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과 (간직)

제주 자연사랑미술관 서재철 관장, 서민정 에듀케이터

아버지의 사진과 딸의 기획, 제주 명소를 만들다

글 : 이근미 객원기자  / 사진제공 : 자연사랑미술관 

서재철 관장(오른쪽)과 딸 민정 씨.
‘제주도 여행을 제대로 하려면 자연사랑미술관을 찾아라. 그곳에 가서 제주도 어디를 여행할지 선택하라.’

제주도를 알차게 여행하려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오가는 ‘꿀팁’이다. 지난가을 탐라문화대학 학생들의 따라비 오름 투어에 동행했을 때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알 만했다. 멀리 한라산이 보이는 오름 정상에서 자연사랑미술관 서재철(71) 관장은 360도를 돌며 수십 개 오름의 명칭과 그에 담긴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오름을 내려오면서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묘지의 유래나 몽골 지배의 흔적, 야생화 이야기를 해박하게 풀어냈다. 투어는 미술관으로 돌아와 사진으로 기록된 제주 역사를 둘러보면서 마무리됐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자연사랑미술관은 사진 전문 갤러리다. 그러니까 ‘사랑’은 ‘LOVE’가 아닌 베낄 사(寫), 사랑채 랑(廊)인 셈이다. 이곳에 가면 서재철 관장이 20대였던 1960년대부터 기록한 제주도의 풍광과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는 제주일보와 한라일보, 제민일보에서 25년간 재직하며 제주도 곳곳을 사진에 담았다. 야생화, 버섯, 새, 곤충, 말, 노루 등을 기록하느라 하루 세 번 한라산을 오르내린 적도 있다. 사진 양이 워낙 방대해 필름 카메라로 찍어둔 필름 파일만 벽 한쪽을 가득 메우고도 넘친다. 미처 정리하지 못해 상자에 보관한 롤필름도 셀 수 없을 정도다.

필름을 정리하고 사진을 전시하는 일은 그의 아내 백영희 씨가 도왔다. 아내 도움으로 제주도 생태시리즈 5권(곤충, 야생화, 새, 노루·말, 버섯)을 출간했다. 서 관장은 한라산 생태 파괴를 고발한 사진으로 1993년 한국기자상 기획보도부문상을 받았다.


딸이 합류하면서 관람객 급증

폐교한 옛 가시초등학교 자리에 문을 연 자연사랑미술관.
자연사랑미술관이 문을 연 건 2003년. 가시리 주민들은 폐교였던 가시초등학교를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킬 적임자로 서 관장을 지목했다. 당시 서 관장은 1997년에 신문사를 퇴직하고 1998년부터 제주 시내에서 미술관을 운영하던 중이었다. 서 관장의 손길을 거치면서 날개처럼 길게 배치된 교실과 뒤편의 숙직실을 비롯한 부속 건물, 넓은 운동장이 자연사랑미술관으로 변신했다. 초기에는 이곳에서 주로 사진 전시를 하다가 2007년,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큰딸 서민정(39) 씨가 합류하면서 문화 교육도 병행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추게 된 것. 서재철 관장은 딸이 큰 힘이 된다고 말한다.

“딸이 함께하면서 ‘제주 오름을 찾아서’나 ‘포구를 찾아서’와 같은 제주 문화를 알릴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사진도 찍고 강의도 하면서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외지에서 오신 분들에게 제주 전통문화를 소개했어요.”

서민정 씨가 처음부터 미술관 일에 깊숙이 간여한 것은 아니다. 중학교 시간제 수학교사였던 서씨는 틈나는 대로 미술관 일을 도왔다.

“아빠는 전달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한꺼번에 쏟아 놓느라 바쁘셨어요. ‘아이들 교육을 어른 교육처럼 하시네. 아이들이 재미없어하겠다. 사진, 교육, 체험을 섹션별로 나누어 전문화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런 생각만 했지, 당시만 해도 미술관에서 일할 생각은 없었어요.”

서씨가 본격적으로 미술관에 합류한 건 2014년,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다.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일을 그만두고 2년째 쉬던 중 한국사립미술관협회 사이트에서 에듀케이터 모집 공고를 봤다.

“에듀케이터는 전시와 관련된 교육을 기획하고 관람객을 대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전문 인력입니다. 사립미술관 활성화를 위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사립미술관협회에서 파견하는 식으로 운영되죠. 그냥 와서 아빠한테 이런저런 제안을 하면 침범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에듀케이터로 파견 오면 아빠를 도와주러 왔다고 생각하실 거라고 여겼어요.”


아빠와 딸, 사사건건 갈등 빚기도

서재철 관장이 제주 오름을 다니며 돌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하지만 초기부터 아버지와 의견 차이가 커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미술관 바닥부터 벽지, 하물며 의자 하나까지 아빠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분이 없어요. 폐교의 옛 모습을 보존하려는 아빠의 뜻에 따라 교실 나무 바닥을 걷어내지 않고 초를 입혀 사용하고 있을 정도죠. 공간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십니다. 전시장에 의자 하나도 제가 마음대로 옮길 수 없었죠. 공간이 넓으니 전시장 중앙에 의자를 놓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의자를 갖다 놓으면 아빠는 ‘전시는 관람을 위한 장소지 쉬어 가는 곳이 아니다’라며 도로 빼셨어요. 그 실랑이를 6개월 동안 했어요. 끝까지 저는 ‘앉아서 한 장의 사진을 오래 감상하고 싶은 분도 있다’고 설득했죠. 결국에는 아빠도 제 말이 맞는다 싶으셨는지 손수 나무 의자를 만들어서 갖다 놓으셨더라고요.”

