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두면 의미 있는 클래식 음악가들 ③ 피아니스트 후지코 헤밍 1

노인으로 가는 길

노후의 삶을 그려본 적 있으신가요? 지금 당장은 먼 미래의 일만 같지만, 누구나 노인이 되지요. 저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분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가슴 아픈 경우도 많지만. 

현대 사회의 혜택을 받고 사는 우리는 상당수가 노인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태어나 살다 죽는다, 참 간단한 지구별의 규칙이지만, 요즘 전 그날이 천천히 다가왔으면 하는 엉뚱한 상상을 종종 합니다. 올해 열 살이 된 제 아들이 1년만 더 열 살이면 좋겠다는 생각, 일흔넷인 제 어머니께서 1년만 더 일흔넷으로 사셨다면 좋겠다고요.

지금 제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각자의 시간표대로 흐르다 보면, 결국 모두 헤어질 테니, 그 이별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늦추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마음이겠지요.

이렇게 삶에 끝이 있다는 걸 가끔 떠올려볼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을 어제보다 더 열심히 살고픈 마음이 불끈 솟아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살아보자, 하는 마음을 먹게 되더라고요.

물론 '결국 끝날 인생, 그리 열심히 살아 무얼할까?' 하는 마음도 존중합니다. 다만 저는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는 순간들은 분명 스스로를 단단하게 채워준다 믿고 사는 사람 중 한 명이거든요. 더 자주 웃고 바지런히 살아보려 노력 중입니다.

올해 구순(九旬)의 피아니스트 잉그리드 후지코 폰 게오르지-헤밍(Ingrid Fujiko von Georgii-Hemming, 1932~)도 삶에 대한 에너지가 넘치는 분입니다. 참 이름이 참 길지요. 줄여서 후지코 헤밍이라 부릅니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10대~20대 사이에 데뷔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지만, 후지코 헤밍은 무려 60대 후반에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연주자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전 세계를 무대로 연주 여행을 다니고 있는 현역 할머니 피아니스트입니다.

그가 선택한 노인으로 가는 길은 어린 시절부터 꿈꿨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파울로 코헬료의 《연금술사》 속 이야기처럼 온 우주가 그의 꿈이 이뤄지길 도와준 것만 같습니다. 그의 삶은 정말 순탄치 않았거든요. 한 편의 성장 영화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분입니다. 

피아니스트 후지코 헤밍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중 장면 일부입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피아니스트 후지코 헤밍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중 장면 일부입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아직 국내에서 익숙지 않은 후지코 헤밍의 삶을 소개하고자, 그의 홈페이지나 인터넷에 올라온 영문 기사까지 검색할 수 있는 정보를 찾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분이라는 생각이 더욱 더 확고해졌고요.

요즘 제가 즐겨보는 ENA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일명 '*고레카' 장면처럼 후지코 헤밍의 이야기를 통해 각자의 노후와 죽음에 대해 ‘짠’하고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겠다는 기분 좋은 모습도 그려졌습니다. 

60대에 데뷔해 90세 현역 피아니스트로 살고 있는 후지코 헤밍의 이야기를 통해 각자의 입맛대로 노인으로 가는 자신만의 길을 잘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사실 저도 노후에 대해서 촘촘한 계획을 세워둔 사람은 아니지만, 확실히 해가 갈수록 진지하게 생각해보려는 마음은 커지고 있습니다. 무언가에 막연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이 분명 있잖아요. 그의 눈물과 땀방울이 이룬 기적이 지금 여러분의 삶에 잠시라도 함께하길 바라봅니다.  

*고레카 : 고래와 유레카를 합성한 단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주인공 우영우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마다 고래가 등장하는데, 이를 두고 '고래 유레카', 줄여서 '고레카'라고 부른다.   

 

귀족과 부자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올해 상수를 맞은 피아니스트 후지코 헤밍은 60대에 정식으로 데뷔한 현역 할머니 피아니스트입니다. 아직도 매일 4시간씩 꾸준히 연습을 하면서, 연주회 준비를 합니다. 무대 의상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직접 바느질을 통해 의상도 제작하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올해 상수를 맞은 피아니스트 후지코 헤밍은 60대에 정식으로 데뷔한 현역 할머니 피아니스트입니다. 아직도 매일 4시간씩 꾸준히 연습을 하면서, 연주회 준비를 합니다. 무대 의상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직접 바느질을 통해 의상도 제작하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후지코 헤밍은 1932년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앞서 소개했던 그의 긴 이름에서 눈치채셨겠지만, 그는 귀족의 후손입니다. 유럽 분들의 이름표기 방식을 살펴보면 이름 자체가 한 권의 족보인 경우가 많습니다.

