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함께 보내는 건 처음이라서

 

저는 워낙 시류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사람들이 제가 하는 말을 듣고 ‘꼰대 같다’고 해도 어쩔 수 없죠.

이제 40대 후반이고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포기할 마음은 없으니까요.

(장강명)

누군가의 인생책을 함께 읽는 일은, 그의 인생을 함께 살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취향과 기호와 호흡을 함께 읽어보는 일이다. 책을 읽는 건 이미 타인의 삶과 생각 속으로 들어가보는 일인데, 누군가 추천해준 책을 함께 읽는 일은 이중 체험이다.
한 번은 화자의 삶을, 또 한 번은 추천인의 취향을 경험한다. 나의 취향이라면 가보지 않을 세계도, 덕분에 발을 디뎌본다. 상대에 대한 신뢰에 기반해서.

두 사람이 서로의 파트너가 된 지는 20년이 넘었다. 김혜정 대표의 직주근접성을 고려해 신도림에 살던 두 사람은 얼마 전 수원 광교 호수공원 인근으로 거처를 옮겼다. 호수가 보이는 호젓한 곳에서 두 사람은 한 공간을 집이자 작업실로 나누어 쓴다. 처음엔 걱정했다. 24시간을 함께 붙어 지내보는 건 처음이라서.

“만약 거실에서 TV를 보거나 영상을 보고 있었다면 상대가 거슬릴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각자 방에서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거든요. 그러다 거실에서 가끔 마주치는데 그러면 반가워요. 마치 사무실 탕비실에서 만난 느낌이에요. ‘잘 돼가?’ ‘응, 너는?’ 정도의 대화를 나누고 다시 돌아와서 일을 계속하죠.”(김혜정)

장강명 작가는 전업 작가가 되면서부터 집을 작업실로 썼다. 살림도 도맡아 했다. 매일 청소하고 주말에는 대청소를 하는 덕분에 집은 늘 쾌적하고, 나무도 달팽이도 무럭무럭 자랐다.

그는 최근 장편소설 《재수사 1,2》를 펴냈다. 총 820쪽, 200자 원고지 3000장을 썼다. 22년 전 신촌에서 발생한 미제 사건을 20대의 형사가 현재 시점에서 다시 파고드는 내용을 범인의 진술과 번갈아 편집했다. 살인을 저지른 범인의 말과 그의 과거와 현재를 좇는 형사의 발은 어느 순간 교차된다. 이 팽팽한 글의 장르는 범죄스릴러지만 살인자의 심리를 파헤치는 철학소설 같기도 하고, 현재의 형사 사법 시스템의 맹점을 분석하는 르포르타주 같기도 하다. 또 형사들의 피땀 눈물이 담긴 2022년 버전 〈수사반장〉 같기도 하다. 꽤 두텁고 묵직한 두 권의 책이지만 분량이 줄어드는 게 아까운 느낌이다. 지금껏 장강명 작가의 소설이 그러했듯.

“쓰기 시작한 건 3년 정도 됐어요. 중간에 반전이 떠오르지 않아서 다른 작품을 먼저 출간하기도 했어요. 구도도 정해두고 범인도 어느 정도 특정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가 막히는 순간이 있었거든요.”(장강명)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고백을 시작하기에도 그보다 더 좋은 문장은 없을 것 같다. 나는 22년 전에 사람을 죽였다. 칼로 가슴을 두 번 찔러 죽였다. (중략) 살인자인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삶의 의미와 윤리적 지침이 필요하다. 아니, 살인자이기에 더욱더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해줄, 강하고 남다른 도덕적 중심을 원한다.

- 장강명, 《재수사》 중

 

이 책 작가의 말은 “무엇보다 이 글을 쓰며 헤매는 동안 저를 지켜주고 응원해준 제 아내, 김혜정 그믐 대표에게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맺는다. 소설가의 아내는 그가 쓴 모든 글을 가장 먼저 읽을 특권을 갖는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베이커리에 들어가기 전에 갓 구워진 상태의 빵을 맛볼 수 있다”.

“처음에는 글에 대한 감상을 가감 없이 이야기했어요. 좋은 이야기는 누구나 해줄 수 있지만 지적은 아무나 못 하잖아요. 정말 위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 표정이 안 좋아지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요즘은 좀 자제하고 있어요. 만약에 제가 장강명 작가와 모르는 사이였더라도 저는 그의 글을 좋아했을 거예요. 저는 이렇게 속도감 있는 글을 좋아하거든요.”(김혜정)

“저는 대부분 녹초가 된 상태인데 작품이 나온 뒤에 인터뷰, 홍보, 강연, 만남 등을 하고 나면 더욱 녹초가 돼요. 책이 나왔는데 책을 알리려면 홍보에 최선을 다해야 하거든요. 작가가 된 뒤 배운 점 중 하나는 무슨 이야기를 듣든 그게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과 마케팅 마인드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장강명)

“장강명 작가는 저에게도 ‘글을 써봐라’는 제안을 자주 해요. 저는 쓰는 일은 제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읽는 사람이고 쓰는 건 다른 영역이라고 여겼죠. 또 우리 사이의 어떤 이야기들이 장강명 작가를 통해 이미 작품으로 나오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저도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안 해봤으니 해봐라’ 하고 제안하잖아요. 그런데 쓰는 일에 대해서는 머뭇거리는 게 뭐가 안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믐’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과정을 글로 남겨보면 어떨까 하고 있어요.”(김혜정)

