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재료로, 강릉의 이야기를 담다

커피 도시로 유명한 강릉에 또 하나의 명물이 여물고 있다. 강릉 홍제동에 있는 수제 맥주 양조장 ‘버드나무 브루어리’.
맥주 애호가들의 호평을 받으면서 이곳 맥주를 맛보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SNS에는 이런 표현도 심심찮게 보인다.
‘강릉의 2대 명물 : 1. 테라로사의 커피 2. 버드나무 브루어리의 맥주’
버드나무 브루어리 뒤뜰에는 배롱나무와 대나무가 있다. 배롱나무는 강릉을 상징하는 꽃인 목백일홍을 피워내는 수목이고, 대나무는 강릉 오죽헌에 빼곡한 오죽의 한 갈래다. 둘 다 원래 있던 것은 아니었다. 2015년 9월에 문을 열면서 새로 심었다. 강릉만의 지역 색을 담기 위한 세심한 기획이다.

버드나무 브루어리의 요소 곳곳은 이런 식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엇 하나 튀지 않는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강릉 구도심인 홍제동 동네 색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오픈 5년 차, 이곳은 남다른 기획력과 수준급 수제 맥주로 로컬 크리에이터들의 성지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곳 수장인 이창호 대표는 먼저 양조장 구석구석을 안내했다. 실내 공간 외에도 뒤뜰의 야외 공간이 꽤 넓다. 많게는 300~400명까지 수용 가능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의 양조장 형식을 그대로 품고 있습니다. 저기 지붕 위 보이죠? 고두밥 만들 때 증기가 빠져나오던 곳이에요. 강릉 지역 네 곳의 양조장이 강릉연합탁주로 운영되다가 1970년대 이곳으로 이사 왔습니다. 줄곧 명맥을 이어오다 2014년에 문을 닫고, 이듬해 버드나무 브루어리로 재탄생했습니다.”

공간의 틀은 그대로, 지역 콘텐츠 색을 입혀 개성 강한 수준급 맥주를 내는 곳, 버드나무 브루어리 시작의 큰 틀이다. 이곳이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데는 수제 맥주도 맥주지만, 시간을 품고 있는 오래된 공간이 주는 독특한 감성 덕이 크다. 그 시절의 서까래와 까만 나무 틀, 우둘투둘한 시멘트벽의 질감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은 단순히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넘어 생경한 미학을 선사한다. 독특한 박물관에 온 느낌이랄까.


미노리, 즈므, 하슬라, 대굴령… 강릉식 이름들

버드나무 브루어리에 들어선 순간 눈길을 확 끄는 건, 오크 배럴에서 숙성 중인 맥주들이다. 고객이 앉아서 쉬는 공간보다 맥주가 익어가는 공간이 더 넓어 보인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규모는 11만 리터. 지난해에는 강릉시 성산면에 대규모 맥주 공장을 개설했다. 성산면 공장에서 생산되는 맥주는 이곳의 다섯 배 규모인 54만 리터에 달한다. 홍제동에서는 BABABA(Barrel Aged Brett And Berry Ale) 등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수제 맥주를 만들어내고, 성산면 공장에서는 주로 전국으로 유통되는 병맥주를 생산한다.

BABABA는 대규모 공장 유통 맥주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맥주의 신세계다. 신선한 오디를 첨가해 프랑스 샤르도네 와인 배럴에서 숙성한다. 풋사과 향이 확 올라오면서 새콤한 맛이 강하다. 이 대표는 “한 해 2500병밖에 출시되지 않아 이곳에서만 판매하려 한다”고 했다.

