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 맥주 전성시대

박정진 진주햄 대표

수제 맥주 브랜드 ‘카브루’로 K-비어를 꿈꿉니다

글 : 김민희 기자  / 사진 : 서경리 기자

무언가에 홀린 듯 집어들었다. 편의점 냉장고에 진열된 수십 개의 캔맥주 중 단연 튀었다. 촌스러운 듯 세련된 듯, 레트로스러운 디자인의 캔맥주는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름하여 ‘경복궁’. 그 옆엔 ‘남산’ ‘성산일출봉’이 사촌 포스를 풍기며 쪼르르 진열돼 있다. 딸깍, 캬~! 동공이 커지고, 목젖이 열렸다. 이제껏 맛본 캔맥주의 단선적인 맛을 배반하는, 캔맥주의 신세계였다. 쌉싸래하면서 풀 향도 났고, 톡 쏘는 청량감이 강하지만 목 넘김은 부드러웠다. 한국 수제 맥주의 선구자 브랜드 ‘카브루(KABREW)’ 작품이다.
수제 맥주의 성장세가 놀랍다. 매년 30~40%씩 성장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시장의 변화다. 과거 수제 맥주가 주로 펍과 레스토랑 등 도매 시장을 중심으로 소비됐다면, 지금은 편의점, 마트 등 소매 시장 중심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카브루’가 지난해 6월 출시한 화사한 꽃 향의 수제 맥주 ‘경복궁’의 경우, 7개월간 90만 캔이 팔렸다. 당초 카브루 측의 판매 예상치인 30만 캔의 세 배에 달하는 수치다.

카브루는 원래 맥파이, 더부스 등 서울 이태원동 경리단길에 있는 ‘핫’한 펍에 맥주를 공급하던 작은 브루어리였다. 당시로선 거의 유일한 수제 맥주 양조장으로, 장인 정신에 가까운 고집스러움으로 수제 맥주를 제조해 ‘숨은 실력자’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다 2015년 ‘천하장사’로 유명한 진주햄이 카브루를 전격 인수하면서 더 큰 날개를 달았다. 금융맨 출신의 2세 경영인 박정진(45) 진주햄 대표의 전략적 판단이었다.

“2013년 진주햄에 처음 왔을 때 브랜드의 올드한 이미지 개선을 위해 햄맥(햄+맥주)을 파는 펍을 권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수제 맥주 붐이 막 일기 시작할 때였어요. 멘토 같은 분이 카브루 창업자를 소개해주셨죠. 이야기를 나누며 수제 맥주의 성장잠재력에 눈을 뜨게 됐어요.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다양성 욕구에 소구하는 산업이라는 점이 끌렸습니다.”

동네 양조장에 가까운 작은 회사였던 카브루는 진주햄이 인수한 이후 영업과 마케팅, 관리와 물류조직을 갖추고 생산설비를 효율화하고 현대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거의 창업에 가까운 과정이었다.


2017년 카브루는 세계 수제 맥주계에 깜짝 놀랄 만한 일을 냈다. 세계 3대 맥주 대회인 ‘유러피언비어스타(European beer star)’에서 IPA 부문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한 것.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사건이었다. 수제 맥주 종주국인 벨기에, 미국 등을 제친 성과로, K-비어의 서막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경복궁’이 바로 그 금상을 수상한 귀하신 몸이다. 출품 당시에는 도수가 높은 편이었으나, 한국인 취향에 맞게 도수를 다소 낮추고 연잎 가루를 첨가했다. 목 넘김이 부드러우면서 한결 가볍고 편안하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혼술·홈술, 음주 문화가 달라진다

서울 청담동에 있는 카브루 브루펍. 브랜드의 상징인 ‘구미호’ 콘셉트를 공간 곳곳에 녹였다.
박정진 대표는 인터뷰에서 ‘다양성’을 여러 번 강조했다. 선진사회로 갈수록, 복잡성의 시대로 갈수록 구성원들의 욕구는 다양해지기 마련이다. 음주 문화도 마찬가지. 1차는 소주와 삼겹살, 2차에는 맥주와 오징어를 찾던 천편일률적 회식 문화는 이제 화석이 돼가고, 더 나아가 ‘부어라, 마셔라’ 식의 회식 문화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혼라이프를 즐기면서 나만의 개성을 추구하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진 것이다. 박 대표는 수제 맥주 대중화의 원인과 징후를 두 가지 차원에서 읽어낸다.

