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이루어주는 서점

정현주 

쓰는 사람이자 서점 운영자. 20여 년간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MBC 〈옥주현의 별이 빛나는 밤에〉 〈테이의 꿈꾸는 라디오〉, KBS 〈최강희의 야간비행〉 〈장윤주의 옥탑방 라디오〉 등과 함께했다. 사랑 연작 《다시, 사랑》 《그래도, 사랑》 《거기, 우리가 있었다》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스타카토 라디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등을 썼다. 고려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 끝자락에 있는 3층짜리 아담한 ‘서점, 리스본’. 이 서점 마당에는 연리지 감나무가 자란다. 다른 존재로 태어난 두 그루의 감나무는 내내 서로를 바라보다 결국 하나가 되었다. 감나무 아래에는 쪼개진 나무를 유리타일로 애써 붙인 나무판이 걸려 있는데, 서점지기 정현주 대표는 여기에 흰색 분필로 이렇게 적었다. 

“깊어져요, 우리. 시간과 함께 낡아지지 말고.” -《그래도, 사랑》 91쪽

정 대표는 이 책의 저자다. 20년 동안 그는 프로그램을 맡기만 하면 청취율이 오르는 인기 라디오 방송작가로 살았다. 그가 천착하는 주제는 사랑. 누군가를 죽을 만큼 사랑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검은 우물 같은 슬픔과 눈먼 환희를 지적이면서도 공감대 넓은 언어로 길어 올렸다. 20만 명 이상이 읽은 《그래도, 사랑》에 이어 《다시, 사랑》 《거기, 우리가 있었다》 등 사랑 3부작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책은 사랑앓이로 방향을 잃은 이들에게 한편으로는 따스한 위로를, 또 한편으로는 냉철한 조언을 건넨다. 화가 김환기와 아내 김향안의 실제 사랑의 흔적을 더듬어서 쓴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는 이상적인 사랑을 갈망하는 많은 이들을 파리로 향하게 했다. “사랑은 지성이다”라는 책 속 문장을 지상 명제처럼 새기면서. 

서점 리스본을 찾은 손님들은 연리지나무 아래서 소원을 빌고 간다. 소원은 다 다르다. 누군가는 사랑을 찾게 해달라고, 또 누군가는 짝사랑이 이뤄지게 해달라고, 지금 사랑하는 연인들은 이 사랑이 영원하게 해달라고…. 얼마 전엔 서점 나무에 소원을 빌고 간 손님이 찾아와 말했다. 사랑을 시작했다고, 이제 사랑을 알 것 같다고. 
정 대표는 웃으며 화답했다. 
“본래 알고 계셨어요.”

서점 리스본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동네서점으로 종종 회자된다. 손님들에게도 그렇거니와 서점지기 사이에서도 명성이 높다. 불가능에 가까운 서점지기들의 로망을 현실화한 곳이기 때문. 바로 ‘책만 팔아서 운영하기’다. 그는 20년간 방송작가로 쌓은 노하우를 서점에 아낌없이 녹여냈다. 

정현주 대표와 인터뷰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자꾸 눈길이 가는 사람이었다. 3년 전 단독주택을 개조한 서점 리스본 본점을 찾았을 때도, 2년 전 동네서점에 정통한 이와 함께 2호점인 이곳을 찾았을 때도 나오면서 왠지 뒤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가 유명 방송작가 출신이라는 건 한참 후에나 알게 되었다. 예상대로 그는 인터뷰 요청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자신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보다 서점이 빛났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어렵사리 성사된 인터뷰 당일 서점 리스본은 비현실적인 공간처럼 느껴졌다. 늘 그랬듯. 

 

중요한 건 브랜딩 작업이에요.

많은 동네서점이 소상공인이라고만 생각하고

브랜딩에 신경을 잘 쓰지 않아요.

좋은 책만 가져다놓으면 팔릴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절대 아니거든요.

저는 라디오 방송작가를 하듯 책방을 운영해왔어요.

서점을 나의 DJ라고 생각하고 이 사람을 캐릭터화하는 과정을

꾸준히 해온 거예요.

여기에 오면 딴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을 받아요. 동행한 지인도 다른 세상에 초대받은 느낌이라더군요.
“하하. 많이들 그렇게 말씀하세요. 가끔은 저도 그렇게 느껴요. 며칠 전엔 2층 창문에서 1층을 내려다보는데, 파라솔 의자에 앉아서 책 읽는 손님들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어요.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여서 책을 읽는 사람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또 있을까요.”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에 대해 사색하고 탐구하고 글을 쓰면 사랑의 본질에 다가서는 느낌이 드나요?
“그렇진 않아요. 관계가 다시 보이는 것 같긴 해요. 사랑보다 사람이 보인다고 할까요. 사랑은 사랑대로 있는데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요. 사랑이라고 하지만 사랑이 아닌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질투나 집착 같은. 이런 것들을 사랑의 범주 안에 넣는 건 반대해요.”

사랑은 사랑대로 있다니요.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맑고 깨끗한 상태로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 같거든요.”

그 지고지순한 경지에 가 닿으려면 우리는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 걸까요.
“사랑은 혼자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이 과연 그걸 맞춰줄 수 있는지도 중요하죠. 그런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고, 만났다고 해도 평생 같이 가기 어려운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때마다 배우는 것 같아요. 사랑하면 내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 해 줬으면 하는 걸 안 해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하지 마세요’ 해도 계속하고, ‘멈춰주세요’ 해도 멈추지 않는.”

