필살기가 있죠. 그 능력을 뽑아내는 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자질이고요. 전쟁 같은 뉴욕패션위크도, 컬렉션도 저 혼자서는 할 수 없어요. 디자인 과정도 힘들지만 더 어려운 것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독려하는 거예요. 결국 팀워크가 성공의 키죠.”

그는 팀의 가장 막내, 말단 직원도 존중하고 배려한다. 상사를 두려워한다든지 성공에 대한 강박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않기를 바라서다. 그가 동시대를 사는 청춘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비슷하다. ‘누구처럼 되어야 한다’ ‘누구보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눈치 보느라 너무 자신을 다그치지 말라고.

“저는 학창 시절 한 번도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꾼 적이 없어요. 인생이 이렇게 달라질 줄 몰랐죠. 다만 나에게 주어진 미션 하나하나를 완수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내 소신에 맞지 않는 일인데 불안해서, 겁이 나서 하지는 않았어요. 너무 먼 목표나 거창한 기대를 하기보다 지금 내 앞의 사람, 지금 나에게 맞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뭔가가 달라져 있더라고요.”

그가 책을 출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책이 자기계발서나 성공기로 읽히길 바라지 않는다. 한국에 와서 주눅 든 청년들을 보면 그는 다가가 말해주고 싶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남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것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면 과감히 벗어던지고 자유를 얻어요. 그렇게 ‘두려움 없이(fearless)’ 앞으로 나아가세요. 인생은 당신도 나도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