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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예술의 정수, 서예의 농담에 빠지다

수원박물관 <예법묘경(隷法妙境)>전시 기획한 김지나 학예사

글·사진 서경리 기자 |  2021.12.01
박물관의 중요한 역할이라면 유물 관리 및 연구, 그리고 전시다. 그러기에 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의 역할은 막중하다. 지자체 최초로 서예 전문 전시관을 갖춘 수원박물관의 김지나 학예연구사. 그는 수원박물관 소속 학예사 중 유일한 서예학 전공자로 서예 관련 유물과 소장품을 수집·관리하고 관련 학술 도록과 연구저서를 만드는 일을 도맡고 있다. 2011년 〈병풍 속 글씨와 그림의 멋〉, 2015년 〈영조어필〉, 2016년 〈근대 서예와 사군자〉, 2018년 〈수원박물관 명품전〉 등 서예를 미술사적 관점으로 풀어낸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며 서예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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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는 문자를 매개로 한 예술입니다. 먼저 문자를 읽으려 하지 말고, 눈으로 보고 그대로의 느낌을 받아들이세요. 내가 지금 저 글씨를 쓴 작가라면 어떤 마음일지. 굵고 묵직하게 쓴 글씨가 둔중해 보이진 않는지, 얇고 가늘게 쓴 글씨가 꼿꼿해 보이진 않는지. 붓의 흐름에 따라 먹의 농담, 여백을 느껴보세요.”

조선시대 서예가, 유한지를 조명하는 〈예법묘경(隷法妙境)〉전이 한창인 수원박물관. 화선지에 묵직하게 써내려간 서예 작품 앞에 선 김지나 학예연구사는 “서예가 어렵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작품을 먼저 보고 느끼라”며 이와 같이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라 찬찬히 전시를 둘러보니, 붓의 흐름에 따라 묵직하거나 날렵하게 솟아오른 흑과 백의 필체가 보인다.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던 서예가 역동적인 그림체로, 예술로 다가오는 신묘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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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지 필첩. 수원박물관 제공

서예 전시 관람에의 문턱을 낮추며 그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문자의 아름다움을 붓으로 표현하는 예술인 서예는 한자 서체가 전·예·해·행·초서 순서로 발달했어요. 전서와 예서는 문자의 기원으로 인식되고 있죠. 문자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천부적인 자질을 갖춘 서예가, 기원 유한지는 예서체를 전문으로 이름 알린 인물이에요. 정조 임금으로부터 높이 평가 받아 수원화성의 현판 글씨를 맡기도 했죠. 수원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華虹門)’ 현판 글씨를 쓴 이가 바로 유한지입니다. 이곳에 유한지의 글씨를 서체별로 감상할 수 있도록 한자리에 모았어요. 이번 전시를 통해 조선시대 예서 필법의 신묘한 경지에 들어선 명필 유한지를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예법묘경(隷法妙境). 이름부터 어렵게 느껴졌던 전시가 그의 설명 하나로 ‘읽지도 못하는 글씨’가 아닌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역사의 흥미로운 기록으로 새롭게 보였다. 

“대부분은 ‘읽을 수도 없는 작품을 어떻게 감상하냐’ 말해요. 전시 주제가 아무리 재밌어도, 서예라는 대목에서 겁을 먹죠. 문자를 보면 ‘읽어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이 생기기 때문이에요. 사실 회화나 서예 모두 작가가 심상을 풀어낸 작품이에요. 그림과 색채로 표현한 게 회화라면, 문자로 풀어낸 게 서예죠. 먹의 농도, 작가의 흥취, 공간 지면의 여백, 붓의 속도와 강약, 붓의 꺾임으로 작가의 심상이 보여 집니다.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감상을 가져가야 해요.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이 서예 감상의 시작입니다.”

 

디자이너를 꿈꾸던 소녀가
서예학도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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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서예학을 전공한 김지나 학예사는 수원박물관이 설립되던 2008년 학예사로 첫 발을 내딛었다. 대부분의 미술사학 전공자들이 회화 분야에 집중되어 있는데 반해, 그는 서예를 중심으로 한국 미술사를 파고든 보기 드문 인재였다.  

그가 서예를 전공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취미로 시작해 경상북도 전람회에 참여할 만큼 서예에 뜻이 깊었던 아버지는 중학생이던 그를 앉혀두고 “서예는 오래 곁에 두고 자기수양을 할 수 있는 학문”이라며 서예학도의 길을 권유했다. 차분한 성격에 예술적 면모가 뛰어났던 그를 곁에서 지켜봐 온 아버지의 혜안이다. 