“먼저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외식을 줄이는 것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더 큰 원인은 음주 문화 자체의 변화예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홈술, 혼술이 늘고 있어요. 일찍 퇴근하면서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HMR 제품(간편식)을 사고, 집에서 넷플릭스를 감상하며 혼술을 즐기는 식이죠.”

수제 맥주 제조 과정은 엄마의 부엌을 닮았다. 레시피에 정답 같은 건 없다. 수제 맥주 재료의 후보는 무궁무진하다. 취향에 따라, 계절과 토양에 따라 적합한 이 재료 저 재료를 넣어가며 최적의 맛을 찾는다. 카브루 수제 맥주의 경우, 청포도, 파인애플, 복숭아, 레몬, 오렌지 등 과일 향은 물론 흑미, 생강, 후추, 간장을 첨가해 만들기도 하고, 레몬그라스나 연잎 가루를 넣기도 한다.


30개 회원사의 한국수제맥주협회장 맡아

박정진 대표. 카브루 브루펍에서는 브루어리에서 갓 만든 신선한 수제 맥주를 맛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수제 맥주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은 5~6년 전쯤. 올해는 수제 맥주 대중화의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수제 맥주에 대한 정부의 규제 완화 조치가 하나둘 풀리면서 성장가능성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때마침 올해 초부터 30개 회원사를 거느린 한국수제맥주협회장을 맡게 된 박정진 대표는 그만큼 어깨가 더 무겁다.

“올해 초부터 주세가 종가세에서 종량세로 전환됐습니다. 수제 맥주에 부과하는 주세가 낮아지면서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손쉽게 즐길 수 있게 됐어요. 게다가 지난 5월 19일 수제 맥주 OEM을 허용하고, 음식과 동반한 주류 배달을 허용하는 등 규제 완화 조치가 발표됐습니다. 수제 맥주 시장이 한층 더 폭발력을 갖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진 대표는 2세 경영의 모범사례로 꼽힌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로체스터대에서 MBA를 취득한 그는 삼성증권 M&A팀, 씨티그룹 상무 등을 지냈다. 진주햄에 합류한 건 2013년,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금융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합류 이후 카브루를 인수해 신성장 동력으로 삼는 등 사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2006년 500억 원대이던 매출은 2014년 1000억 원대를 회복했고, 2019년에는 1200억 원을 기록했다.

그의 조부는 조양상선그룹 고 박남규 회장, 아버지는 진주햄을 25년간 이끈 고 박재복 회장이다. 조양상선그룹은 한때 한진해운, 현대상선과 함께 국내 해운업계의 트로이카로 불렸다. 진주햄을 인수하는 등 여러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서열 30위권까지 올랐던 조양상선그룹은 IMF 외환위기의 폭격을 피해가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박 대표의 아버지 박재복 회장은 국내 최초의 육가공업체인 진주햄을 이끌며 ‘천하장사’ ‘줄줄이비엔나’ 등을 히트시켰다. 하지만 대기업 자본이 동종 업계에 밀려들어오면서 사업의 다각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박정진 대표의 다섯 살 아래 동생 박경진 부사장이 26세에 먼저 진주햄 경영에 뛰어들었다. 리먼 사태 등 금융위기 속에서도 철벽 방어로 회사의 성장을 지켜냈다. 형은 더 큰 물에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며 실력을 다져나갔다.


우애 좋은 형제의 2세 경영

카브루 브루펍에서는 고객을 대상으로 수제 맥주와 음식의 페어링을 내세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들 형제의 우애는 재계에서도 유명하다. 진주햄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는 동생은 사장의 자리를 탐낼 만했지만, 형을 위해 비워뒀다. 2010년 아버지 박재복 회장이 작고한 이후 3년간 그렇게 대표이사 자리는 공석이었다. 진주햄 홈페이지 하단에는 특이하게도 형제가 나란히 대표이사로 등재돼 있다. 부사장인 동생을 사업 파트너이자 동업자로 동등하게 생각하는 형의 마음이다.

“동생한테 늘 고맙죠. 어려운 시기를 겪고 극복하면서 저보다 더 중요한 일을 많이 했는데도 저를 위해 사장 자리를 비워뒀으니까요. 집안 자체가 형제간의 우애를 중요하게 여기고, 형에 대한 존경을 강조하는 분위기였어요, 제 동생은 저를 아직도 형님이라고 부릅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부모님께서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신 게 굳어졌어요.(웃음)”

둘의 역할은 같은 듯 다르다. 역할을 딱 나누지는 않지만, 제조업에 특화된 부분은 동생 박경진 부사장이, 전략이나 재무 부분은 금융맨 출신인 형이 주로 맡는다. 박 대표는 “저와 부사장은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나 가치가 깜짝 놀랄 정도로 비슷한 면이 많다”며 “생각이 비슷하고 이해관계도 일치하는 사람과 일할 수 있다는 자체가 큰 행운”이라고 말한다.

