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영애

여전히 우아하기도 하지

글 : 선수현 기자  / 사진제공 : 굳피플 

“프레임 안의 공기마저 달라지게 한다.”

일순간 프레임 안의 산소 농도가 짙어진 까닭일까. 영화 〈나를 찾아줘〉의 김승우 감독은 배우 이영애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현장의 흡입력, 몰입감을 두고 한 말이지만 그의 주변으로 공기가 달라지는 건 프레임 밖 대중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는 1990년 데뷔해 변함없이 우아하고 단아한 이미지를 보여왔다. 너무 맑고 투명해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런 이미지를 의도한 적은 없어요. 제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카메라 안에서만 연기를 했지, 밖에서는 나서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CF의 영향으로 자의 반, 타의 반 그런 이미지가 굳어진 것 같아요.”

최근 이영애는 영화 〈나를 찾아줘〉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친절한 금자씨〉 이후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와 단편 영화 〈아랫집〉으로 대중에 얼굴을 비쳤지만, 장편 스크린으로 관객을 만나는 것은 14년 만이다. 오랜 공백에도 프레임 안 공기의 흐름을 바꿔놓는 힘은 여전했다.

“마음 한구석에는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어요. 하지만 늦은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 쉽지 않더라고요. 좋은 대본이 들어와도 쌍둥이 엄마의 역할이 커서 엄두가 안 났어요. 이번 영화는 신인 감독의 시나리오임에도 10년 이상 고민한 흔적과 탄탄한 구조가 보이더라고요. 고민하지 않고 시작하게 됐네요.”


쌍둥이 엄마가 전하는 진한 모성애


이영애는 영화 〈나를 찾아줘〉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 정연을 연기했다.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가 자신을 경계하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아들이 있음을 직감하고 진실을 깊숙하게 파헤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장르 영화 속 모성애를 표현했다면, 〈나를 찾아줘〉에서는 다른 결의 모성애를 보였다. 작품 속 인물의 성격이 다르기도 하지만 엄마가 되기 전과 후의 모성애를 그려내는 방법에도 변화가 있었다.

아이를 잃은 실의와 죄책감, 낯선 곳에 들어서며 감도는 불안함을 이영애는 꾹꾹 눌러 표현했다. 종종 두 눈은 초점을 잃고, 곧 터질 듯한 감정을 애써 심드렁하게 묘사했다. 실종 아동의 전단지를 나눠줄 때 돌아오는 사회의 비정한 무관심도 덤덤하게 마주했다. 아들을 찾으리란 단 하나의 희망을 갖고 버티는 그 모습이 현실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 영화를 보는 보통 사람들의 죄책감을 긁을 정도다.

“엄마이기에 작품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는 부분도 있었어요.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었죠. 어느 장면 하나 쉬운 게 없었어요. 마음 깊은 한구석은 항상 피폐하고 공허하겠지만 과하게 표현하지 않고 절제하려고 했어요. 그럼에도 이 영화를 선택한 건 그동안 보여줬던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예요.”


이영애는 늘 다양한 모습에 목말라했다. 그를 둘러싼 강렬한 신비주의 이미지 탓에 변화를 거부한 것으로 보기 쉽지만 정작 영화, 드라마 등에서 그의 모습은 정형화되지 않았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작품 안팎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그는 자신을 잘 노출하지 않는 전략으로 궁금증을 유발하는 게 아니라 늘 색다른 얼굴을 보여주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영애는 판문점을 사이에 두고 발생한 사건을 수사하는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소령 역할을 맡았다. 상반된 진술을 하는 이병헌, 송강호 사이에서 서서히 진실에 근접해가는 모습은 그동안 로맨스 드라마에서 보여준 캐릭터의 틀을 깨기에 충분했다. 그는 이 영화로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농익은 여인 은수로 분한 이영애는 청순한 외모와는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여줬다. 변치 않을 것 같던 찬란한 사랑도 변할 수 있음을 확인시키며 가슴속에 묻어둔 빛바랜 추억을 다시금 꺼내 들게 했다. “라면 먹을래요?”라고 툭 던진 도발적 대사는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작품은 드라마 〈대장금〉이다. 조선시대 수라간 궁녀에서 최초의 의녀가 되는 과정을 통해서 이영애는 단아하면서도 당찬 여성의 기품을 표현했다. 당시 그가 〈대장금〉을 선택했을 때 주변에서는 “왜?”라며 의아해했지만, 이영애는 배우로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 확신했다. 〈대장금〉은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해외 일부 국가에서는 시청률 90%를 기록할 정도로 메가톤급 히트작이 됐다. 한류의 원조를 쓴 이 드라마로 이영애는 독보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적극적이고 올곧은 대장금의 이미지가 강해서였을까. 이영애는 〈친절한 금자씨〉로 완벽한 변신을 꾀했다. 청초한 얼굴로 하얀 두부 접시를 탁 쳐내며 “너나 잘하세요”라는 지극히 불친절한 한마디는 영화 초반 분위기를 휘어잡으며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자아냈다. 그럼에도 친절하게 보일까 봐 영화 내내 붉은 눈 화장을 하고 모성 어린 복수를 시작했다.

단단한 연기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다 활동이 주춤할 즈음, 그는 새로운 작품보다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평범하게 결혼을 하고 아들·딸 이란성 쌍둥이의 엄마가 되어 간간이 근황을 전했다.


긴 달리기 후, 나를 알아가는 과정


20~30대가 달려온 시기라면, 40대는 많은 걸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금자씨’가 온전히 자신만을 생각하고 탄생했다면, ‘정연’은 가족과의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인물이다. 이영애는 가정을 갖고 많이 편안해졌다고 말했다. 배우에 아내와 엄마의 역할이 더해졌지만 자신만 바라보지 않고 주변을 두루 보는 관점과 많은 걸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계기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이들을 위해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컸다. 꼭 연기가 아니어도 일상을 보여주며 대중에게 편안하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제 50대를 향하는 이영애는 수줍게 버킷리스트도 꺼내놓을 수 있게 됐다. 그중 하나가 앨범을 내는 일. 대학 때 동아리 활동을 하며 콘서트까지 열었을 만큼 음악을 좋아한다. 가수 김윤아가 부른 영화 〈봄날은 간다〉의 OST 제의를 받기도 했다며 수줍게 웃어 보이는 그. 차후 〈물랑루즈〉 같이 노래와 연기가 결합된 작품을 선보일 날도 그려본다.

“40대는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연기자로서 다양한 색깔을 보여주고 싶기도 해요. 결혼 후 감성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저 스스로도 저의 새로운 면을 보면서 ‘이런 눈빛이 나오는구나’ ‘이런 분위기가 있었구나’ 발견하고 있어요.”

그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과감한 시도를 척척 해낸다. 그의 신비주의는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공기를 자아낼지 기대하게 만드는 힘에서 나온다. 이영애는 오늘도 여전히 신비롭다.
  • 2020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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