이곳 맥주는 지극히 강릉적이다. 미노리 세션, 즈므블랑, 하슬라 IPA 등의 맥주 이름은 얼핏 보면 외국 이름 같지만 아니다. ‘미노리’는 쌀을 생산하는 강릉의 지역명이고, ‘즈므’는 해가 지는 마을을 뜻하는 고어(古語)다. ‘하슬라’는 강릉의 옛 지역명으로 ‘큰 바다’라는 뜻의 순우리말. 강릉 단오제 때는 창포를 넣어 ‘창포 에일’을 만들고, 추석 즈음엔 강릉에서 재배한 생홉을 넣어 ‘하비스트 에일’을 만든다. ‘대굴령 페일에일’도 있다. 대관령 고개가 하도 험해서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고르는 고개’라 하여 붙인 이름에서 따왔다. 싱그러운 풀 향과 스파이시한 향이 가득한 개성 강한 맥주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부터 동네 사람을 주제로 ‘우리 동네 히어로’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1대 헌정 맥주는 ‘박영순 에일’이다. 홍제동에서 50년 넘게 살면서 지역사회를 위해 묵묵히 봉사해온 인물이자, 강릉탁주에서 근무한 적도 있는 박영순 홍제동 3통장이야말로 이 동네의 얼굴이 될 자격이 있다고 봤다. 박영순 에일에는 박 통장이 좋아하는 홍시에서 영감을 얻어 곶감을 넣어 만들었다. 헌정 맥주 수익금은 지역 주민을 위한 ‘홍제 케어’에 기부했다.

‘책맥’도 진행한다. 책과 맥주의 준말로, 매달 테마를 정해 책을 추천한다. 봄이 만개하는 4월에는 ‘식물’, 가정의 달 5월의 주제는 ‘가족’이 책맥의 주제였다. 5월 추천 도서 리스트를 보면 《우리 가족은 꽤나 진지합니다》(봉태규)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이슬아)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강창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김하나·황선우) 《새벽의 약속》(로맹가리)이 올라와 있다.


우리 동네 히어로 맥주

이창호 대표는 오픈 이듬해인 2016년에 합류해 지난 7월 대표이사가 됐다. 그전까지 이곳은 전은경 대표가 이끌었다. 여행기자 출신의 전 대표는 서울의 한 양조 교육기관에서 만난 동료들과 “한국적 맥주를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고, 뜻이 맞는 동료들은 로컬 브랜드로 키우기에 적합한 곳을 찾아 제주도 등 전국을 다녔다. 전통 양조장의 스토리가 녹아 있으면서 지역 축제가 수시로 열리는 강릉이야말로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이곳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놓은 전 대표는 또 다른 꿈을 찾아 도전에 나섰다.

버드나무 브루어리의 시작을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이창호 대표는 이곳의 의의와 스토리를 잘 안다. 그는 “지역과 상생, 공생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게 목적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꾸준히 해당 기획을 실천해온 덕에 이곳의 가치를 알아보는 지역민들이 늘고 있다.

“초창기에는 외지 방문객이 더 많았습니다. 인스타와 블로그에서 핫플 관광지로 소개되면서 주로 여행차 오신 분들이었죠. 하지만 ‘강릉 맥주’로 자리 잡으면서 지역민들이 늘고 있습니다. 요즘엔 외지인과 관광객의 비율이 반반 정도 돼요. 강릉 분들이 ‘우리들이 키우는 맥주’라는 공감대를 가진 덕분입니다.”

성산면의 맥주 공장에 대한 인식 추이도 비슷하다. 처음에는 “주변에 학교도 있는데 무슨 술 공장이냐” 하며 반대하던 주민들이 이제는 “우리 강릉을 알리는 맥주”라며 우호적이 됐다.

이 대표는 로컬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많다. 지역의 콘텐츠로 지역과 협업하면서 시너지를 내는 것이 로컬의 역할이라고 본다.

“강릉 시민들이 사랑하고, 강릉에서 사랑받는 맥주가 되어야만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어요. 이 공간도 강릉 분들이 먼저 사랑해주시는 곳으로 꾸려나가려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지역이 원래 품고 있던 낡고 오래된 것들의 가치를 지켜나가면서 상생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