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언니 은열의 회사생활 (2)

“힘은 내면 난다”는, 막연하고도 위험한 소신

글 : 은열 

까칠언니의 한마디
당신의 에너지는 화수분이 아니다.
돈보다 귀하게, 꼭 필요한 곳에 아껴 쓸 것!
영국 역사학자 겸 작가 폴 존슨이 쓴 《윈스턴 처칠의 뜨거운 승리》(주영사)를 읽다 한 대목에서 시선이 멈췄다. “1946년에 17살이던 나는 운 좋게도 처칠에게 질문을 던질 기회가 있었다. 처칠 아저씨, 아저씨의 성공 비결이 뭔가요? 처칠은 대뜸 이렇게 대답했다. 에너지 보존이지. 앉을 수 있을 때 절대 서지 않고 누울 수 있을 때 절대 앉지 않는 거란다.”(39~40p) 잠깐 멍했고 이내 풋, 웃음이 났다. 그러곤 아끼는 펜 한 자루를 꺼내 진하게 밑줄을 쳤다.


요령부득, 내달리기 바빴던 얼치기 시절

신문사에 다닐 때 업무 성격도, 강도도 낯선 부서로 발령이 났다. 덜컥 겁이 났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까짓것, 다 사람 하는 일인데 나라고 못 할 것 없잖아? 일단 부딪쳐보지, 뭐!’ 이후 한동안 악전고투의 시간이 이어졌다. 꾀와 요령이 무슨 말이냐는 듯 종종거리며 아이템을 발제했고, 일단 통과된 아이템은 어떻게든 데드라인을 지켜 송고했다. 퇴고할 땐 조사 하나 구두점 하나 허투루 쓰지 않으려 눈에 불을 켰으며, 원고를 보낸 후엔 숨 돌릴 틈 없이 그다음 아이템을 고민했다. 마감 직후 우르르 몰려가는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단 착석한 후엔 권하는 이 하나 없어도 성실하게 술잔을 비웠다. 그러면서 내심 스스로 뿌듯해했다. ‘이만하면 너무 잘 해내고 있는 것 아냐?’

사달이 난 건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다. 회사에서 1년에 한 번 시켜주는 정기 건강검진차 병원을 찾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몸 어딘가에 혹이 있고, 심지어 계속 자라고 있으며, 개복(開腹) 수술이 유일한 제거법이란 사실이었다. 타고난 건강 체질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충격은 더 컸다. 현실 부정과 분노 폭발, 자포자기 단계를 거쳐 결국 40여 일간의 병가(病暇)를 받아 들고 수술대에 올랐다. 그렇게 ‘입사 후 최장 휴가’를 거지반 병원과 이불 속에서 보냈다.

퇴원 후 한동안 고향 부모님 댁에 내려가 지냈다. 매일 아침 ‘엄마표 집밥’으로 속을 채웠고 ‘허해진 몸 보(補)하는 데 최고’라는 보양식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걸을 만하면 아버지와 길지 않은 동네 산책을 다녀왔고, 수술 부위가 당겨 움직이기 힘들면 오래 찜(만) 해놨던 책을 몇 권씩 쌓아놓고 뒤적였다. 이도 저도 귀찮으면 내처 잤다.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든 시간이 더 긴 날도 적지 않았다.


‘에너지 수도꼭지’ 틀고 잠글 때 알아야

누군가 그랬다, 사람은 스물다섯 넘으면 웬만해선 안 바뀐다고. 나라고 예외일 리 없다. 뜻밖의 긴 휴가 후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었다곤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긴 했다. 일단 야근과 술을 줄였다. 일 없이도 불쑥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안부를 여쭸다. 바쁘단 이유로 소홀했던 친구들과의 관계도 일부(이긴 하지만) 복원했다. 아무 약속 없는 평일, 아무 계획 없는 주말을 조바심내지 않고 의연하게 맞았다.

인간이 평생 쓸 에너지는 유한하다, 고 이제야 생각한다. 살아보니 하루에 쓸 에너지와 1년간 쓸 에너지, 10년에 걸쳐 쓸 에너지가 얼마쯤은 정해져 있었다. 효율이 최고조에 이르는 시점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모르고 20대 후반의 나, 30대 초반의 나는 내 안의 에너지가 화수분이라도 되는 양 마구 퍼 썼다.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처럼 내달렸고 기어이(어쩌면 당연히도!) 탈이 났다. 그러고도 한참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1874년생인 처칠은 92세까지 살았고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앉을 수 있을 때 절대 서지 않고 누울 수 있을 때 절대 앉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는 걸 싫어했지만 살아생전 그가 남긴 업적은 셀 수 없을 정도다.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지만 노벨문학상이 더없이 어울리는 작가였고, ‘의회 민주주의의 본고장’ 영국 국회를 감동시킨 연설가였다. 10년 넘게 야인으로 떠돌면서도, 좌절할 시간을 쪼개어 아끼는 샴페인과 시가(cigar)를 즐기며 자신이 평생 머물 저택을 손수 짓고 수리했다. 그의 말마따나 에너지 보존의 위력이다.

만약 당신이 ‘갓 입사해 이제 막 일의 재미를 알아가는’ 직장인 초년생이라면 내 40일 병가 후기나 처칠의 에너지 보존 법칙 따위,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이해한다. 나 역시 직접 맞닥뜨리기 전까진 도무지 와 닿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꼭 얘기해주고 싶다. 지금은 전부인 듯 보이는 회사 생활도 인생 전체를 놓고 따지면 일부에 불과하다. 평생직장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 살다 보면 본인 건강이나 배우자 상황, 자녀 교육 등 생각지 못했던 변수의 등장으로 당초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무엇보다 당신이 지닌 에너지는 결코 무한하지 않다. 그러니 남은 기간, 소진 계획을 최대한 면밀히 세울 필요가 있다. ‘내 에너지’가 나오는 수도꼭지의 개폐 시점과 횟수를 현명하게 판단, 결정해야 한단 얘기다.


오래, 잘 사는 지름길? ‘내 한계’ 깨닫기

“힘내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힘은 낸다고 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슬프다고? 아니,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자신이 보유한 힘의 유한함을 일찌감치 깨닫고 지혜롭게 써야 오래, 그리고 잘 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칼럼을 읽느라 소비한 당신의 에너지가 모쪼록 아깝지 않았길.

글쓴이 은열은 신문사에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기업으로 이직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글쓰기인 데다 오랜 데스크 생활까지 거쳐 남의 글 들여다보고 고치는 데 이골이 났다.
어쩌면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할, ‘논스톱 20년 차 직장인’의 내공이 궁금할 이름 모를 후배들에게 손톱만 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다시 글 쓸 용기를 냈다.
  • 2018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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