직원 규모가 450명에 달하지만, 박 대표는 기사와 비서를 따로 두지 않는다. 직접 운전해 출퇴근하고, 매년 직원과 떠나는 해외 브루어리 투어 때는 직원을 대신해 직접 운전대를 잡는다. 효율성과 겸손, 책임감과 솔선수범이 몸에 밴 듯 보였다.

젊은 형제 경영인이 합류한 이후 진주햄은 혁신을 거듭해왔다. 먼저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해나갔다. 수출망을 확대해 미국, 캐나다, 호주, 유럽 등 20개국에 진주햄을 수출하고 있다. 2009년 수출액 6000만 원을 기록한 이후 매년 성장해 2018년엔 130억 원을 기록, ‘천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해외 합작사도 설립했다. 2018년 베트남의 CJ격인 베트남 최대 식품회사 ‘마산그룹’과 육가공 합작법인을 만든 것. 설립 이듬해인 2019년엔 매출액 230억 원을 기록하며 급성장하고 있다. 샐러드 카페인 ‘샐러디’는 진주햄 관계사다.

“샐러디는 매장 수가 1개이던 시절, 청년 창업 멘토 역할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어요. 업장 수가 늘어나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 조언하다가 그들의 비전에 공감해서 주주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주요 원재료를 공급하면서 함께 커나가고 있어요.”


우리 것이 귀한 것

전통을 기반으로 한 혁신. 진주햄을 이끌어가는 형제의 비전이다. 분홍소시지나 줄줄이비엔나에 대한 추억을 자산 삼아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전략이다. 우리 옛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카브루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GS25와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경복궁’ ‘남산’도 그렇고, 카브루의 상징인 ‘구미호’도 연장선상에 있다. 전래동화나 〈전설의 고향〉 단골 소재였던 구미호에서 ‘변신의 귀재’ ‘일상을 벗어나는 코드’를 불러냈다.

청담동 카브루 브루펍은 구미호를 형상화한 공간이다. 진회색 입구부터 신비스러운 동굴 느낌을 풍기고, 문을 열면 동굴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길을 만들었다. 펍을 에워싼 대나무숲은 구미호의 숲이고, 중앙 천장에 비치는 원은 구미호의 우물인 ‘미호정’이다. 구미호의 신비스러움을 내세운 카브루의 CF 유튜브 영상은 조회수가 36만 뷰에 달한다. 광고임에도 콘셉트가 분명하고, 영상이 아름다워 감상하듯 자꾸 보게 된다는 후기가 넘친다.

카브루 브루펍은 수제 맥주와 요리의 페어링을 내세운 공간이다. 입맛을 북돋우는 와인이 따로 있듯, 수제 맥주 세계 또한 심오하다.

“맥주 펍은 2차 장소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어요. 저녁식사 때 오셔서 맛있는 맥주와 함께 요리를 즐기는 곳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픈 단계부터 강레오, 박찬일 셰프와 긴 시간 호흡을 맞춰온 이다경 셰프를 영입해 신선한 맥주와 페어링된 제철 요리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7월 새롭게 선보이는 신제품 ‘구미호’ 시리즈는 카브루의 브랜드 정체성을 한결 더 명확히 했다. 하루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도시의 젊은이들이 쉬면서 즐길 수 있는 맥주가 콘셉트다. 제품명이 아예 ‘구미호 릴렉스 비어’다. 박정진 대표는 “석양이 지는 보라색을 내세우고, 문양도 뇌가 쉴 때 나오는 알파파 문양을 넣었다”며 “레몬그라스를 가미해 편안한 쉼과 어울린다”고 설명했다.

Break your routine, 카브루의 브랜드 슬로건이다. 평범함을 넘어 소비자의 삶에 환상과 특별함을 더하는 맥주를 추구한다는 의미다. 박정진 대표에게 수제 맥주는 삶의 수단이자, 자신만의 취향을 찾아주는 새로운 세계이기도 하다.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어요. 저는 쓴맛이 오래 남는 맛은 별로 안 좋아하고, 밀맥주보다 페일 에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일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가 퇴근 후 맥주 마시면서 멍하게 야구를 보는 순간이에요. 주로 ‘남산’을 마십니다. 맥주는 저에게 사업 수단이자 쉼표인 셈입니다.”
  • 202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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