장강명 작가는 이미 숱하게 문학상을 받았고, 많은 책을 냈다. 하지만 그를 ‘유명’ 작가로 만들어준 건 《한국이 싫어서》였다. 논쟁적이 되리라 생각한 작품은 의외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두 사람은 평소 엄청 많은 대화를 나누는데 김혜정 대표의 말은 장강명 작가 작품의 모티프가 된다. 결국 그가 유명해진 데에는 김 대표의 입김이 작용한 셈이다. 11년 차 기자가 소설가로 등단했다는 사실, 그가 여러 문제적 소설로 문학상을 휩쓸었다는 소식은 언론에서도 화제가 됐다. 언론 보도, 문학상 수상, 독자와의 만남과 여러 강연과 방송 출연…. 작가로서 그는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린 건 입소문이었고, 이들은 ‘진짜로 책을 읽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의 힘을 알고 있다.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지명이가 그런 애야. “내가 난관을 뚫고 기자가 되었다”는 기억에서 매일 행복감이 조금씩 흘러나와.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 거야. …여기까지 생각하니까 갑자기 많은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하더라고. 내가 왜 한국에서 살면 행복해지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중

 

“《한국이 싫어서》의 배경이었던 2004년 당시 저는 희망이 없었어요. 아현에서 삼성까지 2호선 지옥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다 보면 미래가 있을까 싶었어요. 그때만 해도 상사들이 여직원에게 블루스를 추자고 하거나 차 심부름을 시키는 일이 흔했거든요. 여기선 안 되겠다 싶어 호주에 갔는데 제가 제일 놀란 게 화장실에 휴지가 있는 거였어요(웃음). 이곳은 세금을 시민을 위해 쓰는구나, 선진국이구나 싶더라고요.”(김혜정)

그리고 4년 뒤 한국에 돌아오니 한국 화장실에도 휴지가 놓이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의 강점 중 하나는 변화가 시작되면 급물살을 탄다는 것이다. 여성을 대하는 의식도 달라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한국 사회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기보다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믐’은 그 일환이에요. 누군가에게 ‘영상만 보지 말고 책을 좀 읽어봐’라고 말하는 게 지금 시대에 안 맞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저는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저항하고 싶어요. 책 읽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정말 세상은 암흑이 될 거라 생각하거든요. 지금의 대세, 큰 흐름에 맞지 않더라도 레지스탕스처럼 달려보려고요.”(김혜정)

“저는 워낙 시류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사람들이 제가 하는 말을 듣고 ‘꼰대 같다’고 해도 어쩔 수 없죠. 이제 40대 후반이고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포기할 마음은 없으니까요. 얼마 전에 방송인 이윤석 씨가 록밴드를 만들었다는 기사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록음악을 듣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후배 장례식에서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뭔지’를 생각하다가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장강명)

장강명 작가가 지금도 즐겨 듣는 음악은 마릴린 맨슨의 3, 4집이다. 글을 쓰다가 힘들면 앨범을 꺼내 듣는다. 샤이니를 좋아하는 김혜정 대표의 취향과는 다른 점이 있다. 하지만 둘은 서로의 취향을 존중한다. 장강명 작가는 가끔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갈 때 샤이니 멤버의 사진을 은밀히 내민다. 헤어 디자이너는 고개를 갸웃하지만, 아내를 향한 은은한 사랑 고백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매년 12월 31일, 그러니까 섣달그믐이면 과메기에 레드와인을 먹는다. 평소엔 맥주를 즐기지만 이날은 와인을 마신다. 과메기의 뒷맛을 잡아줄 수 있는 건 레드와인이고, 이 조합은 꽤나 잘 어울린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후의 본 행사다. 두 사람은 매년 ‘유서’를 쓴다. 유서에는 예적금 얼마, 보험금 얼마는 어떻게 처리하라는 실제적인 내용부터, 올 한 해 우리가 이런 일을 했고 이런 의미가 있었고 이런 점이 달라졌다는 담담한 고백도 있다. 

“매년 하다 보니까 서로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됐어요. 내용도 꽤나 구체적이고요. 우리 자산이 얼마나 늘었는지, 올해 가장 뜻깊은 일은 뭐였는지 곱씹어보는 시간이 됩니다.”(김혜정)

“주의해야 할 점은 문서로 남기는 동시에 꼭 녹취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나중에 법적 효력이 있거든요.”(장강명) (일동 웃음)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온다”고 김혜정 대표는 ‘그믐’을 소개하는 글에 적었다. 이들은 ‘책을 읽는’ 이들이 어둠을 물리칠 것이라고, ‘책을 쓰는’ 이들이 사회를 바꿀 것이라고 믿는다. 조용하고 단단한 혁명이다.

20대에 서로를 알아본 이들은 20년이 지난 오늘도 서로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연인이자 동료다. 무엇보다 지독한 독서광에 애틋한 애서가라는 게 두 사람을 더욱 단단하게 묶어준다. 둘의 이야기는 소설이 되고 에세이가 되고 칼럼이 되고 또 ‘그믐’이 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사라지지 않고 살아지면, 이렇게 많은 열매가 맺힌다. 

 

《즐거운 자전거 생활》 후기에는 저자와 편집자가 책을 쓰게 된 과정이 나와 있다. 편집자는 저자와 술을 마시면서 “자전거는 혁명이다, 당신은 이 혁명을 이끌 책을 꼭 써야 한다, 인간과 미래를 위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발명된 지 200년도 넘은 자전거가 혁명이고, 미래는 자전거의 세상이라니, 황당하다면 황당한 소리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울컥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 책 후기를 읽다가 ‘미래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됐다. 미래는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가 선택하고 만드는 것이다. ‘자전거가 중심이 되는 사회’를 바라고 준비한다면 그런 미래가 온다. 쉽지는 않겠지만.

- 장강명, 《책 한번 써봅시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