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을 훔친 영화人 〈5〉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

B급 무비의 품격

“당신이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든, 얼마나 많이 봤든, 타란티노의 영화 지식은 당신을 뛰어넘을 것입니다.”

할리우드 배우 브래드 피트가 한 말이다.

미국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 1963~)는 자타가 공언하는 영화광이다. ‘걸어 다니는 영화 사전’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다. 〈펄프 픽션〉(1994)을 찍을 당시 배우 사무엘 L. 잭슨은 촬영할 신을 설명하면서 온갖 영화와 감독들을 언급하는 타란티노를 보고 경악했다고 말했다.

이는 타란티노의 성장 환경과 연관이 있다. 테네시주 녹스빌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 때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랐다. 영화를 좋아한 어머니를 따라 철들기 전부터 극장을 다니며 영화에 눈을 떴다. 연출과 연기에 관심이 생긴 그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극단 스태프로 들어가 일했으며, 22세 때부터는 비디오 가게에서 점원으로 근무하며 장르 영화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1930~40년대 갱스터 영화, 1960~70년대 스파게티 웨스턴과 B급 영화 그리고 아시아 무협물에 심취했다. 그때 축적한 지식들이 그가 만드는 영화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타란티노는 1992년 저예산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메가폰을 잡으면서 감독 데뷔에 성공했다. 〈저수지의 개들〉은 범죄를 도모하기로 한 일곱 명이 식당에 모여 가수 마돈나의 히트곡 ‘라이크 어 버진(Like a Virgin)’을 놓고 외설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타란티노 특유의 장광설이 잘 드러나는 이 도입부는 플롯과 무관한 내용인데도 관객들의 주의를 끌어모으며 자연스럽게 캐릭터들 간의 관계를 드러내 보인다.

영화에서 배우의 대사는 줄거리나 플롯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는 절제된 형태이기 마련인데, 타란티노는 그것을 과감히 깨버렸다. 현실 세계에서 건달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이 영화에서처럼 욕설로 가득한 쓸데없는 잡담이 태반일 확률이 높다. 타란티노는 이런 식으로 극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효과를 준 셈이다.



이토록 산뜻한 복수라니

타란티노는 차기작 〈펄프 픽션〉으로 제47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며 연출 역량을 입증했다. 싸구려 범죄 소설의 오마주인 〈펄프 픽션〉에는 과도한 폭력, B급 취향, 걸쭉한 입담, 챕터식 분할 구성, 기존 곡들에서 뽑아낸 OST 등 타란티노 영화의 특징이 모두 녹아 있다. 이 작품 덕에 당시 한물간 배우였던 존 트라볼타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중반 챕터에 등장해 만만치 않은 존재감을 과시한 우마 서먼은 할리우드의 샛별로 떠오르게 됐다.

〈킬 빌1〉(2003), 〈킬 빌2〉(2004) 시리즈에서는 타란티노 영화의 특징인 ‘유혈 낭자’가 한층 강화된다. 특히 〈킬 빌2〉에서는 피가 마치 분수처럼 쏟아지는 장면이 많아 흑백 화면으로 처리할 정도였다. 〈킬 빌〉 시리즈는 홍콩 무협영화와 일본 사무라이 극을 모티브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작품 이후 수많은 패러디를 낳은 이소룡 복장, 사무라이 검들이 난무하는 액션 신 등은 관객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몇 분 분량으로 삽입된 연출도 특이했다. 실사 영화에서 날이 선 듯 선명하고 잔인한 애니메이션이 튀어나오는 것이 상당한 충격을 줬는데, 극의 흐름에 어울리게 녹여낸 감독의 솜씨가 돋보이는 연출이었다.

타란티노는 〈킬 빌〉 시리즈를 계기로 ‘복수’ 모티브를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자신이나 주변인들이 당한 폭력에 대해 철저하게 응징한다. 타란티노는 응징을 당하는 대상이 ‘폭력을 당해도 마땅한’ 인물이나 집단으로 설정함으로써, 폭력 장면에 대한 관객의 심리적 부담감을 덜어주는 방식을 택한다. 〈킬 빌〉에서 피의 응징을 당하는 자들은 결혼식을 앞둔 신부를 피범벅으로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언어의 천재?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또한 복수의 모티브를 사용하고 있다. 2차 대전 중 나치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행태에 분개한 유대인 출신의 미군 엘도 레인(브래드 피트) 중위는 “당한 만큼 돌려준다”는 신념으로 그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모아 ‘개떼들(바스터즈, basterds)’이라는 조직을 만든다. 영화의 또 다른 축으로, 나치 게슈타포인 한스 란다(크리스토프 왈츠) 대령에 의해 가족을 몰살당한 프랑스 여성 쇼산나(멜라니 로랑)는 한스 란다에 대한 치밀한 복수를 준비한다.

영화는 ‘옛날, 나치 점령 프랑스’ ‘미친 개떼들’ 등 다섯 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다. 각 파트에 걸쳐 타란티노의 장기인 수다가 자주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게슈타포와 미국 스파이가 서로 정체를 캐내기 위해 벌이는 설전이 아주 볼 만하다. 언어가 정체 은닉의 여부를 판단하는 핵심이기에 이 파트에서는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이 작품의 맛을 가장 잘 살린 캐릭터는 한스 란다 대령이다. 타란티노 스스로 본인이 만든 캐릭터 중 가장 매력적이라고 자부한 언어의 천재다. 한스 란다 역을 맡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배우 크리스토프 왈츠는 입가에 미소를 살짝 머금은 채 아무렇지 않게 총살 지시를 내리는 등 비정하고 치밀한 게슈타포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그는 이 영화로 제62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제82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등을 받으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 타란티노 영화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대사다. 온갖 욕설과 블랙 유머가 난무하고, 경우에 따라 엄청난 대사의 장광설 장면이 등장한다. 양질의 대사가 이어지고 그 대사를 통해 캐릭터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며, 인물에 대한 정보를 축적해나가다가 영화 후반부에서 캐릭터 간의 긴장 관계를 폭발시킨다.


익숙하지 않거나, 혐오하거나

이러한 특성들 덕분에 타란티노의 영화는 가끔 연극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헤이트풀 8〉(2015)이다. 각자 비밀을 지닌 여덟 명이 눈보라에 갇혀 한 공간에 머물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영화다. 서부 개척 시대에 죄수를 이송해가던 교수형 집행인이 설원 속에서 우연히 현상금 사냥꾼, 보안관과 합류하게 된다. 거세 눈보라를 피해 오두막 산장으로 들어선 이들은 먼저 와 있던 또 다른 네 명과 만나는데, 큰 현상금이 걸린 죄수를 놓고 독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긴장은 극에 달한다.

타란티노의 영화는 호불호가 제법 갈린다. 그의 영화 스타일에 익숙지 않거나 잔인한 장면을 혐오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선뜻 좋아하기 힘든 면모가 있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은 우리 예상을 깨는 놀라운 전개와 기발한 장면을 보여준다. 또한 대중적 소재를 즐겨 사용하는 편이라 엔터테인먼트 영화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언젠가 타란티노 감독은 열 번째 영화를 만든 뒤 은퇴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그의 팬들은 그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지난해 개봉해 〈기생충〉(감독 봉준호)과 아카데미 경쟁을 함께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그의 아홉 번째 작품이다.
  • 2020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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