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애

대중음악으로 본 90년대생의 사랑법

“내꺼인 듯 내꺼 아닌…”

시대도 국적도 가리지 않는다. 대중음악은 늘 사랑을 다뤄왔다. 노래방 기계에 등록된 곡을 중심으로 한국 대중음악 2만 6000곡의 가사를 분석한 《노래의 언어》(한성우 저, 어크로스)에 따르면 가사에 ‘사랑’이 등장하는 노래의 비율은 65.22%에 이른다. 사랑을 노래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쓰이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실제 사랑 노래의 비율은 훨씬 높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도 다 같은 사랑이 아니다. 시작되는 사랑이 있고, 진행 중인 사랑이 있으며, 끝난 사랑이 있다. 그리고 짝사랑도 있다. 그 모든 사랑을 합친다면 결국 모든 형태의 관계다. 감정이 있는 관계. 다만 사랑은 언제나 극적이어서 노래의 소재로 삼기 좋다. 음악으로 그려내는 풍속도다. 사랑 노래에는 언제나 시대가 담겨 있다.

사랑은 언제나 음악의 주인공이었지만, 그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진 것은 1990년대다. ‘사회 속의 나’가 아닌 ‘나로서의 나’, 즉 사생활이 대중문화의 주된 테마로 등장했다. 고 최진실, 최수종 주연의 1992년 미니시리즈 〈질투〉는 주인공의 부모가 등장하지 않는 최초의 드라마였다.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을 배제하고 20대 남녀의 이야기에만 집중한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넥스트, 015B, 듀스 등 자기 노래를 직접 만들어 부르는 20대들이 음악계의 중심이 된 그때, 마치 지금의 웹드라마에서 그리는 것처럼 연인 관계를 다룬 구체적인 노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청승의 시대
순애보이거나 일편단심이거나


1980년대까지 노래들은 순애보, 아니면 일편단심이었다. 마이너 코드(단조)풍의 멜로디에 애끓는 가사가 주를 이뤘다. 90년대는 청승의 시대가 끝나고 데이트의 기쁨을 음표로 그려내거나 다양한 형태의 연애를 표현했다. 그때의 노래들은 그전에 없던 ‘오해’와 ‘권태’를 적극적으로 음악의 세계로 초대했다.

쿨의 ‘애상’이 대표적이다. 이 노래는 남자와 여자의 마음을 이재훈과 유리가 한 노래 안에서 대변하는 구조를 갖는다. “우연히 너를 보았지 / 다른 남자 품안에 너를 /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너무 행복한 미소 / 내 사랑은 무너져 버렸어”라는 남자의 말에 “그게 아냐 / 변명이 아니라 그 남자는 나와 상관없어 / 잠시 나 어지러워서 기댄 것뿐이야 / 날 오해하지 말아줘”라는 여자의 입장이 뒤따른다.

그전의 남녀 듀엣이 이정석·조갑경의 ‘사랑의 대화’, 이문세·고은희의 ‘이별 이야기’처럼 사랑의 정점이나 종착점을 노래했던 것에 비하면 그 사이의 어느 지점을 그려내고 있다. 솔리드의 ‘천생연분’도 그렇다. 이 노래는 소개팅을 제의받은 남자가 약속 장소에 갔더니 정작 여자친구가 나와 있었다는 이야기다. 비극적 결말에 이를 수 있으나 이를 오히려 사랑의 재발견으로 바라보는 긍정적 내용이다. 이른바 ‘신세대’가 주도하던 90년대 중반의 분위기가 노래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관계를 넘어 연애 중인 사람의 솔직한 심리를 보여준 것도 90년대부터다.


#1990년대, 신인류의 사랑
개인의 탄생과 권태의 풍경



이 부분의 ‘장인’은 015B다. 메인보컬 없이 여러 명의 객원보컬을 기용하는, 한국 최초의 프로젝트 그룹이었던 그들의 노래는 종종 언론에 의해 “신세대의 풍속도를 그려낸다”는 평을 받았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과 ‘신인류의 사랑’이 대표적이다.

