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프로메테우스의 역할을 닮았다

사막여우와 북극여우의 생김새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사진은 진화생물학을 설명하는 최고의 자료 중 하나다. 뾰족한 귀에 황갈색의 짧은 털이 도드라지는 사막여우와, 작은 귀와 풍성한 흰 털을 가진 북극여우는 사막과 설원이라는 각자의 서식지에서 살아남기 위한 모습으로 진화해서 같은 종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모습을 하게 되었다. 환경에 용이한 모습으로 제 모양새를 발달시키는 것이 동물들에게는 꽤나 당연한 일인데도, 여전히 둘을 비교한 사진을 보면 신기하다. 

하지만 더 신기한 일은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외관상 드러나는 인종적 특징의 변화와 차이는 여타 동물들과 다를 바 없지만 그 속의 알맹이, 개성이 가진 다양성과 변화무쌍함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만약 우리의 개성이 철저히 환경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라면, 같은 지역에서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내는 아이들은 모두 비슷한 사람으로 자라나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교실마다 얼마나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모두가 도보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작은 반경을 전부처럼 여기며 살아감에도 어떻게 차이가 발생했는지 추적해보고 싶어진다. 분명 같은 길을 걸어 다니며 비슷하게 보고, 듣고, 먹는 것 같은 환경적 요인 이상의 것이 숨어있는 것이다.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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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학원의 아이들을 보며

나의 체험담을 꺼내보려 한다. ‘대한민국 아이들의 8할은 피아노 학원에 다녀본 적 있다’라는 말이 인터넷을 돌아다닐 정도로, 피아노 레슨은 대표적인 방과 후 활동이다. 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등록하는 부류만큼, 한쪽에서는 악기 연주가 아이를 얌전하게 만들어준다는 이야기에 의해 억지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 어쨌거나 쉬는 시간에 학원을 주제로 한 대화가 끊일지를 않았다. 언젠가 한번은 친구들이 모두 다니니 호기심이 생겨서 전단지를 받아 본적이 있었다. 전단지에는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재능을 깨울 수 있다며 모차르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과장 광고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음악 수업을 학교에서 받기 시작하며서 생각이 달라졌다. 학원에서 착실히 연습을 해오던 친구들은 다양한 악기를 수준급으로 척척 다루고, 심지어 억지로 학원에 끌려간 친구들조차 악보를 읽고 기본적인 연주를 소화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다들 아무리 작은 성취여도, 칭찬받고 응원 받다 보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착실히 연습한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좋아했는지를 떠나서, 제 실력을 학원과 학교 양쪽의 선생님들에게 인정받고 부모님의 지지까지 받은 아이들은, 내내 실력을 유지하며 오케스트라 같은 활동에도 부지런히 참가했다. 여전히 그 친구들이 악기를 다루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애정과 재능이 넘쳐났음을 기억한다. 어쩌면 전단지의 문구가 어느정도 맞는지 모른다. 

따라가는 것조차 벅찼던 내 처지와 비교해보면 더욱 비교됐다. 연주할 줄 아는 악기가 전무한데다 악보도 못 읽는 상태로 들어간 교과수업의 결과는 참담했고, 결국 쉬는 시간마다 남아 따로 온갖 꾸중을 들으며 연습하는 처지에 놓였던 나와 다른 아이들은, 고학년이 되서도 늘기는 커녕 비슷한 실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악기라면 진절머리나게 된 것은 덤이다. 

그러다 한번은 방과 후에 교정을 돌아다니다 오케스트라부실 앞을 지나가다가 친한 친구가 부원들과 연습하고 있어서 몰래 숨어서 그 모습을 조금 지켜봤다. 그 친구는 언제나 지도 선생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기에, 수업 광경이 궁금했다. 짧은 곡조가 끝나자 선생님의 칭찬과 모두의 웃음이 가득 찼다. 다음 곡이 시작되자, 어쩌면 나도 저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놀라 서둘러 자리를 떴다. 

꾸준한 재미를 느끼는 환경의 중요성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을 나서서 학교에 가고, 방과 후에 새로운 경험을 하며 저마다 다양한 분야 속 자신의 잘함과 못함, 좋고 싫음을 자각한다. 그리고 그 재능과 기호를 만드는 것은 결국 어른인 것이다. 마치 서두에서 언급했던 여우의 생김새를 만든 주변 기후처럼 말이다. 

가령 축구를 하는 법을 단편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면 그 종목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해, 재능을 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열정을 쏟게 만들어야 한다고 하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거대한 과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는 그다지 어려운 과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들은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고 주변 어른들의 격려를 받는 것만으로도 후자를 거뜬하게 성취해내곤 하기 때문이다. 이는 반대의 상황에도 적용된다. 재능의 유무를 떠나서 마련된 환경이 꾸준하고 즐거운 배움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어떤 수확도 기대할 수 없다. 

즉 어른들의 ‘가르쳐야 한다’는 임무는,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는 것보다 그것을 아이들이 받아들이도록 조율하는 것에 중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본다. 둘 중 더 오래가는 것도 단연코 후자이고 말이다. 그래서 어떤 형태이든 교편을 잡고 아이를 지도해야 하는 모든 어른들은, 자신의 가르침이 가진 색이 향후 아이의 인식에 오래, 또는 영원히 남을 수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가르침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형태로든 개성을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면에서 나는 어른들에게서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을 본다. 프로메테우스는 날카로운 발톱과 큰 날개 등 생존을 위한 훌륭한 특징들을 만물에게 골고루 배분해 주었다. 덕분에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각 동물들은 그곳에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잊고 있었던 인간의 존재를 기억해낸 프로메테우스는, 어떤 생존의 방법도 없는 인간들을 책임지기 위해 신의 불을 훔쳐냈고, 그 벌로 산에 묶여 영원히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게 된다. 

아이들이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어른들이 가르치고, 칭찬하며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반면 그것을 박탈해갈 수 있는 것도 다름이 아닌 어른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 아이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어른이라면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엄중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당신의 아이는 야생에 알몸으로 쫓겨나 발톱에 찢기게 될 터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