“많이 사랑하는 것보다 잘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는,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의 한 문장이 떠오릅니다.
“많이 사랑하는 건 되게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많이, 안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도 있어요. 상대가 나한테 과몰입한다는 건 그 사람 안에 엄청난 공허가 있다는 얘기거든요. 그 공허를 내가 채워줄 순 없는 거예요. 선을 딱 긋고 ‘그건 당신 문제이니 당신 스스로 해결하고 와야 된다, 나를 통해 해결하려 하지 마라’고 분명히 할 필요가 있어요.”

01, 02_ 서점 리스본 외관. 1층은 일반 서적과 ‘이달의 비밀책’ 등이, 2층에는 ‘생일책’이 진열돼  있다. 3층은 정현주 대표의 작업실이다. 마당에는 연리지 감나무와 작은 대나무숲, 사랑을 전하는 빨간 공중전화부스가 있다. 책을 구입하면 1층 파라솔과 2층 테이블에서 조용히 읽을 수 있다. 03_ ‘이달의 비밀책’. 책 속 한 문장을 손글씨로 적어둔다.
01, 02_ 서점 리스본 외관. 1층은 일반 서적과 ‘이달의 비밀책’ 등이, 2층에는 ‘생일책’이 진열돼  있다. 3층은 정현주 대표의 작업실이다. 마당에는 연리지 감나무와 작은 대나무숲, 사랑을 전하는 빨간 공중전화부스가 있다. 책을 구입하면 1층 파라솔과 2층 테이블에서 조용히 읽을 수 있다. 03_ ‘이달의 비밀책’. 책 속 한 문장을 손글씨로 적어둔다.

 

인스타 계정(@morningrain.hj)에 매일 사랑에 대한 단상을 쓰고 있지요. 읽고 있으면 고통이 전해져요. 이토록 예민한 성정을 가진 분이 불특정 다수가 드나드는 서점을 운영하면서 어떻게 견뎌낼까 하는.
“타인의 회복을 돕는 척하며 실은 무너진 나를 일으키고 있었는지 몰라요. 마주 앉은 사람을 일으키면서 나를 안아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린 시절에는 사람을 싫어했어요. 스스로를 폐하는 아이였던 것 같아요.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건 책밖에 없었어요. 그렇다고 우리 집이 문제가 있거나 하진 않아요. 누가 봐도 교과서적으로 좋은 환경이거든요. 제 친구는 그래요. 네가 사랑하지 않아도 부모가 너를 완벽하게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사랑에 반응하지 않는 아이였던 것 같다고. 아주 어릴 때부터 하루 종일 책만 읽었어요. 전집을 읽고 또 읽었죠. 책을 읽지 않아도 주변에 책이 늘 있어야 안정이 돼요. 마치 애착인형처럼.”

요즘도요?
“보세요. 가방 안에 책이 늘 이렇게 있어요. 한 권이라도 있어야 마음에 안정감이 생기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그야말로 애서가군요.
“저는 진짜 책을 좋아해요. 책을 만지고 있어야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읽지 않아도 책이 쌓여 있어야 마음이 편해요. 방공호 같다고 할까요.”

정 대표한테 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 통로? 최근에 탈고한 초고를 본 편집자가 저더러 그래요. ‘작가님은 사람도 책처럼 읽는 것 같다’고. 맞는 말이에요. 사람의 말과 행동과 상황을 보면서 마음을 잘 읽는 편이에요. 다만 상황에 개입은 잘 안 한답니다. 저를 잘 아는 친구는 저더러 연남동 우영우래요(웃음). 오랜 공부와 학습에 의한 결과니까.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사람에 대해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길은 결국 사랑 같아요. 연애도 열심히 했지만 이별에 서툴렀어요.”

이별을 잘하는 방법은 책에서 배울 수 없는 부분인가요?
“사랑과 이별에 대한 책을 많이 봤지만,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흔한 얘기가 아니잖아요. 보통의 인간관계는 결국 사람을 만나야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이별 후 저는 죽음을 경험했어요. 충격으로 쓰러지면서 뇌출혈이 왔고, 의사는 손상 없이 회복될 확률을 3%로 봤어요. 지금 이렇게 회복된 건 기적에 가까워요. 모든 걸 잃어보니까 알겠더군요. 나에게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이후 3년간 인생을 리셋했어요. 방송국 일을 접었고, 주변에는 진짜 의미 있는 사람만 남게 됐어요. 일을 접을 수 있었던 건 인세 수입 덕이 커요.”

서점 리스본이 시작된 건 그즈음이겠어요. 
“맞아요. 인세 수입이 많아지니 담당 에디터가 돈을 써야 된다며, 서점을 열어보라고 권했어요. 이 부근 아파트 상가 3층에 작은 작업실 겸 서점을 열었죠. 월세 60만 원짜리. 그림 그리는 친구와 반반씩 쓰기로 하고 서점 이름을 ‘드로잉북 리스본’으로 정했어요. 사랑에 도움이 되는 책 50만 원어치를 산 것이 리스본의 시작입니다.”

정현주 ‘서점, 리스본’ 대표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