후지코 헤밍은 스웨덴의 귀족이자 스웨덴 왕의 법률 고문으로 활동하다 훗날 건축가가 된 프리츠 게오르기 헤밍(Fritz Georgii-Hemming)과 당시 일본에서 최초의 산업용 잉크를 생산, 판매하던 공기업 사장의 딸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토아코 오츠키(Toako Ohtsuki)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웨덴 귀족이고 어머니는 일본의 부잣집 딸이었던 거죠. 

후지코 헤밍의 부모는 독일 베를린의 예술대학에서 유학 중 서로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한 마디로 유복한 양가에서 태어난 아기였습니다. 하지만 후지코 헤밍과 2살 아래의 남동생 요시오 오츠키(Yoshio Otsuki)는 안타깝게도 화목한 가정에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이혼했거든요.

후지코 헤밍이 태어난 직후, 특히 독일은 급변한 정세가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히틀러가 수상 자리를 맡은 지 7주 후에 유대인 탄압 정책이 실시되었으니까요. 유대인은 기업을 운영할 수 없었고, 공무원으로 재직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악명높은 히틀러의 여러 범죄가 행해지지요.

1939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의 상황이 그려지시나요. 후지코 헤밍의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 가족은 독일 베를린을 떠나 교외의 작은 마을에서 숨어 살았을 정도였어요. 제아무리 스웨덴의 귀족이고 스웨덴 왕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야만 했거든요. 그나마 후지코 헤밍의 아버지가 큰돈을 주고 고용했던 비밀경찰들이 준 정보 덕분에 후지코 헤밍 가족은 안전하게 일본 도쿄로 이사 갈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후지코 헤밍의 남동생이 태어났는데요. 이 짧았던 기간 후지코 헤밍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만난 여성과 불륜을 저질렀고, 가정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당시 후지코 헤밍의 가까운 가족이 묘사한 바에 따르면 단 한 순간이라도 아버지의 폭력이 아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했다고 합니다. 아직 말도 다 못 배웠던 어린 두 아이보다 그들의 어머니가 가장 고통스러웠겠지요. 이런 일들로 인해 성인이 된 후지코 헤밍은 아버지를 끝내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요즘도 이혼 후 아이를 양육하는 문제는 쉽지 않습니다. 매달 양육비를 받아도, 혼자 자녀를 맡은 쪽은 힘들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행히 후지코 헤밍의 외가에서 어린 두 아이를 위해 경제적으로 지원했지만, 언제까지 지원에 의존할 수 없는 노릇이었겠지요.

당시 일본에서도 독일 유학파 피아니스트였던 그의 어머니는 이런 장점을 활용했습니다. 당시 도쿄의 중산층 자녀들을 대상으로 피아노 교습소를 열었는데요. 예상한 것처럼 개원 직후에는 상당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 기쁨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39년 세계2차 대전의 발발로 인해 당시 도쿄의 사람들 대부분은 생사의 갈림길에 노출되었으니까요. 

이때부터 후지코 헤밍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가정을 지키려는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전쟁이라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어떻게든 강하게 자식을 키우려던 그의 어머니를 따라야만 했을 테니까요. 

 

일본의 압구정동, 아오야마에서 어렵게 키운 꿈

후지코 헤밍은 10대 청소년기 중이염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왼쪽 청력에 장애가 생겼습니다. 처음 청력 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별 문제가 없는 정도였지만 스물 일곱 즈음 그의 청력은 최악의 상태로 나빠졌습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후지코 헤밍은 10대 청소년기 중이염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왼쪽 청력에 장애가 생겼습니다. 처음 청력 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별 문제가 없는 정도였지만 스물 일곱 즈음 그의 청력은 최악의 상태로 나빠졌습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후지코 헤밍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에서 초중고를 졸업했습니다. 그 시절부터 부촌이던 아오야마는 현재 우리나라의 압구정동 가로수 길과 비슷한 동네입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지만 후지코 헤밍의 어머니는 이 동네에 자리를 잡고 두 아이를 길렀습니다.