부녀간 의견 충돌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전시장에 걸린 사진 간격을 조금씩 넓히는 일도 오래 걸렸고, 미술관 안에 교육실 만드는 일도 쉽지 않았다.

“문체부에서 매년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체험 행사를 지원합니다. 우리 미술관을 알릴 기회다 싶어 2016년 미술주간에 참여했어요. 폐교 미술관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교실 복도에 풍금과 책걸상을 갖다 놓고, 1960년대 교복을 비치해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일로도 아빠한테 야단을 많이 맞았어요. 청소하기 번거롭게 뭐 하러 만드느냐면서요. 하하. 그런데 포토존 덕에 미술관이 여기저기 볼거리로 소개되고 관람객이 늘어났죠. 또 체험행사를 잘 만든 덕분에 문화예술 발전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게 됐어요. 지금은 이 일을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서민정 씨가 미술관에 오고 나서 교육 프로그램도 많이 달라졌다. 주로 아빠와 사진을 연결한 프로그램들이다.

“제주도에는 현무암을 쌓아 올린 돌담이 많습니다. 아빠는 돌담 하나를 두고도 담에 얽힌 제주인의 삶을 풀어내시죠. 이거다 싶었어요. 아빠를 주 강사로 모시고 제주도 문화를 알릴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제주문화예술재단에서 지원받은 ‘보멍 걸으멍 들으멍 느끼멍’이 대표적입니다. 제주 오름을 다니며 돌담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배우는 과정은 참여자들에게 호응이 좋았어요.”

자연사랑미술관의 특별 전시실.
서민정 씨는 에듀케이터이자 기획자로서의 영역을 점점 넓히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과 문화기획학교를 비롯한 다양한 교육과정을 이수한 것이 도움이 됐다. 서 관장은 그런 딸이 있어 든든하다고 한다.

“저는 사진을 찍느라 바빴지 그걸 활용할 방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딸이 제 사진을 잘 분류하여 전시 아이디어도 주고 교육과 연계하고 있으니 고맙죠. 딸이 오고 나서 가족 관람객을 비롯해 방문객이 많아졌고, 토요일에도 정기 교육을 하니 미술관이 늘 북적북적합니다.”

서민정 씨는 미술관에서 일하며 새삼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제 아래로 동생이 셋 있습니다. 우리 형제는 아기 때부터 엄마 등에 업히거나 아빠 팔에 안겨서 한라산을 오르내렸어요. 아빠는 사진 찍을 때 우리를 자주 데리고 다니셨죠. 예쁘거나 진귀한 광경을 딸들과 나누고 싶으셨나 봐요. 아빠의 사진 한 귀퉁이에는 항상 우리가 있어요. 딸들의 한때가 아빠의 사진에 담겨 있는 거죠. 그런 아빠의 사진을 지금 일과 연결할 수 있어서 뿌듯합니다.”


서재철 관장의 독보적 사진들

자연사랑미술관의 특별 전시실.
서재철 관장의 사진 가운데 제주의 옛 포구와 해녀, 제주 원도심 변화를 기록한 사진은 독보적이다. 매일 사진을 찍다 보니 제주의 사라져가는 것들이 그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독특한 포구를 많이 찍으러 다녔습니다. 예전에 제대로 된 장비가 없었을 때는 표준렌즈를 들고 지붕 이나 전봇대에 올라가 위험을 감수하며 촬영했어요. 고무 슈트가 아닌 광목옷을 입은 해녀들과 통나무를 엮어 만든 나무배, 테우를 타고 물질 나가는 해녀의 모습은 지금은 볼 수 없는 장면들이죠. 해녀 사진을 찍을 때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하시는 해녀들이 있거든요. 지금은 오히려 그 자녀분들이 고마워합니다.”

제주해녀박물관을 비롯한 제주도 곳곳에서 서 관장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제주도는 생물권보존지역,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여러 심사 과정을 거칠 때 서 관장의 사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최근 그는 제주발전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에 자신의 사진 1500점을 기증했다. 센터에서는 이 사진을 인문, 사회,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와 교육을 위한 자료로 삼을 예정이라고 한다. 딸은 이런 아빠를 자랑스러워했다.

오래된 마룻바닥을 그대로 보존한 복도에는 옛 가시초등학교의 졸업사진이 걸려 있다.
“남들이 돈 생기면 귤밭을 살 때 아빠는 새 카메라를 사고 여행 다니시며 사진을 찍으셨어요. 백두산과 몽골을 특히 많이 가셨죠. 아빠가 카메라 사는 돈만 아꼈어도 귤밭 1만 평을 샀을 거라고 우리끼리 말하곤 했어요. 어릴 땐 아빠에게 원망이 좀 있었는데 미술관에서 일하면서부터 돈이 아닌 사진으로 문화 유산을 물려주시는 아빠가 자랑스러워졌어요.”

서민정 씨는 아빠가 쌓아놓은 콘텐츠로 무궁무진한 교육안을 만들 수 있다며 행복하다고 말한다.

“아빠는 요즘도 매일 새벽 카메라를 들고 제주의 변화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십니다. 미술관에서 일한 지 5년이 넘었는데도 아빠 사진 양이 워낙 많아서 아직 다 파악하지 못했어요. 전시 기획은 물론, 사진을 디지털화하고 영상화하는 작업도 시작해야죠. 아빠가 사진으로 제주를 기록해왔다면, 저는 교육을 통해 변화하는 제주를 알리고 싶습니다. ‘폐교 박물관’인 자연사랑미술관을 제주 역사의 기록장이자 살아있는 교육 현장으로 이끌어 가는 게 우리 부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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