“아버지의 권유로 서예학과에 진학했지만, 적응이 쉽진 않았어요. 무엇보다 어려서부터 서예를 배워 온 이들과 실력차이가 분명했죠. 주눅 들었지만 포기하진 않았어요. 대신 그 안에서 다른 재미를 찾았죠. 서예를 예술적으로 풀어내는 것보다 서예의 뿌리에 관심을 두고 역사를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현혹적인 현대적 글쓰기에 매료되기보다 서예의 근원이 되는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서예로 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난 뒤 다시 대학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한국미술사를 전공하며 학식을 두텁게 다졌다.  
 


미술사적으로 바라본 문자 예술, 서예 

서예의 근원, 뿌리를 향한 탐구는 수원박물관에서 학예사를 지내며 더욱 깊어졌다.

“수원박물관은 수원의 역사와 문화를 다양하게 보여주는 ‘수원역사관’과 한국서예사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한국서예관’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저는 이곳에서 서예 관련 유물과 소장품을 수집·관리하고, 관련 학술 도록이나 연구저서를 만들고 전시 기획을 맡았어요. 대부분 서예전시 위주죠.”

전시를 기획할 때엔 서예 작품의 역사적 가치에서 더 나아가 미술사적 의미를 풀어내는 데에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전시 소재와 주제, 방식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병풍 속 글씨와 그림의 멋〉展을 통해 족자나 책자가 아닌 병풍을 전면에 내세워 전시했고, 〈영조어필(英祖御筆)〉展을 열며 영조 임금의 청년기부터 노년기까지 모든 기록을 한자리에 모으기도 했다. 임금의 글씨를 한자리에 모으기도 어렵거니와 이를 연구해 전시하는 시도 자체가 쉽지 않은 만큼 의미가 컸다.  

“병풍이라는 소재를 전시한 건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에요. 보통은 액자나 자그마한 책을 전시하지 병풍 자체는 전시가 어려우니 기피해 왔죠. 왕실이나 양반가는 물론, 서민의 일상생활 공간에서 장식으로 쓰여 온 병풍에는 다양한 생활 풍습, 이야기가 담겨 있어 이를 보여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또 수원하면 떠오르는 왕, 정조가 있죠. 영조는 정조의 할아버지에요. 영조의 글씨를 전시한 ‘영조어필’전은 왕의 필체가 문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고, 왕실에서는 어떠한 권력을 차지하는지 그 의미를 알아보기 위한 접근이었어요. 글씨를 역사학적인 측면이 아닌 미술사적인 측면으로 바라보는 시도죠.”

 

근대 서예와 미술의 다각적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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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인합작병풍. 수원박물관 제공

2016년에는 〈근대 서예와 사군자〉展을 열고 조선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에 이르기까지 근대기 우리나 미술 시장의 변화 안에서의 서예를 조명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이후 왕권 하락으로 미술 시장이 침체되었다가 일제침략 이후로 또 다른 변화를 겪어요. 인쇄술이 발달했고, 화랑과 근대식 미술교육기관이 생겨나며 미술이 대중화되고 상업적으로 변모했죠. 이러한 과정에서 서예는 어떠한 변화 흐름을 탔는지를 살폈어요. 더불어 영남, 호남, 서울과 평양까지 지역별 서풍의 특징과 사조 흐름을 살펴보았습니다. 기존에 없던 접근법이죠.”

근대 서예와 미술에 대한 접근이 새로웠던 만큼 파장도 컸다. 수원박물관의 전시에 이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앞다퉈 근대미술과 서예를 집중 조명하는 전시를 열었다. 그가 던진 돌멩이 하나가 파문을 일으켜 근대 미술로까지 전시 분야가 확장된 것. 그의 활약이 알려지며 서예 전시 관련 자문을 구하러 오거나 유물 선별 관련한 문의도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서예, 아는 만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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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지나 학예사는 수원의 기증 전문 사료관인 수원광교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전통과 현대를 뒤섞은, 새로운 형태의 서예 전시를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10여 년 학예사로 지낸 경험이 쌓여 서예 유물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어요. 유물이나 수집품을 볼 때도 전시 활용도가 있나, 향후 전시와 엮을 수 있는지를 다각적으로 고민하죠. 박물관의 역할은 유물 수집과 연구, 그리고 전시에 있어요. 고증을 바탕으로 유물의 가치를 사실로 밝혀내 책으로 발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대중들이 쉽게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하는 일이 중요하죠. 다양한 박물관을 다니면서 어떻게 대중에 다가서면 좋을지 늘 고민해요. 역사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자의 서체, 서예라는 것이 무엇인지 대중에게 좀 더 쉬운 언어로 알려주고 싶어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 서문에 이런 글이 있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되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미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 흙 위로 흰눈 소복히 쌓이는 이 겨울, 서예는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던지고 먹이 주는 농담의 변주에 빠져보면 어떨까. 그 길에 김지나 학예사가 기꺼이 동행해줄 테니 믿고 가봄직 하다. 김지나 학예사가 기획한 〈예법묘경 -기원 유한지 서예〉展은 수원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 12월 26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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