특히 후지코 헤밍이 가진 재능을 펼쳐주려 부단한 노력을 했는데요. 매일 4시간씩 직접 후지코 헤밍과 피아노 연습을 하는 등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 선생으로 가진 한계를 느꼈고요. 결국 자기 딸이 가진 재능의 만개를 도울 수 있는 또 다른 피아노 선생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던 중 후지코 헤밍의 어머니는 당시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치던 도쿄예술대학의 교수 레오니드 크로이처(Leonid Kreutzer)를 알게 되었고, 곧바로 후지코 헤밍의 지도를 부탁했습니다. 당시 독일 나치에 저항하는 피아노 작품을 발표해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피아니스트로, 러시아계 유대인이었던 그는 일본 도쿄로 건너와 도쿄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엔 후지코 헤밍의 지도를 맡지 않겠다고 거절했는데요. 후지코 헤밍이 아직 어린 편이고, 특히 왼쪽 청력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후지코 헤밍은 큰 감기를 앓은 후 왼쪽 청력이 보통 이하로 떨어져 있던 상황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일본 도쿄 우에노에 위치한 도쿄 예술대학의 레오니트 크로이처 기념관 모습입니다.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태어나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유학하며, 히틀러에 대항하는 음악적 시위를 벌여 일본 도쿄로 건너가 살았던 피아니스트입니다. 후지코 헤밍에게 무료로 레슨을 해주며, 천부적인 재능을 키워주려 노력했던 후지코 헤밍의 스승입니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일본 도쿄 우에노에 위치한 도쿄 예술대학의 레오니트 크로이처 기념관 모습입니다.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태어나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유학하며, 히틀러에 대항하는 음악적 시위를 벌여 일본 도쿄로 건너가 살았던 피아니스트입니다. 후지코 헤밍에게 무료로 레슨을 해주며, 천부적인 재능을 키워주려 노력했던 후지코 헤밍의 스승입니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하지만 첫 거절에 굴하지 않고 후지코 헤밍의 어머니는 자신의 연주자 친구들 인맥까지 총동원해서 중학생이던 후지코 헤밍을 크로이처 교수의 레슨실로 데려가는 데 성공했습니다. 자기 딸 청력은 베토벤처럼 심각한 것이 아니며,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거든요.

이런 상황이 무척 못마땅했을 크로이처 교수는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했고요. 후지코 헤밍이 피아노 연주를 시작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크로이처 교수는 연주를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후지코 헤밍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말했어요.

이때부터 후지코 헤밍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어버린 크로이처 교수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크로이처 교수는 후지코 헤밍의 가정 형편을 알고, 무료로 레슨을 해주었고요.

후지코 헤밍의 부모와 비슷한 시기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유학했던 크로이처 교수는 후지코 헤밍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후지코 헤밍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후 후지코 헤밍은 도쿄예술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하는 동안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한 역량을 키워나갔습니다. 참 후지코 헤밍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 크로이처 교수에게 레슨을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 크로이처 교수의 저택에는 여럿의 하인이 상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홍차와 과자를 내어주는 하인도 있었다고요. 당시 도쿄에서 크로이처 교수가 얼마나 인기 있는 피아노 선생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20대의 후지코 헤밍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입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20대의 후지코 헤밍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입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후지코 헤밍이 크로이처 교수에게 피아노에 대한 많은 것들을 배우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크로이처 교수는 자신의 어린 제자가 일본을 넘어 세계에서 이름을 떨칠 만큼 강력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노력했는데요. 그 중 결정적인 사건은 NHK가 주최한 음악 콩쿠르에 참가한 헤밍이 우승을 거머쥔 사건입니다. 콩쿠르 우승을 통해 연주회에 참가할 기회가 생겼거든요.

당시 17세의 후지코 헤밍이 일본 전역에 방송된 콩쿠르 우승자 연주회에 나서서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했습니다. 이 연주를 통해 후지코 헤밍은 일본에서 처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반드시 유럽으로 유학가겠다는 계획도 세운 채 말이죠.

하지만 후지코 헤밍에게 또 다른 시련이 이 시기 찾아왔습니다. 주일 스웨덴 대사관으로부터 발송된 편지 한 통에는 후지코 헤밍이 더 이상 스웨덴 국적을 유지할 수 없다는 통보가 적혀있었거든요. 심지어 일본도 후지코 헤밍에게 일본 국적을 줄 수 없다고 했고요. 이렇게 후지코 헤밍은 18세에 무국적자가 되었습니다.

〈 '대학 졸업과 동시에 무국적자가 된 후지코 헤밍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참고 문헌
<교토 저널> www.kyotojournal.org 
<파리의 피아니스트 : 후지코 헤밍의 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