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련의 일상 철학

#발효숙성中

글 : 김수련 

몇 해 전 건강 문제와 여러 일로 꽤 오랜 시간을 두문불출한 적이 있다. 그때 아는 분이 내게 종종 귀한 약초를 보내주곤 했다. 그녀는 사업 실패 후 강원도 고향으로 가서 깊은 산을 다니며 약초를 캤다. 그녀가 보내준 약초와 갖가지 산야초를 직접 보는 일은 신기하고 놀라웠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여쭈니 효소를 담그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작은 유리병에 담을 정도의 양이었지만 점점 더 많은 양을 직접 구매해서 효소를 담그기 시작했다. 거실 복도에는 20리터 발효 통이 줄지어 있다. 발효 과정에서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매일 밤 스무 개 남짓한 발효 통을 큰 주걱으로 저어준다. 뚜껑을 열어놓은 사이에 행여나 초파리가 들어갈까 조심조심한다. 나에게는 숭고한 의식(儀式)과도 같은 일이다. 천천히 정성을 들이는 과정,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이 의식은 차분히 나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지나 발효가 멈추면 건더기를 꺼내 액체만 항아리에 옮겨 담아 다시 오랜 시간 숙성시킨다.

멀리서 보면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지만 투명한 발효 통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작은 거품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귀를 갖다 대면 막걸리가 익는 것처럼 뽀글뽀글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내게 위안이었다. 전혜린의 말처럼 기차가 터널에 들어가서 안 보인다고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때론 인생의 위기가 삶의 패턴을 바꿀 기회를 주기도 한다. 습관처럼 한 방향으로 달리던 것을 제어하는 기회이다. 관성의 힘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달리던 속도를 멈추고 방향을 틀 수 있을 만큼 큰 충격이 가해진 힘이 아니면 안 된다. 방향은 한번 정해지면 빨리 달릴수록 그 방향성에 관한 생각을 잃게 된다. 왜 뛰어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멈추면 방향을 잃어 공황상태에 이른다. 두 발은 달리던 습관이 남아 허공에 허우적댄다. 하지만 그 상태를 잘 들여다보면 방향을 틀 기회일 수도 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가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정확히 우리가 향하는 곳에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내게는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다. 쉬고 있으면 정체되고 퇴보하는 것만 같은 일 중독자의 불안이었다. 멈춰 있다는 것을 타인이 알아채는 것보다, 성장에 대한 욕구가 만든 자체적인 불안이었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건강의 문제도, 삶을 뒤흔드는 대소사도 아니었다. 멈췄다는 생각이었다. 성장에 대한 욕심이 강한 이들이 그렇듯이, 늘 힘센 물줄기를 거슬러 폭포를 올라가는 기분이었기에 멈추면 그 자리가 아니라 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게으르다는 죄책감에 자신을 자책했다. 어쩌면 그때의 위기는 쉼 없이 채찍질하던 내게 고삐를 잡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힘껏 고삐를 잡은 그 손에는 물집이 터져 피가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향을 잃은 혼란이 그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효소를 만드는 일은 마음을 다스리고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무위(無爲)의 시간이 때로는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발효는 오롯이 시간을 견뎌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시간이 다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이내 곰팡이가 피고 초파리가 들어 구더기가 득실거리거나, 아니면 아예 발효되지 않는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끓일 수도 없다. 효소는 고온에서 죽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내면의 ‘무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화초를 키우다 보면 ‘뼈라늄’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된다. 뼈처럼 빼빼 말라 위로만 성장한 제라늄이라는 뜻이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거나 순을 따주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거름을 줘도 모든 영양은 성장하는 데만 다 쓰여 뼈라늄처럼 볼품없이 키만 크고 잎이 풍성하지 않은 제라늄이 되고 만다.

친구들이 연락하면 일이 없어도 늘 바쁜 듯이 둘러대고는 했다. 그런데 그 시간을 견디고 있던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 발효 숙성 중이야.”

글쓴이 김수련은 소설 《호텔 캘리포니아》 저자다. 대학에서 철학과 교육학을 전공했고 삶의 다양한 길 위에서 수많은 질문을 만났다.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해 ‘소설’의 형태로 그 질문을 세상에 다시 던진다.
  •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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