노래방이 술자리의 마침표로 자리 잡던 90년대 초중반, 누구에게나 ‘전주 스킵’의 기술을 체득케 했던 ‘아주 오래된 연인들’은 권태기에 빠진 연인들의 속마음을 그린 최초의 노래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라고 노래하는 객원보컬 김태우는 한국 노래에서 들어본 적 없는, 짜증 섞인 나른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 목소리 역시 이전 시대의 가사에서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연인의 속마음을 대변한다.

90년대의 20대, 즉 신세대 풍속도의 결정판은 역시 015B의 ‘신인류의 사랑’이다.

“맘에 안 드는 그녀에게 계속 전화가 오고 / 내가 전화하는 그녀는 나를 피하려 하고… / 주위를 보면 나보다 못난 남자들이 다 예쁜 여자와 잘도 다니는데 나는 왜 이럴까.”

당시 언론에서는 신세대를 꼬집는 화두로 외모 지상주의를 꼽곤 했다. 오직 얼굴만 보고 연애 상대를 정하는 풍속을, 기성세대는 고까워했다. 그 근거로 삼는 노래가 ‘신인류의 사랑’이다. 반면 이 노래는 015B의 노래 중 유일하게 〈가요톱10〉 1위까지 기록하며 신세대의 마음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노래들은 폰팅, 소개팅이 성행하고 ‘삐삐’라고 하는 개인 통신기기의 등장으로 전체보다 개인의 삶이 중요해진 90년대의 풍속도이자 현미경이었다.


#2000년대, 썸남썸녀 전성시대
사랑과 우정 사이도 오케이



그렇다면 2010년대의 음악은 사랑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90년대와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썸’의 유무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안 사귀는 것도 아닌, 호감은 있되 연애에는 신중한 그런 관계다. 연애를 ‘감정 소모’라 생각해 2010년을 전후로 아이돌이 내수 산업에서 수출 산업으로 확장되면서 가사의 섬세함은 경원시되곤 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해외 팬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가사에 의미를 부여해선 안 됐기 때문이다.

샤이니의 ‘링딩동’ 등 K팝 가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시선이 생길 무렵, 정기고와 소유의 ‘썸’이 등장했다. “요즘 따라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 이게 무슨 사이인 건지 사실 헷갈려”라는 가사는 밀레니얼 세대의 연애를 정확히 표현한 사전적 서술이었다.

90년대라고 이런 관계가 없었겠냐만, 당시 음악은 이를 슬프게 바라봤다.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가 대표적이다. 썸이란 사랑과 우정의 딱 중간 관계이건만, 90년대의 신세대는 이런 애매한 관계를 용납하지 못했다. 반면 2010년대의 밀레니얼은 썸을 하나의 관계, 즉 연애의 전 단계로 적극 수용한다.

‘썸’의 흥행 이후 “나 오늘부터 너랑 썸을 한번 타볼 거야”라는 볼빨간사춘기의 ‘썸 탈거야’, “헷갈리게 하지 말아요 / 농담인지 진담인지 확실히 해주면 안될까요”라는 슈가볼의 ‘농담 반 진담 반’ 같은 노래들이 사랑을 받았다. 아이유는 ‘Blueming’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어쩜 이 관계의 클라이맥스 / 2막으로 넘어가기엔 지금이 good timing”. 우정에서 출발해 사랑으로 넘어가기 직전, 서로의 마음을 여과 없이 확인하는 단계를 즐기는 2010년대 사랑법을 아이유는 정확히 그려냈다.

생각해보면 어느 시대나 그랬다. 모든 연애물의 가장 설레는 순간은 사랑이 시작된 이후가 아니다. 시작되기 전이다. 어떻게 남남은, 친구는 연인이 되는가. ‘배고프다’ ‘졸리다’처럼 쉽게 뱉을 수 없는, ‘사랑한다’는 그 말이 어떻게 마음에서 입으로 샘솟는가. 그것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인연의 기승전결 중 ‘승’에 해당한다. 지난 시대의 노래들이 놓쳤던 사랑의 풍경에, 밀레니얼 세대의 뮤지션이 새로운 색을 입히고 있다. 사랑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으로.
  • 2020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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